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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외교에 성공했던 우리나라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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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 속에 되짚어 보는 균형외교 성공 사례

종말단계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THAAD, 사드)의 배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특히나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소위 전승절 기념식 때 천안문 광장까지 올라가는 등 중국에 경사(傾斜)된 외교 행보를 보였음에도 이번에는 미국과 함께 장기적으로 중국을 겨냥할 수도 있는 방어 무기 체계를 들여 온 것이 아닌가 싶어서인지 중국의 반발이 매우 격렬하다. 원래 한반도 주변을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계 1, 2, 3, 4위를 다투는 초강대국들이 둘러싸고 있어서인지 우리 역사는 고달팠는데,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우리 정부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G2 사이에서 양측을 적당히 만족시키며 우리의 실리를 취하는 균형외교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다들 큰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글에서는 초강대국들 사이에서 얻어터지며 지낸 것만 같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드물게 균형외교에 성공했던 어느 국가원수(응?)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봄으로써,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으로 무거워진 독자제현의 마음을 조금 달래어 드려 보려는 시도를 해볼까 한다.

2.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외교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개 우리 역사에서 강대국들 사이에 중립외교를 하였던 사례로 나 같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것은 조선왕조 때의 임금 광해군의 경우이다. 광해군은 중국 대륙의 지는 해이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 멸망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와, 만주 지역의 신흥 강국 후금(뒷날의 청나라)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하였는데, 특히나 광해군을 쫓아내고 국왕이 된 인조가 명나라 일변도의 외교 정책을 구사하다가 두 차례나 호란을 겪고 삼전도에서 청나라의 태종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 때문에 광해군대의 외교 정책이 더욱 부각된 면이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광해군의 경우에는 조금 찜찜한 것이, 광해군은 일단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여 폐위된 임금이라는 점이고, 그렇기에 그의 중립 외교 정책이 끝까지 관철되어 당시 조선이 중국 대륙의 왕조 교체기라는 혼란기에 국익을 지키고 백성들의 삶을 평안히 하면서 위기를 넘긴 것이 아니라 후임자에 의해 그의 정책이 완전히 부정되어(이건 그의 책임이 아니라 다음 왕인 인조의 책임이겠지만) 조선이라는 국가와 당시 백성들이 크나큰 고통을 겪었는바, 즉 옳은 정책이었겠지만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기에 좀 빛이 바래는 느낌적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우리 역사가 5천년이나 된다고 하고, 박근혜 대통령님께서 이제 "올바른 국정 교과서"까지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데(쿨럭;) 거대 중화 제국과 사나운 일본과 같은 해양 세력에 근대 이후에는 러시아와 미국까지 끼어들게 된 지정학적 조건에 처해 있는데 중립외교, 균형외교 잘한 사례로 널리 알릴 사례가 광해군밖에 없을까 하는 게 필자의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필자는 이성제님이 쓴 [고구려의 서방정책 연구]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뜻밖에도 고구려의 장수왕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진정 균형외교에 성공했던 국가원수였음을 발견하게 되어 여기에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3. 대표적 금수저(뭐래니?)로만 알려졌던 장수왕이 실은 외교의 달인?

다들 아시다시피 고구려 장수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아들이다. 장수왕의 아빠 광개토대왕은 왕으로 있으면서 만주 벌판을 다 휩쓸고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여 땅을 엄청나게 넓게 개척한 왕이라는 뜻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는 시호를 얻었고, 지금도 한국인들이 가장 뿌듯해 하는 선조인 것에 반하여, 장수왕은 뭐랄까 그런 아빠한테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물려 받은 요샛말로 하면 대표적 금수저(웃음)에 시호도 걍 오래오래 살면서 재위했다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어 딴 것 같고, 강대한 중국에 맞선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한강 유역을 같은 뿌리인 백제로부터 빼앗고, 당시 백제의 개로왕을 죽였다는 것으로 주로 알려졌을 뿐이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왕은 그의 재위 당시 중국이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를 지나 남북조시대로 접어 들면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북쪽에 북위라는 강력한 제국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그 북위와 공존하며, 북위와 맞선 남쪽의 한족 왕조 송과도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등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나는 현란한 외교술을 펼친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수왕의 외교술을 조금 자세히 살펴 보며 사드 배치로 우리가 약소국임을 절감하며 느꼈던 비애를 조금 달래볼까 한다.

