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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문화와 청문화 사이에서, '코다 프라이드'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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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코리아, 영국의 코다 캠프에 가다

글 | 이길보라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의 줄임말로 농인(청각장애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아직 코다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지만, 외국의 자료에 따르면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아이 중 90%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인이라고 한다. 10%에 해당하는 농인 코다는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수어(수화 언어)를 습득하고, 농인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청인 코다 역시 부모로부터 수어를 배우고 세상으로부터는 음성 언어를 습득한다. 자연스럽게 이중 언어 사용자가 되고, 농문화와 청문화를 동시에 접한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나의 첫 번째 언어이자 모어(母語)는 한국 수어고, 두 번째 언어는 한국 음성 언어다.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음성언어가 되지 못한 그 소리는 내겐 너무 익숙한 것이었다. 엄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보라'가 아니라 '보아'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엄마가 나를 부르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때때로 내게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림책에 눈을 두고 엄마의 목소리를 귀로 들었겠지만, 나는 그림 대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엄마는 책에 나오는 그림보다 훨씬 더 생생한 표정으로 호랑이를 연기했고, 사자를 연기했다. 그 무서운 동물이 내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나는 너무 무서워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나는 부모를 닮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러웠지만 세상 사람들은 혀를 차며 나를 불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혹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고 훈수를 두었다. 당신이 무얼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오히려 부모가 욕을 먹을까봐 나는 착한 척을 해야 했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벽이 없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엄청나게 높은 벽을 갖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그것에 세게 부딪히곤 했다. 부모를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코다 코리아, 영국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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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열린 코다 캠프에 방문한 코다 코리아. ©CODA KOREA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함께 은행에 가서 우리 집의 빚이 얼마인지를 부모 대신 물어봐야 했던 것. 대출이 안 된다는 은행원 앞에서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었지만 부모의 완강한 표정을 통역하며 왜 안 되냐며 재차 물어봐야 했던 것. 부동산에 전화해 새로 이사 갈 집의 전세금이 얼마고 보증금이 얼마인지를 울면서 통역해야 했던 것. 병원에 가서 엄마가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통역하지 못해 쩔쩔매야 했던 것. 내가 '집 안의 통역사'인지 '청각장애인의 딸'인지 '동생의 엄마'인지 혹은 '나 자신'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또 겪었던 것. 그런 일들 전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코다'라고 부른다고 했다. 내가 겪었던 일련의 비슷한 일들을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다는 것을, 20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코다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고, 태생적으로 지닌 재능으로 수화통역사가 되기도 하고 연기자가 되기도 하며 이야기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는 코다들이 모여 만든 여러 형태의 단체가 있고 그것이 CODA UK, CODA HONGKONG, CODA JAPAN, CODA INTERNATIONAL등의 이름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한국에서 모인 코다들은 우리의 모임을 코다 코리아(CODA KOREA)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모임의 미래를 고민하던 중 해외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영국의 코다 단체 CODA UK & IRELAND가 여름에 여는 코다 캠프에 참가하기로 했다.

코다 캠프는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그랜덤(Grantham)에 위치한 청소년 수련원 같은 캠프지에서 열렸다. 캠프는 총 3박 4일 동안 84명의 코다 청소년과 20명의 코다 성인 자원활동가들이 함께 하는 형태였다. 코다 코리아 구성원 중 한 명은 캠프 일정 전체를 보고 싶어 자원활동가로 함께 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캠프의 3일차와 4일차 일정을 함께 했다.

코다 캠프

캠프지에 도착하니 참가자들은 연령대별로 그룹을 나누어 여러 활동들을 체험해보고 있었다. 공중 그네를 타고 있는 그룹도 있었고, 타이어에 올라 타 이곳에서 저곳으로 뛰어 넘는 게임을 하고 있는 그룹도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사춘기를 겪고 있는 중·고등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청소년 코다가 있었다.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성인 코다 자원활동가였다. 그중 비키(Vicki)가 우리를 무척 반가워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홍콩에서 영국으로 이민을 온 농인이라고 했다. 홍콩 말(광둥어)은 잘 할 줄 모르지만 어느 정도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고, 이렇게 아시안 코다를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갑다며 우리를 꼭 안아 주었다. 3박 4일 동안 열리는 코다 캠프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참가할 수 있는지 궁금했던 우리는 비키에게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5년 전쯤에 내가 코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되었어. '너 코다야? 나도 코다야!' 이렇게.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열렸던 코다 컨퍼런스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어.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코다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는데 매우 황홀했어. 코다 캠프에 참가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정말 너무 행복해. 물론 나도 프리랜서로 수어통역 일을 하고 있어서 시간을 이렇게 내기가 어려웠지만 다들 이렇게 많은 코다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어렵게 시간을 내지. 그래서 이렇게 한국에서 온 너희들도 만나게 됐잖아?"

