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베르크 Headshot

분열의 시대에 링컨을 다시 생각한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영국이 국민투표로 유럽연합을 탈퇴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미국에서는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도널드 트럼프가 양대 정당의 하나인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되었다. 통일이 대박이라던 박근혜 대통령의 언명이 무색하게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 이후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제재 국면 속에서 남북관계도 최악으로 경색되었으니 바야흐로 전세계적으로 분열과 고립, 불안의 시대라고 하여도 될 정도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최악의 분열과 대립이라 할만한 미국의 남북전쟁(1861년-1865년) 중에도 통합과 화해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하여, 이를 끝내 달성했던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떠올라서 혹시라도 그의 행장에서 오늘, 여기를 사는 우리가 뭔가 취할 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글에서는 링컨 대통령에 대하여 한 번 다루어 볼까 한다. 마침 오늘(7월 4일)은 그가 분열을 막고자 전쟁까지 불사했던 미합중국이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1776년 7월 4일)이기도 하며, 남북전쟁에서 링컨의 북군(연방군대)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게티즈버그 전투(1863년 7월 1일 ~ 3일)가 벌어졌던 무렵이기도 하다. 링컨은 이 전장터에서 1863년 11월 19일에 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통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유명한 구절을 말하기도 하였다.

lincoln washington

링컨 대통령은 워낙 유명한 세계적 위인이신지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고, 한국어로는 무려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이 링컨 대통령의 전기를 쓰신 일도 있을 정도이니, 익명 계정의 일개 트잉여인 내가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있을지 극히 주저되지 않을 수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합중국 제16대 대통령의 생애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링컨 대통령은 미국 켄터키주 농가(통나무집)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책벌레로서 변호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로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링컨의 전기를 쓰시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당신과 닮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이런 정치인이 되기 전까지의 성장 배경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은 느낌적 느낌이다.

그러나, 정치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기 보다는, 당시 흑인 노예제와 연방제의 유지 문제로 첨예하게 갈려 있던 미국 정계에서 중도적이며 합리적인 입장을 취했던 정치인이기도 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예로 삼아 부리는 야만적이며 부도덕하고 참혹한 상황이었지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미국 독립선언문의 저자이자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조차도 흑인 노예들을 거느렸던 농장주였다는 모순적 상황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처음에 고른 길은 꽤 중도적이고 온건한 방향이었다. 링컨은 처음에는 흑인 노예제를 폐지하여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노예를 해방시켜야 하는 노예들의 주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방안을 지지했었다고 한다. 독학으로 변호사에 이어 연방 하원의원까지 되었으며 흑인 노예들이 거의 필요없는 미국 북부 일리노이주 출신 정치인의 입장 치고는 놀랍게도 온건한 입장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적 느낌이다.

링컨의 도덕 관념으로는, 아니 이제 근대인 누구의 도덕 관념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노예제도였으나 에이브러햄 링컨은 초기에는 노예들이 일부 미국인들에게는 재산ㅜㅗㅜ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이들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대신에 노예주들에게 돈으로 보상해주겠다는 입장을 고른 것이었다. 즉각 노예 해방을 원하는 급진 노예제 폐지론자들이나 천년만년 노예제 유지를 원했던 기득권자인 노예주들 모두에게 링컨의 이러한 입장은 탐탁지 않은 입장이었을 듯. 모르긴 몰라도 양측 모두에게 상대방 세작(응?)으로 몰리지 않았을까? 참고로 당시 링컨은 일리노이주 지방의회에서 경험을 쌓기는 하였으나 연방하원에서는 초선 의원에 불과한 정치신인급이었다.

