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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모든" 인간의 교육권을 거부하는 사회 | 특수학교 설립 토론회를 보며

세상의 모든 문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주제는 토론을 거친 투표를 통해 그 의미가 결정해서는 안 되는 주제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의 문제이다. "모든" 인간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에서 "모든"은, 추상적 지칭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을 지칭한다. 육체적/정신적 장애를 지닌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교육권/학습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 따라서 필요한 곳에 그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짓는 것은 토론을 통하여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학교"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혐오시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7년 09월 11일 11시 51분 KST

한국의 크리스천, '이단'이 되어야 하는 이유

기독교의 역사는 '정통'에 의한 '이단 박해'의 역사이기도 하다. '정통(orthodoxy)'은 '올바른/곧은'의 의미를 담고 있고, '이단 (heresy)'은 '선택' 또는 '의도적 결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때 여성설교 허용, 여성안수 지지, 노예제도 반대, 다른인종간 결혼 지지 등이 '이단'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여성안수 지지가 교회의 '정통'교리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기독교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제 현대 기독교 안에 가장 커다란 논쟁이 되는 세 가지 주제를 들자면 인공유산, 여성안수, 그리고 동성애 문제이다. 이 세 가지 문제가 각기 다른 것 같지만, 사실상 그 인식론적 뿌리에는 "남성중심주의적 가부장제"가 버티고 있다.
2017년 08월 24일 14시 27분 KST

'보수' 또는 '진보'라는 라벨의 한계와 위험성

어느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진보적 또는 보수적 입장을 지닌다고 해서, 다른 문제에도 그 진보성이나 보수성이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젠더문제에 대하여 진보적 성향이 있다고 해서, 성적지향의 문제에도 자동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가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또는 성적지향에 진보적 입장이라고 해서, 노동문제나 젠더문제, 평화문제 등에 그 진보성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현상유지'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비판되고 버려진 가치들을 복고적으로 끄집어내는 이들은, 사실상 '보수주의'가 아닌 '퇴행주의'라고 해야 한다.
2017년 05월 06일 08시 55분 KST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 2017 대선 동성애 논쟁을 보면서

매일매일 혐오의 시선과 차별적 제도들에 의하여 고통속에 있는 이들에게 끈기 있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정의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태에 대한 절망과 좌절이 아니라, 이루어내야 할 정의를 향한 지속적이고 끈기 있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아야 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말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 .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언제나 '다가올 정의'이다 (Justice does not wait . . . But for this very reason, justice remains justice-to-come)."
2017년 04월 28일 10시 53분 KST

용서의 극장화 | 홍준표 후보의 '박근혜 용서'라는 정치적 도구

1)'용서의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2) 언제 (용서의 적절한 시기), 어떻게 (용서의 구체적 방식), 이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3) 가해자/잘못한 자의 뉘우침,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뉘우침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4) '용서자'가 용서를 하게 되는 경우, 용서자는 잘못된 일에 대한 '분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닌가 등과 같은 물음들이다.
2017년 04월 03일 11시 52분 KST

그들은 '이슈'가 아니라 '인간'이다 | 안희정 충남지사의 인터뷰를 읽고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종종 받는 질문 중의 하나는 '동성애를 옹호하는가 반대하는가'이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의 방향을 조금만 돌려보아도, 이 질문이 근원적으로 잘못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된다. 질문에 다시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누구도 '당신은 이성애를 옹호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이성애'가 바로 자연적인 '규범적 성 정체성'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반기문 전 UN 총장의 '동성애 옹호론자'라는 표현은 그 인식자체의 지독한 한계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현대의 다양한 연구결과들은 한 사람의 성정체성이 '선택(choice)'이 아닌 '지향(orientation)'이라는 것, 그렇기에 '옹호' 또는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지 오래다.
2017년 01월 21일 09시 41분 KST

'미스 박'과 호명의 정치학

'미스 박'이라는 호명장치가 여성혐오인가 아닌가 라는 물음 자체는 '예스와 노'만을 강요하는 매우 표피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음에 대한 물음'을 다시 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시 물어야 할 물음들은 첫째, 여성에 대한 호명과 남성에 대한 호명은 각기 '어떠한 가치관'에 의하여 형성되고, 회자되고, 재생산되는가; 둘째, 남성을 호명하는 장치는 '미스터(Mr)'밖에 없는데, 왜 여성을 호명하는 것은 두 가지, 즉 '미스(Miss)'와 '미세스(Mrs)'로 나뉘어지는가; 셋째, 어떠한 이유에서 사람들은(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이러한 사회적 호명장치에 대하여 문제제기하는가.
2016년 12월 01일 14시 32분 KST

