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복경 Headshot

'오래된 상식'의 집요함

게시됨: 업데이트됨:
1
뉴스1
인쇄

"좌파 단체가 중심이 된 고발사건이 난무하면서 군 장성들을 여론몰이로 내쫓고 있다." 우리나라 제1야당 대표가 한 말이다. '여론몰이로 내쫓기는 장성'이 최근 '공관병 갑질'로 문제가 된 그 장성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긴 누구든 무슨 상관이랴. 그는 '좌파 단체'와 '여론몰이'만 말할 뿐, 쫓겨나는 장성들이 한 위법행위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좌파가 고발을 했건, 여론몰이가 있었건 법을 위반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은 무시된다. 홍준표 대표의 발언은 군이 법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되는 성역이라는 '오래된 상식'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저 '막말'로 냉소하며 웃어넘길 수가 없다. 법 앞의 평등 원리를 좌파의 이념선동으로 대체함으로써 법치를 무력화시키는 수법은 오래되고 낡은 것이지만 그래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최근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재임 시절 불법 정치개입에 대한 어마어마한 정보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그렇지 않을까' 짐작만 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더 큰 규모로, 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 앞에 많은 이들이 놀라고 있지만, 또 어떤 이들은 이조차 너무 익숙하다. '오래된 상식'을 공유한 이들은 현 정부가 이전 정부의 비리를 들추는 '정치보복'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들이 헌법과 국가정보원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들에게 국정원은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처럼, 안전기획부처럼 법치의 예외 지대인 것이다.

며칠 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게 12년형이 구형되었다. 특검에 따르면 그는 '계열사 자금을 횡령하여 300억원에 이르는 뇌물을 공여했고, 국내 재산을 해외로 불법 반출했으며,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범죄수익을 은닉했고, 국회에서 위증의 죄'를 범했다고 한다. 이 사태를 두고 우리 사회 일부 언론은 지금까지 재벌을 법치의 성역으로 만들어주었던 '오래된 상식'을 반복하는 데 여념이 없다. '오너 없는 경영을 하고 있는 삼성'과 '한국 반도체 산업의 운명'에 대한 절절한 걱정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한국 경제의 미래와 삼성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쉼 없이 내뱉고 있지만, 이 모든 문제의 출발이 이재용의 불법행위라는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법정에 제출된 증거가 빈약하거나 채택되지 못해서 이재용에게 유리할 것'이라며 바람을 잡는 데에만 열을 올린다. '한국 경제에 대한 기여'라는 무소불위의 논리는 지금까지 언제나 법 앞의 평등 원리에 앞섰다. 2005년 '삼성 엑스파일' 사건 때도 그랬고,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 때도 그랬다. 그래서 더 무섭다. 그들은 늘 그랬고 우리는 그런 그들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군·정보기관·재벌이 법치의 성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런 익숙함도 한몫을 한 게 사실이다. 수십년간 반복되었기에 '이번에도 또? 놀랍지도 않네'라는 체념이 쉽게 자리잡은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재벌이든 노동자든, 국정원 직원이든 아니든, 군 장성이든 사병이든 모두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이 단순한 원리는 생각보다 실현이 참 어렵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매번 분노하고 정의를 요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오래된 상식'을 가진 분들의 집요함을 절반만 따라갈 수 있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고장 난 레코드의 무한반복 구간을 듣는 것 같지만, 우리도 익숙해지지 않는 집요함을 가져보자.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