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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

서울대 강사

서울대 강사

국립극장의 역할을 확인시켜준 창극 '산불'

산불 장면은 사실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생생하게 구현된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거대한 무대 뒷벽이 붉은 불길로 일렁이고 진짜 대나무가 가득한 무대로부터 대나무가 불에 타서 쪼개지는 소리가 퍼져나갈 때, 전쟁의 참화(慘火)에 대한 이 재현은 감각적 현실로 육박해온다.
2017년 11월 02일 13시 43분 KST

혀끝으로 만나는 중국

사실 이 작품은 음식 다큐멘터리의 범주에 가둬두기 어렵다. 이 작품에는 보다 전형적인 음식 다큐멘터리였다면 전면에 내세웠을 중국의 공인된 대표음식들, 즉 베이징의 카오야(오리구이 요리)나 광둥의 딤섬 같은 도시 미식문화의 산물들이나 만한전석으로 대변되는 청대 궁중요리의 유산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서민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지역별 '특색' 음식이 이 작품이 다루는 주된 품목들이다. 요리하는 모습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식재료를 구하는 고단한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더 많고, 요리 장면 자체도 가정식이 주가 될 만큼 중식 하면 대번 떠오르는 화려한 화공은 자주 나오지 않는다.
2017년 02월 02일 16시 50분 KST

밥 딜런과 (미국)문학 전통 | 밥 딜런은 '시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 답변

그는 경력의 초기에 현대예술에서는 거의 사라진 예언자-시인의 모습을 구현했다.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당시의 딜런을 두고서 '블레이크와 휘트먼에게서 물려받은 횃불이 이제 딜런에게로 넘어갔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그의 개인적·예술적 행적은 복잡다단한 굴곡을 그리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고 결코 초기의 위엄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199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대신해 걸프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전쟁의 대가들」을 불렀던 때처럼 딜런은 때때로 역사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견제하는 예술의 힘을 환기시키는 순간을 연출했다.
2016년 11월 03일 17시 06분 KST

유토피아로서의 씨트콤 | 드라마 '청춘시대'와 청춘 씨트콤 장르의 진화

저 멀리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부터 '남자셋 여자셋'과 '논스톱' 씨리즈, 그리고 최근의 '응답하라' 씨리즈까지 같은 집에 어울려 사는 대학생들은 한국 드라마의 단골소재였고, 이런 계열의 드라마는 대개 사실적이기보다는 씨트콤 풍의 장르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최근 이런 포맷의 드라마 제작은 위축된 상태이며, 그렇게 된 저간의 사정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헬조선' 담론이 젊은 세대가 자신들에게 닥친 한국사회의 현실을 체감하고 이해하는 유력한 관점이 된 마당에 이제 대학생활의 낭만은 믿기 힘들게 된 것이다.
2016년 09월 22일 18시 28분 KST

신파와 종말 사이 | 「부산행」과 재난의 상상력

연상호 감독의 존재는 「부산행」에서 괜찮은 오락영화 이상의 것을 기대하게끔 만든다. 그의 전작인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는 이제는 거의 모든 예술장르에 걸쳐 희귀해진 리얼리즘의 수작이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를 걷어내면 감독의 전작들과 공명하는 메시지가 추출된다. 회복과 구원의 가능성은 사라졌는데, 우리가 딱히 악해서가 아니라 살려다보니 남과 나를 함께 망가뜨리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영화에는 좀비 장르 전체를 통틀어서도 굉장히 이례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2016년 08월 04일 17시 27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