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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쩌면 잘 몰랐던 세종대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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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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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한글날에 살펴 보는 세종대왕님의 비사(秘史)(?)

비록 올해는 안타깝게도 일요일과 겹쳤지만, 한글날을 맞아, 오늘은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님에 관하여 한 번 살펴볼까 한다. 세종대왕님에 대하여 모르는 현대 한국인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필자는, (아무도 관심 없었겠지만) 역시 현대 한국인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세종대왕님과 함께 광화문을 지키고 계신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서도 꿋꿋하게(?) 포슷팅한 바 있기 때문에, 세종대왕님에 대하여도 어쩌면 그 분의 잘 알려지지 않은 면들을 중심으로 한 번 써나갈까 한다.

2. 세종대왕님이 셋째 아들임에도 형들이 왕위 계승에 시비를 못 걸었던 이유는?

세종대왕님께서는 조선왕조 제3대 임금 태종의 3남이다. 장자 상속이 원칙인 전(前)근대 동아시아 왕조들의 관습에 의하면, 세종대왕님께는 왕위 계승의 순서가 안 돌아와야 하는데, 세종대왕님의 부친 태종께서 장남 양녕대군과 차남 효령대군을 제치고, 삼남인 충녕대군(세종대왕의 즉위 전 호칭)에게 양위하셨다. 다들 아시다시피 태종의 장남 양녕이 좀 과하게 놀았던 것(뭐래니?) 같지만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사도세자 같은 결격사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도 충녕대군에게 양보하고, 나중에는 출가해 승려가 됐다고 하는 민간 전승까지 생겨났지만, 당초에는 형 양녕의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믿었던 걸 보면 처음부터 왕위에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 두 형들이 셋째 충녕대군에게 순순히 양보한 것은 다름 아닌 부친 태종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태종이 세종대왕님께 양위했다고 썼듯이 세종대왕님은 부왕이 자연사하여 왕위에 오르신 게 아니라 부친이 시퍼렇게 살아 계신 상황에서 부친의 결단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태종은 단순히 상왕이 된 것에 그치지 않고, 세종 즉위 후 상당기간 동안에는 병권까지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이 혹시라도 딴 맘을 먹었다가는 아빠 태종의 피의 보복(이미 조선건국 무렵 정몽주와 같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이나, 왕자의 난 때 양녕이나 효령의 삼촌들한테 유감없이 발휘된 일이 있었음ㄷㄷㄷ)을 각오해야 했었다. 그러니, 세종의 즉위에 대해 두 형인 양녕이나 효령, 기타 다른 야심가들 모두 그 뒤의 태종을 바라보며, 물개박수(응?)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

그래서, 세종대왕님의 화려한 문화적 업적에 감탄할 때는 한번쯤 그 뒤에서 손에 피를 묻혀 가며(쿨럭;) 그 토대를 닦은 태종 이방원을 떠올려 보는 것도 세종대왕님의 업적을 보다 전체적인 시각이랄까 그런 측면에서 보는데 도움이 될 듯도 싶다. 돌이켜 보면 우리 역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룬 군주들의 뒤에는 뭐랄까 이런 도약의 준비단계를 가능하게 한 선왕(들)의 도움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화려한 정복사업은 소수림왕이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만신창이가 되었을 나라를 추스르고 불교를 받아들이고 고국양왕이 국력을 충실히 한 다음에 가능했고, 신라 진흥왕의 전성기는 지증왕이 왕호를 사용하고 법흥왕이 불교 공인과 율령반포 등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한 후에야 가능했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알렉산더 대왕의 화려한 정복사업은 아버지 필립포스의 입김이 구석구석 서린 준비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며, 프랑스 루이 14세가 마음대로 국력을 탕진(응?)할 수 있었던 것은 앙리 4세가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내란을 수습하고 프랑스를 재건하고 루이 13세 때의 재상인 추기경 리셜리외가 추기경이면서도 30년 전쟁 때 냉정하게 신교도편을 들며 국력을 충실히 한 덕을 보았을 듯 싶다. 현대에 와서도 아들 부시 대통령이 중동에서 두 개의 큰 전쟁을 치르며 미국의 곳간을 텅텅 비게 만들어 세계 경제 위기의 한 원인을 제공하기 전에, 그의 부친인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냉전을 종식시키고, 전임자 빌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 문제를 한 때 해결하는 등 미국의 국력을 충실히 한 일이 있었다.