비키는 말하는 내내 영국 영어와 영국 수어(British Sign Language)를 섞어서 사용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자연스럽게 음성언어와 수화언어를 섞어 대화했다.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가 사용하는 음성언어가 다르고 수화언어가 달랐지만, 나는 그녀의 표정과 손의 움직임으로 영국 수어의 의미를 유추했다. 두 가지 혹은 서너 가지의 언어를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우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코다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건 정말 '국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다.

우리가 코다 캠프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영국 청소년 코다들이 갖고 있는 자존감이었다. 한국에서는 코다로서의 자존감을 갖기가 매우 어렵고, 혹여 긍정적인 자존감을 어렵사리 갖는다 하더라도 시시때때로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그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물총 게임을 피해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청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코다라서 힘들었던 적이 있었나요?"

"음, 별로? 물론 어렸을 때부터 통역을 해야 하니까 힘들긴 하죠. 그런데 우리 엄마, 아빠가 농인이라고 하면 주변에서 '와, 그럼 너 수어할 줄 알아?'하는 반응을 보이며 부러워해요. 그리고 장점이라고 하면 사실 이건 나쁜 거긴 한데 밤에 부모님 몰래 놀러 나갈 수도 있고!"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거나 지나고 있을 법해 보이는 그들은 그리 특별한 건 없다며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다시 물어보았다. 그래도 부끄러운 적이 있거나 단점이 있지 않냐고. 그러자 둘은 왜 자꾸 그런 부정적인 질문을 하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왜냐면 코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코다로서의 자존감인데, 그것이 관련 지원 프로그램 및 체계에서 오는 것인지 전반적인 사회적 인식에서 오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앞으로 우리가 한국에서 어떤 일들을 차근차근 해나가야 하는지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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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CODA CAMP 참석자들. ©CODA KOREA


코다 프라이드

우리를 흥미롭게 쳐다보던 잭(Jack)이라는 친구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나중에 정신 건강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는 농학교에서 농인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우리는 잭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있죠, 당연히. 왜냐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함께 은행에도 가야하고, 병원에도 가야 하니까. 가서 나는 고작 6, 7살인데 부모의 말을 통역해야 하고.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긴 해서 힘들긴 해요. 그런데 그게 부끄럽다거나 싫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나는 다시 되물었다. 정말 그렇냐고.

"내가 코다라서 자랑스러운 건 뭐냐면 내가 의사나 뭐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통역을 하면 그들은 나를 바라보죠. 그럼 나는 굉장히 자랑스러워요. 내가 없으면 어차피 그 사람들은 서로 소통할 수 없잖아요, 심지어 그가 의사라도 말이에요! 그때 이렇게 나는 우쭐해질 수 있어요. 내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잭은 대답을 마친 후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캠프 3일차 저녁 일정은 디스코였다. 리듬이 빠른 음악이 크게 울려 퍼졌고, 모두가 정장을 차려 입거나 원하는 캐릭터로 분장을 하고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 사이, 드레스를 입은 청소녀들이 보였다. 춤을 추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러자 앞에 있는 친구가 손을 움직여 수어로 대답을 했고, 나머지 친구들도 그녀를 바라보며 수어로 대답을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디스코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수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장소에서 "뭐라고?" 하며 목청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어로 입술 대신 얼굴 표정과 손으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 그 행위가 부끄러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나의 또 다른 능력 중에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확실히 코다 캠프와 같은 지원 프로그램의 영향도 크겠지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전반적인 사회적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다 코리아 구성원 중 한 명은 캠프를 방문하는 내내 이렇게 말했다.

"너무 아름답고 놀라워요. 그런데 너무 슬퍼요. 코다가 이렇게 멋지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그냥 어쩌면 이게 달콤한 꿈 같은 것이 되어 버릴까봐 그래요."

우리는 코다로서의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는 영국의 코다들을 보며 우리의 지향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해야 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숨을 여러 번 쉬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긍정적인 모습들이, 나로 하여금 코다로서의 자존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했다. 그들은 그것을 이렇게 불렀다, CODA PRIDE(코다 프라이드).

*글쓴이 _ 이길보라. 이야기꾼. 농인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굳게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다. 열여덟 살에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며 겪은 이야기를 책 『길은 학교다』(2009)와 『로드스쿨러』(2009)로 펴냈다. 중편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2008)와 농부모의 반짝이는 세상을 딸이자 감독의 시선으로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를 찍었다. 동명의 이름으로 책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5)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