4. 우방 수도에 구원병 보내 돕는 척하다 껍데기만 남긴채 벗겨 먹는 신공 시전한 장수왕

지금의 북경 인근으로, 멀리는 고조선을 침공한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장군 진개 이래로 우리와 악연이었던 연나라 땅에 들어선, 5호 16국 시대의 선비족 왕조인 전연(前燕)과 후연(後燕)은 고구려의 숙적이었다. 전연 시절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연의 침략군에 패해서 고국원왕은 아빠 미천왕의 유해를 빼앗기고 엄마까지 인질로 잡혀가는 굴욕을 당했지만, 장수왕의 아빠인 광개토대왕 대에는 전연의 후신인 후연을 격파하여 후연의 숙군성을 빼앗아서, 고구려가 후연과 대등하거나 우위에 올라섰다고 볼 만했으며, 그 후에는 북연(北燕)으로 나라 이름이 바뀌며, 고구려계 고운이 왕이 되어 이미 광개토대왕 생전에 고구려와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그러나, 북위가 화북지방에서의 5호16국의 대혼란(그러니까 오랑캐 다섯 족속들이 모두 16개의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니 얼마나 큰 혼란기인지 짐작이 갈만하다)을 수습하고 중국 북부의 거대한 화북 평원을 통합해 가며, 북연마저 노리게 되자, 고운 사후에 북연의 왕이 된 풍홍은 장수왕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 때 장수왕의 원병 파견 및 그 이후에 벌어진 사건의 전개는 고려 서희의 거란과의 강동 6주담판이나 광해군의 강홍립에 대한 밀지,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쿨럭;)과 함께 길이 기록돼야 할 업적인 것 같지만(응?) 다른 사례들에 비해 너무 안 알려진듯 싶어 조금 길게 소개해 본다.

당시 북위는 중국의 거대한 화북 평원을 거의 통합한 떠오르는 초강대국, 앞에서 보았듯이 북연은 전연과 후연 시절 고구려 숙적이었으나 광개토대왕 재위 말기부터 관계가 개선된 나라로 이제 북위의 압력 아래에서 풍전등화인 국제정세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자칫 잘못하면 신흥강국 북위와 척을 지게 되거나 우호적인 관계의 북연의 구원 요청을 야박하게 무시한 꼴이 되는 상황이었다. 조선시대 광해군과 인조가 맞닥뜨렸던 것과 유사한 상황으로 조선에서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두 차례의 호란이라는 파국을 맞았던 상황이기도 하며, 어찌보면 지금 미국과 중국 사이에 엉거주춤한 우리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북위군이 북연의 마지막 저항이 계속되던 북연의 수도 용성을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2만명의 고구려 원병이 도착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누구나 이제 고구려군이 북연군과 합세해서 북위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을까? 북위군도 당연히 고구려군과의 결전을 예상하고 긴장했을 것이고. 그러나, 장수왕이 보낸(그리고 장수왕이 보내기 전에 아마 세세하게 지시를 했겠지) 고구려군은 북연왕 풍홍과 북연의 왕족 귀족 등 주요 인사 및 북연의 수도 용성 내에 있던 금은보화 및 각종 물자만 빼내고서는 유유히 용성을 빠져 나간다.

특히 북연왕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고구려 군의 호위 속에 달아나는 것을 눈앞에서 볼 때는 북연 수도 용성을 공격 중이던 북위군은 발을 동동굴렀겠으나 고구려군이 북위군에 적대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고구려군이 이렇게 용성을 껍데기만 남긴 채 탈탈 털어 먹는 것을 만약 북위군이 건드리기만 하면 당장 한판 붙자고 할 기세였기에 북위군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이 북연 수도 용성을 탈탈 털어 먹고 떠난 후 북위는 용성을 '점령'했으나 약탈할 거리도 없었던 이른바 전형적인 상처뿐인 영광인 셈이었다고나 할까ㅎㅎ

5. 장수왕, 화북의 선비족 제국인 북위와 강남의 한족 왕조 송 사이에 균형외교를 펼치다.