3. 세종대왕님의 방탕한(?) 사생활, 실패한 후계 구도, 그리고 레즈비언(!) 며느리

세종대왕님의 업적을 논하기 전에 우선 그 분의 아빠 태종 이방원의 영향력을 상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에 이어 또 주절거리고 싶은 얘기는 세종대왕님의 사생활이다. 세종대왕님은 화장실도 안 가시는 성군이 아니라 평균 이상의 화려한 방탕함을 만끽하신 조선의 임금이다. 세종대왕님께서 중전과 후궁들 사이에서 20여명의 자식을 보셨다고 하니 혹시 50대 초반에 돌아가신 것에는 이러한 낮에는 성군, 밤에는 카사노바 같은 생활을 하신 탓인가 싶기도 함(먼 산).

그러나, 자식을 20여명 두셨다고 해도 다들 아시다시피 당시의 유교적, 전통적 시각으로 세종대왕님께서 행복하셨다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세종대왕님의 차남 수양대군(세조)은 세종대왕님의 손자 단종과 삼남 안평대군, 육남 금성대군을 죽였으니 아빠 태종 이방원이 주도면밀하게 후계구도를 구상하고 그걸 그대로 실행해 낸 것에 비하면 세종대왕님은 그 부분에서는 실패했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세종대왕님의 큰며느리 즉 큰아들 문종의 부인인 세자빈이 궁녀와 당시의 기준으로 '사통(私通)'했다고 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성리학의 수호자여야 할 당시의 조선 국왕 세종대왕님을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하였을 사건이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행한 세자빈과 그녀의 연인 궁녀의 비극이야 말할 것도 없고.

4.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도 세종대왕님은 왜 때문에 3년이나 반포를 미뤘을까?

이제 세종대왕님의 한글 즉 훈민정음 창제 쪽으로 얘기를 돌려보자. 문자를 전 근대 국가 군주의 결단으로 만들어 냈고(이는 중국 주변 민족들에게는 아주 생경한 일은 아니었다. 서하와 만주 문자의 예도 있었다), 그 문자가 후대에도 널리 쓰일 정도로 나름 성공했다는 점에서 세종대왕님의 훈민정음 창제는 탁월한 업적이다.

이 훈민정음 창제란 프로젝트를 이끌어간 세종대왕님이란 프로젝트 리더와 집현전 학사들이라는 팀원들의 관계를 집현전 학사들 입장에서 보면 세종대왕님은 뭐랄까 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 타입. 즉 팀장이 아랫 사람들을 엄청 쪼지만, 본인이 워낙 잘나셨고 더 열심히 일하시니까, 팀원인 부하들로서는 몸은 힘들어 죽겠지만 성과도 잘 나오고 대우도 좋은 편이라서 투덜대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팀이 훈민정음 창제 프로젝트팀이라고나 할까.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압도된 것은 이 세종이란 사내가 1443년에 훈민정음을 완성해 놓고선 바로 일반 백성에게 반포하지 않고 3년(!) 동안 기다리며 말하자면 테스트를 해보고 쓸 만하다는 자신이 생긴 다음인 1446년에야 반포한 점이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 것이면 전 근대 국가의 군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자랑하고 싶었을 것 같은데(아니 동서고금의 누구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이건 뭐 다 만들어 놓고도 놀라운 참을성으로 기다리며 3년이나 이것저것 확인하며 실제로 결행해도 문제없겠다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생길 때까지 세종대왕님은 기다린 것이다.

뭐랄까 당시 조선의 땅 한자락에 대한 처분권, 백성 한 명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당신 세종대왕님께서 모두 쥐고 있다는 도저한 절대군주로서의 자신감이 없으면 감행할 수 없는 일종의 사치이면서도 또한 그러한 절대권력자가 빠지기 쉬운 자만과 조급함의 유혹을 대단한 자제력으로 극복한 게 이 '훈민정음 창제 3년 후 반포'라는 기막힌 기다림이 아닐까 싶다.

5. 용비어천가를 위한 변명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세종대왕님은 그 3년 동안에 당신 조상들의 업적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짓게 해 이 훈민정음이라는 새 문자를 테스트한다. 이 용비어천가와 관련하여, 다른 건 모르겠고, 용비어천가를 권력자에 아부하는, 무문곡필(舞文曲筆)의 지식인의 말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로 쓰는 클리셰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못마땅하다. 우선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님 자신 즉 권력자가 직접 짓게 한 것이지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 아첨하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어 바친 게 아니다. 그리고 암만 이렇게 문자 그대로 어용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해도 현대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일상에서 한국어를 표현하기 위해 쓰고 있는 문자인 한글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훈민정음으로 최초로 만든 작품인 셈인데 그 용비어천가를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지식인의 막걸리(응?)를 비꼬는 말로나 쓰는 안이함이야말로 척결해야 되지 않을까 싶음.

