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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머리를 이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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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fan Wermuth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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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수상 처칠과 페니실린으로 유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의 우정은 전설이 됐다. 어린 시절 익사할 뻔한 처칠을 구한 플레밍과 부모를 통해 그의 의대 진학을 도운 처칠. 훗날 폐렴으로 죽을 처지였던 처칠은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으로 회생했다.

이 가슴 훈훈해지는 이야기가 실은 사실이 아니라면? 처칠 부모가 플레밍의 의대 진학을 도왔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빼놓고도, 이 점은 약간만 머리를 쓰면 분명해진다. 처칠은 플레밍보다 7살 연상이었다. 처칠이 폐렴을 앓았던 20세 때 플레밍은 13살에 불과했다. 플레밍이 푸른곰팡이를 발견한 것은 40대 후반 무렵이었다. 두 사람에 관한 전설은 1950년 미국의 한 어린이 선교기관이 발행한 책 <친절의 힘>에 처음 등장한 거짓이었다.

하지만 사실 관계야 아무렴 어떠랴. 사람들은 두 위인의 인연에 열광했다. 누구나 말과 글로 이 일을 옮겼다. 설령 누군가 이 일화의 현실성에 의문을 품었더라도 대중의 광분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선교라는 목적에 부합하니 굳이 진실을 까발릴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으로 받아들인 탓에 머리로는 부인할 수밖에 없는 허구가 진실로 둔갑했다.

처칠과 플레밍의 나라 영국에서 최근 벌어진 일도, 결국 가슴과 머리의 싸움이었다.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면 경제적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쯤은 영국민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남아 있기에는 세계 대전 패전국 독일이 주도하는 EU가 여러 모로 못마땅했다. 2010년 봄부터 시작된 유럽 재정위기와 2014년께 극적으로 부각된 난민 대량 유입 사태에서 그들은 회색 양복을 입은 브뤼셀 관료들의 무능을 목격했다. 여기에 유럽 대륙과는 늘 어느 정도 거리를 둬 왔던 전통과 과거 EU 없이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의 위상에 대한 문화적 노스탤지어가 가세했다.

무엇보다 보수당 강경파와 영국독립당(UKIP) 등 유럽회의론자(Euro-skeptics)이 주도한 정치적 선동이 주효했다. 그들은 EU뿐만 아니라 이민과 세계화에 마뜩찮은 대중의 반감에 불을 질렀다. 실제로 EU가 벌이지도 않은 일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했다. 잘못된 유럽신화(Euro-myths)를 퍼뜨렸다. 런던을 상징하는 이층 버스를 곧 금지한다거나 영국을 대표하는 술안주 피시앤칩스의 이름을 라틴어로 바꾸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은 아예 '8세 이하 어린이는 풍선을 불 수 없도록 한 어리석은 정책'을 EU 규제의 상징으로 떠벌렸다. 훗날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나 공격을 받자, 그는 오히려 반문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전세계는 영국민의 철부지 같은 선택이 초래한 글로벌 금융 불안과 실물 경제에 대한 타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정작 따로 있다. 영국처럼 고도로 민주화된 사회도 한 순간에 중우(衆愚)정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감정에 휩싸인 어리석은 대중이 정치와 결정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도 보리스 존슨의 미국판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럽 대륙에서도 신고립주의자들이 반이민과 반세계화의 기치를 내걸고 약진하고 있다.

그 같은 일이 러시아나 헝가리,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 벌어졌을 때만 해도 큰 충격은 아니었다.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무정부 상태와 종교적 극단주의로 변질되고 만 무슬림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이 나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교과서로 비쳐져온 서구 모델(Western Model)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랜 경고처럼, 민주제는 언제든 중우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 대중영합주의(populism)에 의해서건 우민화 정책에 의해서건, 대중이 머리보다 가슴을 따를 때 민주주의의 퇴행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한다. 브렉시트 결정으로 그 사실을 재확인한 점이 실로 무섭다.

글 |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

* 이 글은 제민포럼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