획일성의 문화, 그 존재론적 폭력

유럽과 미국에서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돋보기안경을 목에 걸치고 있는 여자승무원, 음식을 제공하는 40~50세를 훌쩍 넘은 남자/여자 승무원, 소위 '날씬한' 몸매가 아닌 다양한 몸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여자 승무원들, 다양한 형태의 머리모양을 한 승무원들을 보는 것이 흐뭇했다. 그런데 한국행 비행기를 타니, 전혀 다른 세계이다. 승객을 서브하는 승무원들은 너무나 유사한 나이, 몸매, 헤어스타일, 말투와 자세를 지니고 있어서, 개별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은 획일성으로 감추어져 있고, 마치 서로 복제된 인형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2016년 11월 28일 16시 15분 KST

광화문, '시위의 극장'이 아닌 '사회정치적 혁명공간'으로

100만 광화문 시위가 '평화적인 축제적 시위'였다는 것, 그 자체가 그 광화문의 역사적 의미를 자동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100만이 모여서 축제적 분위기에서 '평화시위'는 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그 100만의 사람들이 여전히 성차별, 장애차별, 성소수자차별, 외국인차별, 종교차별, 저소득층차별 등으로 점철된 가치관을 가지고 정치가를 뽑고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한다면, '100만 시위 광화문'은 한국역사에서 진정으로 의미로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자리매김을 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가 치열하게 씨름해야 할 물음은, 이 광화문 시위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가치관을 확산하고자 하는가'라는 것이다. 이 물음과 대면하고 고민하지 않을 때에, 제2의, 제3의 '박근혜-최순실'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양산하는 사회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2016년 11월 13일 13시 32분 KST

트럼프 당선, 그 충격 한가운데에서

내가 이 오랜 선거 캠페인 동안 거의 매일 뉴스를 통해, 그리고 그의 언설들을 통해서 드러난 트럼프는, '대화'가 거의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치공학적인 의미에서 그가 표면적으로 대화의 양식을 지닌 5자회담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트럼프 자체에 기대를 걸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가 그 특유의 독단적 결정방식을 통해서 어떠한 파괴적이고 충격적인 행동을 할지 심히 우려스럽다. 보수적-배타적 기독교중심주의, 자민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백인우월주의, 이성애중심주의, 자본중심주의 등의 가치를 일생 동안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거침없이 표출해온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절망적인 사건이다.
2016년 11월 11일 10시 29분 KST

세 가지 종류의 분노 | 대통령의 '사과담화'를 보고

성찰적 분노가 주는 중요한 이득이 무엇인지를 유추해 낼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득이다. 이 성찰적 분노는 폭력적 상황으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하고 자기존중감을 유지하게 한다. 자신에게 부당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개인 속에 지켜낼 자존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공적 차원'에서의 이득이다. 이러한 성찰적 분노는 잘못된 일을 하는 가해자들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그에 따른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정의의 집행'이 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적 분노를 통해서 잘못한 사람들을 처벌하게 하는 효과도 있고, 동시에 이러한 것을 통해서 미래에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잘못을 하지 못하도록 서로를 보호하는 의미도 될 수 있다.
2016년 11월 05일 10시 27분 KST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 그 레토릭의 위험성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발언은 '사소한 것'이라며, 이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지금 보다 '중요한 것'의 전선을 흐리게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발언이 담고 있는 문제는 참으로 심각하다고 본다. 특히 그가 무명의 '보통사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꿈을 구체적으로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하다. 어떤 특정한 부분의 진보성이 다른 부분의 지독한 보수성과 문제성을 덮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그의 이러한 발언이 담고 있는 가치는 사실상 한국 정치인들의 차별적 가치체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02일 09시 56분 KST