또, 조선을 건국한 세종대왕님의 집안 이야기는 그 자체가 정말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고려 후기 전라도 전주에 살던 이안사라는 이가 탐관오리를 피해 동북면(지금의 함경도)으로까지 이주했다가 몽골의 침략 후에는 적 치하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와 그의 후손들은 거기서 나름 고위직까지 성공했다가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겠다고 고려의 공민왕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자 세종대왕님의 증조부인 이자춘 대에 이르러 동북면에서 내응하여 고려에 협력한 애국자 집안임. 이렇게 해 다시 조국의 품으로 들어온 이 전주 이씨 집안은 바로 다음 대인 세종대왕님의 조부인 태조 이성계대에는 전장터에서 눈부신 전공을 거듭 세우더니만 무려 역성혁명까지 성취해 낸다. 뭐 전 근대 특유의 과장, 그리고 이 용비어천가를 쓰게 했던 이가 바로 이성계의 손자인 세종대왕님이란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겠지만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관해 다른 사료나 기록이 사라진 것도 아닌 마당에 무려 한글을 테스트해보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용비어천가를 쓰레기 같은, 권력자에 대한 아첨의 말과 글을 지칭하는 말로 안이하게 쓰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할 따름이다.

그리고, 세종대왕님의 조상 미화작으로나 폄하된 용비어천가를 짓게 한 그 발주자 세종대왕님을 위해 한 가지 더 변명을 덧붙이자면 세종대왕님 당신께서는 조상 미화에 대해 흥미가 없는 분이셨다고 할 만한 반증이 있음. 전 근대 동아시아 왕조의 관습대로 조선도 그 직전 왕조인 고려에 대한 공식 역사서인 [고려사]를 편찬했는데, 세종대왕님께서는 이 [고려사] 편찬과정에서 당신의 신하들이 지나치게 고려를 폄하하고 조선을 추켜 세우자 말하자면 그 원고를 몇 번이나 퇴짜를 놓고 다시 고쳐서 써오게 했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겠으나, 세종대왕님이란 분은 단순한 아첨에 만족하는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었던 것. 그렇게 나온 [고려사]도 조선왕조의 시각에서 쓰여진 사서란 한계가 없지 않겠으나(사실 그런 한계가 없는, 전 근대 사서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이겠는가!?) 하여간 이 세종이라는 사내는 훈민정음이든 [고려사]든 당신께서 설정해 놓은 완벽함이란 기준에 못 미치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다시 하라고 할만한 집요하고 철저한 사내였던 것임.

6. 그 상사에 그 부하들 - 집현전 학사들 이야기

이제 그런 후덜덜한 상사를 윗사람으로 모셨던 신하들,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역할을 한 집현전 학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보자. 우선 그들의 삶이 얼마나 이런 세종대왕님 밑에서 피곤에 쩌든 것이었는지에 대해 '미담'이라 알려진 일화 하나부터. 늦게까지 야근하던 집현전 학사 한 명이 피곤해서 그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세종대왕님께서 그를 용포로 덮어주었고 나중에 잠에서 깬 그 집현전 학사가 감격해서 더욱 충성을 바쳤다는 알홈다운 이야기인데...

우선 정시에 퇴근도 하지 못하고 야근까지 하는 것이야 반도의 종특인가 싶어ㅜㅗㅜ 그렇다고 쳐도 그 집현전 학사가 완전 개피곤해서 나가 떨어졌다는 것도 애처롭고, 세종대왕님이 일만 시키신 것이 아니라 그 늦은 시간에 직접 집현전을 순시하시며ㄷㄷㄷ 이넘들이 시켜 놓은 일 잘 하고 있는지 점검하셨다는 게 좀 소오오오름 끼쳤음.

원래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전국시대 오기(吳起, [오자병법(吳子兵法)]의 저자로 알려진 이)가 병사의 고름을 직접 빨아 주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 병사의 엄마가 대성통곡하였다는 일화처럼(이 녀석 애비도 오기 장군이 고름을 빨아주더니만 오기 장군을 위해 전장터에서 목숨을 바쳤고 이제 오기 장군이 내 남편 목숨에 이어 아들 녀석 목숨도 앗아 가겠구나!) 자고로 권력자의 과도한 애정 표현(응?)은 피치자에게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법이란 의심증이 넓게 퍼져 있는 터라 이렇게 세종대왕님께서 집현전 학사들에게 베푸신 과도한 애정이 나중에 세종대왕님의 손자인 단종을 지키기 위한 사육신의 피바람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도 드는지라 좀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 무렵에 집현전 학사들을 세종대왕님께서 쪼으신 건 상상을 초월하는데 예컨대 집현전 학사 성삼문(사육신의 한 사람)은, 명나라 요동에 귀양와 있던 유명한 중국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확인해 오라는 세종대왕님의 명을 받아 출장을 무려 13차례(!)나 다녀와야 했다. 요동 땅이 한양에서 가까운 것도 아닌데, 한양에서 몇 천리 길을 오가라 하면서 당신이 궁금한 것은 부하를 보내 대가에게 몇 번이고 물어 보아야 직성이 풀렸던 것이 이 세종대왕님이란 분이 일하는 방식이었으니 성삼문은 이해하면서도 출장짐을 쌀 때마다 이를 갈았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집현전 학사들도 보통인 분들이 아닌 것이 세종대왕님 정도 되는 군주의 명에는 따랐지만 암만 능력이 뛰어나도 당신들의 기준으로 불의하게 집권한 수양대군/세조는 왕으로도 인정하지 않았음.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이 세조 시절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장계를 올릴 때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신하 신(臣) 자가 들어갈 자리에 비슷한 클 거(巨) 자만 써두고 봉급인 셈인 녹봉으로 받은 쌀을 하나도 안 먹고 차곡차곡 쌓아두었다며 단종 복위 음모가 밝혀져 수양대군한테 국문을 당하면서 털어 놓는 장면은 정말 후덜덜했음. 뭐랄까 이들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같은 사육신에 가담한 집현전 학사들의 이상은 세종대왕님 정도의 능력자와 그 정도의 비전을 집행해 낼 자신들 같은 신하들의 협치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7. 무서운 그림, 몽유도원도 이야기