노예제 폐지란 것이 지금은 너무나도 명백한 당위처럼 보이지만 사실 남북전쟁 전 미국의 정치상황은 노예주들에게 상당히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당시의 노예제 폐지론자(Abolitionist)들을 상당히 낙담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노예들을 목화농장에 다수 부리던 미국 남부의 백인 농장주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컸고, 그들은 서부 개척으로 새롭게 미국 연방에 편입되는 지역들에 계속하여 노예주를 확산시켜 가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미국의 주요 정당들 중에서도 민주당은 노예 농장주들을 확고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며, 또 하나의 주요 정당인 휘그당은 노예제에 대해 찬반이 흐릿한 뜨뜻미지근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기성 정당들 중에 이렇게 흑인노예제 폐지에 대해 분명한 지지의사를 밝힌 정당이 없자 이에 불만을 품은 당시의 무당파(無黨派)들은 노예제 폐지론을 당론으로 삼은 신당의 결성에 나서니 이렇게 하여 미국 공화당이 탄생한다.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 연방하원 의원 임기를 마치고 재출마하지 않겠다는 지역구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다시 변호사로 돌아 갔으나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결집한 신당 공화당이 탄생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공화당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노예제 폐지를 내걸고 링컨을 중심으로 창당된 미국 공화당의 올해 대통령 후보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여성을 혐오하는 막말 발언을 서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라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링컨을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인물로 떠오르게 한 사건은 노예제 유지론자들과 타협하였던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 스티븐 더글라스와 맞붙은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전(1858년)이었다. 이 선거에서 링컨은 패했지만, 선거전이 벌어지는 기간 동안 더글라스와 링컨 간에 여러 차례 벌어진 토론은 많은 청중들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큰 화제가 되었다. 두 사람 간의 토론에는 선거전이 벌어진 일리노이주뿐만 아니라 다른 주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당대 미국을 뜨겁게 달구던 흑인 노예제의 존폐와 미국 연방제의 앞날을 이 더글라스-링컨 토론에서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일리노이주 연방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링컨은 민주당의 중진 더글라스에게 패했으나, 미국 국민들이 이겼다고 손을 들어 준 이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우리나라 어느 국회의원의 말처럼 정치인들끼리 링에서 싸웠을 때의 진정한 승자는 상대를 때려 눕힌 정치인이 아니라 쓰러졌더라도 그 정치인을 국민들이 일으켜 세워줬다면 넘어진 정치인인 것이고 더글라스에게 패했던 링컨이야말로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연방 하원의원 초선 경력에 민주당 거물 정치인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패했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은 일약 미국에서 대선주자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1860년 대선에서 링컨은 출마했고 다수의 후보가 출마해서 표가 분산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노예제 폐지를 열망하는 북부 주들이 모두 그를 지지한 것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노예를 부리는 거대 농장주들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남부에선 링컨은 단 한주에서도 승리하지 못했고 이들은 낡은 체제를 지키기 위해 민주당을 중심으로 뭉쳐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자 미국 연방에서 떨어져 나와(그들은 노예제도라는 그들의 특권을 허물어 버리고자 하는 링컨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해서 차라리 미국을 부수어 버리는 길을 고른 셈이다)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섬터 요새에서 먼저 미 연방군을 공격해서 남북전쟁의 막이 올랐다.

남북전쟁 초기에는 노예 소유 농장주들인 남부 토호(웃음)들의 남부연합이 유리해 보였으나, 링컨이 단호하게 노예폐지론의 입장을 계속 견지하며 북부의 공업생산력과 해군으로 남부 항구들을 봉쇄하며 영불의 남부 승인 움직임을 막자 전세는 점차 호각지세로 바뀌어 갔고, 결정적으로 1863년 7월 1일부터 링컨의 미국 연방군과 남부연합의 반란군들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전쟁의 향방을 놓고 격돌한다. 사흘 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 북군은 남군을 격파했으며 이제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승기를 잡게 된다.

이 결정적인 게티스버그 전투에서의 승리 4개월 후 링컨 대통령은 그 전투에서 희생된 미 연방군 장병들을 기리는 국립묘지 개관식에서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연설에서 링컨 대통령은 게티스버그 연설(1863년)로부터 87년 전(1776년)에 독립선언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과연 모든 인간은 평등하냐는 이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지를 물으며 이 남북전쟁이 바로 그 이상을 계속 이어가자는 편과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자들과의 싸움이며 연설이 행해진 게티스버그 전투의 연방군 전몰자들은 바로 그 이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라며 기렸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은 살아남은 이들은 전몰자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그 이상을 지켜나가야 하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결코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밝히며 연설을 마쳤다. 이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다들 아시다시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을 또렷하게 천명한 것 때문에 유명해졌고, 링컨 대통령은 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의 다짐처럼 게티스버그 전투 전몰자들의 유지를 받들어서, 낡은 노예제를 계속 부여 잡았던 민주당 노예 농장주들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국가통합을 다시 달성하니 링컨 대통령은 가히 미국 중흥의 기수라 할만하다.

링컨 대통령의 열망대로 그 후 남북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으며, 전쟁 종식 전해인 1864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 대통령은 무난히 재선되었다. 그렇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링컨 대통령은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통합과 화해가 열매를 맺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1865년 4월 15일 워싱턴 DC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중에 남부연합 추종자인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하여 암살되어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어찌보면 국론분열과 내전으로 갈기갈기 찢어졌던 미국이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셨던 맞춤형 인재였다는 느낌적 느낌마저 들 정도라고나 할까.

분열과 증오, 고립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시대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처럼, 누구보다도 어렵고 힘든 출신 배경에서 자라났지만, 상대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 애썼으며, 국민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며, 오직 국민만을 바라보고 나아갔던 정치 지도자들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이 시대를 돌파할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