이렇게 고구려 장수왕은 북연왕 풍홍과 북연의 주요 인사들 및 북연 수도의 엄청난 물자들을 전부 끌어 왔다. 고구려 장수왕은 처음에는 북연왕 풍홍을 나름 잘 대해줬으나 그가 일종의 망명정부 수반 노릇을 하며 북위의 적 송과 연계하여, 북위에 대항하려고 하자 장수왕은 이번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에게 몸을 의탁했던 풍홍을 죽여; 북위와 관계를 개선한다.

그렇다고,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한테 계속 끌려다니며 굴복했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다. 장수왕은 중국 남부에 웅거하고 있는 강남의 한족 왕조 송과도 잘 지내면서, 송의 요청대로 군마 몇백 필을 배에 실어 송에 보내주는 등 비위를 맞추어 주어서 이제 남북조 시대를 맞은 중국에서 고구려와 국경을 직접 맞대게 된 북위를 견제하였다.

송에 대해서도 장수왕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만 대한 것이 아니고, 앞서 본 풍홍의 사건을 문제 삼아 장수왕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무려 송이 해군을 동원해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까지 쳐들어 오자 장수왕은 이들 수천명의 송군을 격파하여, 자신이 송에게 외교적으로는 굽히며 신하라고 칭하지만 감히 고구려의 독자적 정책에 간섭하여, 남북조 간의 대립에 고구려를 끌어 들이려는 시도는 단호히 배척한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기도 하였다.

6. 백제 개로왕의 고자질과 이에 대한 장수왕의 집념 어린 복수

고구려 장수왕의 이러한 단호한 자세에 어느 정도 경외감마저 느껴서인지 백제 개로왕이 북위 사신을 고구려가 몰래 죽였다는 주장 및 그에 대한 나름의 증거와 함께, 그러한 고구려를 벌주라며 고구려를 칠 군대를 요청하는 걸병서를 북위에 보냈을 때 북위에서는 (후대의 중국 왕조들의 한반도에 대한 태도라든지 지금 사드 배치에 대해 격렬히 반발하는 중국의 태도와는 완전히 대조적이게도;;) 조사해 보니 고구려 잘못인지 안 알랴줌-_-;이란 결론(응?)을 내렸으니 북위도 고구려를 엄청 신경 썼음을 알 수 있겠다.

고구려 장수왕은 이렇게 북위에 대해서는 신중히 대응하며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북위한테까지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을 한 백제 개로왕은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간첩 도림을 백제로 보내 개로왕을 속여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제를 피폐하게 만든 다음에 침공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고 개로왕의 목을 치니,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걸병서에서 자랑스럽게 언급했었던 백제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왕이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인 것에 대한 장수왕의 달콤한 복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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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장수왕릉(長壽王陵)으로 알려진 장군총(將軍塚).

7. 맺음말 - 장수왕의 균형외교 성공의 비결과 오늘에의 시사점

장수왕이 이렇게 북연과 북위, 북위와 송이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외교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장수왕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무척 안타깝게도 장수왕은 금수저였기에(응?) 아빠 광개토대왕이 물려준 엄청난 영토와 그로부터 나오는 풍부한 물자들을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 우선 가장 큰 비결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로는 당시 중국이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인지라 처음에는 화북지방도 갈갈이 찢겨져 있었고, 남북조시대에 돌입하고도 어쨌거나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수왕이 상대적인 자율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다들 아시다시피 후대에 중국 대륙에 수와 당이라는 통일 제국이 들어서자 장수왕의 후손인 고구려 왕들은 이들에게 맞서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다.

그렇다고 하여도 장수왕의 업적을 굳이 수명뿐만 아니라 물려 받은 것에다가 기막히게 좋은 주변 국제 정세덕을 본 금수저라고만 폄하할 수 있을까? 그렇게 치면 선대에서 일군 것들을 다 말어먹은 재벌 2세나, 아빠와는 달리 경제 부문의 실적마저 별 볼 일 없는 모국의 대통령 같은 사람들의 실패 내지 예정된 실패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나 국익을 위해서는 자신을 믿고 의탁한 이웃나라 왕도 피도 눈물도 없이 철저히 이용해 먹는가 하면, 강대국들에게 우리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만만치 않은 보복이 가해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려 가면서 난세를 헤쳐나갔으며, 갚아야 할 선대의 원한은 꼼꼼하게 기억해 두었다가 정확하게 타격하여 복수하였던 장수왕과 같은 영악한 모습의 지도자를 갈수록 험난해지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우리 시대에 기대하는 것은 영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기만 할까 싶어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