'대통령 박근혜'와 '여자 박근혜'를 분리시켜야

만약 지금 대통령이 생물학적으로 남자였다면, 여자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붙여지는 옮길 수 없는 여성비하적인 차별적 표현들이 지금과 같이 SNS를 채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성 대통령이 과오를 저질렀을 때에, '역시 남자가 대통령하면 안 돼...'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박근혜의 생물학적 여성성은 이러한 '역시 여자가 하면 안 돼..'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한다. 대통령의 생물학적 성에 따라서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의 '이중기준'이 적용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진보와 개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성혐오적' 행위이다.
2016년 10월 31일 10시 13분 KST

'저주받은 삶'이란 없다 | '존재의 정원'이 있을 뿐

토마스 크바스토프 (Thomas Quasthoff)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성의 치열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끊임없이 비상하고자 하는 그의 절절한 '존재에의 갈망'을 담고 있다. 그는 성악가로서 '연기(perform)' 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존재 자체를 매 음절마다 소중한 생명의 선물처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치명적인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2016년 09월 12일 10시 23분 KST

'나향욱 사건'의 근원적 문제들 | 공무원과 언론인들의 '회식' 문화

내가 우선 알고 싶은 것은 공무원과 기자들 간의 이 '식사' 자리가 애초에 왜 필요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얼마나 자주 소위 고위급 공무원들은 언론사의 기자들과 이러한 식사를 함께해 왔으며, 그리고 '누가' 이 식사비용을 냈을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 곳곳에서 무비판적으로 행하여 지고 있는 이러한 무수한 '식사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개-돼지' 방식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아마 '나향욱' 씨는 유독 자신의 이야기만이 '운 나쁘게' 밝혀져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2016년 07월 13일 16시 43분 KST

왜 '질문'은 해답보다 중요한가

"그리스도인들은 비키니를 입어도 될까?" "동성애를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이러한 질문은 '예'와 '아니오'만을 전제함으로써 이 질문 자체가 지닌 특정한 가치관을 스스로 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둘째, 이러한 형태의 질문 방식은 '예'와 '아니오'라는 흑백 논리적 해답을 유도함으로써, 이 현실세계의 '복합성'을 상충적인 이분법적 방식으로 단순화시켜버린다.
2016년 07월 03일 13시 24분 KST

'찬란한 전통'의 걸림돌 | 영국의 EU탈퇴를 보면서

영국의 EU 탈퇴 소식은 나를 우려하게 한다. 정치 공학적 분석이전에 철학적으로 보자면, 영국의 EU 탈퇴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타자들과의 공존' 이라는 이 현대세계의 긴급한 과제를 역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국과 같은 위치에 있는 나라들이 특히 난민 문제나 이민자문제 등에 어떠한 실천적 개입을 하는가가 이 국제사회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이제 '유럽공동체'가 아니라, 다른 나라/사람들과는 다른 '영국공동체'를 더 우선적 정체성으로 내세우겠다는 것은, 타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배타성을, '영국성'을 지켜내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슬람, 여성, 성소수자등과 같은 '타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노골화하는 미국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차별의 정치'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이 미국 안에서도 더욱 힘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2016년 06월 25일 10시 39분 KST

'정상-비정상' 레토릭의 위험한 덫 | 혐오의 몸짓을 거두라

성서에 근거하여 성소수자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기독교인들이 진정 '성서대로' 살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그들이 따라야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환대이다. 이러한 가치야 말로 성서가 담고 있는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진리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도, 그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도 또는 여성평등을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도 모두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성서 속에서 찾고자 하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서 구절을 찾아낼 수 있다. 성서는 억압적 전통과 해방적 전통을 동시에 담고 있다. 따라서 해방적 가치를 지닌 '절대적 진리'와, 시대문화적 제한성속에서 전개된 억압적 가치를 지닌 '상대적 진리'를 구분해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2016년 06월 11일 13시 09분 KST

구의역 사건의 초점 | '19세 청년'이 아니다

이렇게 구조적 부당성에 의한 죽음에 생물학적 나이가 전혀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그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이 20세이든 70세이든, 또는 그 사람의 성별이나 성품이 어떠한 것이든 그 죽음이 연계된 다층적 문제점들과는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나이, 성별, 계층, 국적, 또는 성품 등에 따라서 '더 소중한 생명' 이거나 '덜 소중한 생명'이라는 의식적/무의식적 '생명의 위계주의'는 경계해야 할 가치체계이다. 어떠한 연령의 사람이든 사실상 모두 '꽃다운' 소중한 생명인 것이다.
2016년 06월 03일 10시 07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