이쯤에서 이 세종대왕님 대의 찬란한 문화적 성취를 집약하고 이를 그 주역인 집현전 학사 등이 직접 기록으로 남긴 몽유도원도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름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다들 아시다시피 몽유도원도는 세종대왕님의 3남인 안평대군이 꾼 꿈을 화가 안견이 그린 그림. 몽유도원도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다음 해인 1447년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 그림에 안평대군을 비롯해 당대 일급의 문사들인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이 직접 글을 썼고. 어찌 보면 참 기막힌 사연을 가진 그림이다.

불과 3년 후에는 세종대왕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보다 3년 후인 1453년에는 계유정난이 터져 그림을 의뢰했던 안평대군은 형 수양대군 손에 죽었고,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이 몽유도원도에 찬탄하는 글을 남긴 이들 중에 박팽년과 성삼문은 사육신으로 죽고 신숙주와 정인지는 수양대군/세조 편에 서서 살아남아 부귀영화를 누린다.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지 불과 10년도 안 돼 그 그림이 좋다며 글을 남겼던 사람들의 엇갈린 운명이 이러하였다. 몽유도원도 자체도 아마도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약탈되어 현재 일본 천리대에 소장 중이니 몽유도원도 그림 자체의 운명도 뭐랄까 그 그림에 글을 남겼던 이들의 운명처럼 기구하다고나 할까.

8. 한반도의 '자연국경선'을 확정한 정복 군주 세종대왕님

이 글도 슬슬 마무리할 시점인데 집현전, 훈민정음 그리고 책 읽기 좋아하던, 이방원의 셋째 아들 뭐 이런 얘기만 주제상 주로 하다보니 세종대왕님의 문치 쪽만 부각된 것 같아서 마무리는 4군 6진 얘기로 해야 할까 한다. 세종대왕님은 학문을 좋아하신, 문화 융성기를 가져오신 군주이시기도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평안도 북쪽의 4군과 함경도 북쪽의 6진을 개척하셔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대 한국인들이 한반도의 경계로 여기는 일종의 자연국경선(웃음)을 확정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국토를 확장하신, 나름 정복군주가 그저 호학한 문치의 군주로만 주로 기억되는 것은(물론 훈민정음 창제 등 문화적 업적이 워낙 대단하신 덕분이지만) 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으시다. 물론 실제 4군과 6진을 개척한 것은 최윤덕과 김종서이지만 그걸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결행한 것은 오롯이 세종대왕님의 업적이 아닌가 싶다. 좀 과장해 거창하게 말하자면 군사지도자를 잘 부리는 민간인 통치자의 역할을 세종대왕님께서는 탁월하게 해내신 셈인데 그걸 제대로 못한 왕과 국무총리(장면이라든지), 대통령(최규하라든지)이 넘치는 이 나라에서 세종대왕님의 업적은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니다. 그리고 툭하면 국토를 외적에게 침탈 당해 잘라주어야 했던 이 나라에서 두 방면으로 국토를 확장하신 세종대왕님의 업적은 손꼽힐 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9. 맺음말 - 한글날도 대체휴일제도가 적용되는 공휴일로 지정하라!

현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세종대왕님과 관련한 글은 이렇게 세종대왕님은 만원권 지폐의 도안인물 겸 광화문 거리의 동상으로 충분히 모셔질 만하다는 뻔한 결론으로 마무리하면서, 특히 세종대왕님의 훈민정음(한글) 창제 업적을 더욱 기리기 위해 한글날이 꼭 대체휴일로 지정되기를 염원하며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