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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영화평론가

필름2.0, GQ, 프리미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에세이 <대한민국 표류기>와 비평집 <망령의 기억: 1960~80년대 한국공포영화>, 소설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을 썼다. <썰전>과 <마녀사냥>에 출연 중이다. 글쓰는 사람이다.

25년 만에 돌아온 〈트윈 픽스〉를 환영하며

새로운 시즌의 여덟 번째 에피소드가 방영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쿠퍼 요원은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다. 자신이 온전히 기획하고 연출할 수 있는 작품에만 참여했던 데이비드 린치는 이번 시즌 역시 파맛 첵스 같은 미감으로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가장 전위적인 이야기를 고집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연출자가 가장 나이 많은 감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묘한 신비함을 느끼며 이번 시즌을 챙겨 보고 있다.
2017년 07월 14일 16시 24분 KST

누군가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관한 역설 〈분노〉

"오키나와의 편이라든가 하는 그런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하지만, 너의 편이라면 언제든지 되어줄게." 나는 저 말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컨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저런 말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너의 편이 되어준다'는 말의 무게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편이라든가 그런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하지만'이라는 말이 드러내고 있듯이 말이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일은 오키나와의 편이 되는 것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일이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일인지 알지 못하거나 애초 고민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만이 저런 약속을 쉽게 내뱉는다.
2017년 04월 13일 17시 00분 KST

〈엘리펀트맨〉과 〈1984〉의 잊지 못할 장면

영원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그런 장면들이 꽤 많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장면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두 가지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그것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장면은 모두 한 명의 배우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평생에 걸쳐 마흔세번 죽었고, 얼마 전 마지막으로 다시 죽었다. 이 원고는 그에게 바치는 글이다.
2017년 02월 24일 15시 54분 KST

〈스타워즈〉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완벽하게 메운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다스 베이더가 얼마나 강한지에 관한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스 베이더가 강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얼마나 강한지에 관해서는 눈으로 확인해본 일이 별로 없다. 에피소드4에서 오비완 케노비와의 대결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그건 대결이라기보다 광선검을 들고 장기를 두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에피소드5와 6에서 루크와의 대결은 그보다 조금 더 나았다. 그러나 역시 둔하고 느렸다. 반면 〈로그 원〉에 등장하는 다스 베이더의 학살 장면은 압도적이다. 누구도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 다스 베이더는 〈로그 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타워즈〉 시리즈의 압도적인 사기 캐릭터로서 입지를 확실히 한다.
2017년 01월 03일 17시 54분 KST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누구나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방향이 반드시 옳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의 방향이 경직된 사고에 갇혀버렸을 때 그 결과는 옳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변질된다.
2016년 12월 29일 11시 10분 KST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 대통령이 사기꾼이 된 순간

닉슨의 특별검사 해임 요구에 법무장관이 거부하고 사임한다. 권한대행도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결국 세 번째 권한대행이 된 차관이 닉슨의 명령대로 특별검사를 해임한다. 이 일은 국민이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자 닉슨은 대국민 담화를 시도한다. 닉슨은 400명의 기자들 앞에서 저 유명한 말을 내뱉는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 즉시 모든 미국인들은 닉슨 대통령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2016년 12월 06일 11시 41분 KST

그게 사랑이었어

무언가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없이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기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대개의 경우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을 때 특히 더 그렇다.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을 때 특히 더 그렇다.
2016년 12월 01일 11시 55분 KST

풍파를 견딜 수 없는 나이라는 말

놀랍게도 나는 이경재 변호사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젊은 세대가 세상의 풍파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원리를 배우기 전에 현실의 아니꼽고 치사함을 먼저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단 한번도 젊은 세대를 향해 그런 종류의 아량을 베풀어본 일이 없다는 데 있다. 풍파는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이라는 의미다. 풍파를 견딜 수 있는 나이란 과연 몇살일까. 한국 사회는 그간 생존의 출발선 앞에 선 젊은이들을 시작은 힘든 게 좋다며 세찬 바람 앞에 바람막이로 썼고 험한 물결이 있을 때는 그 안에 수장시키고 사고라고 둘러댔다.
2016년 11월 08일 10시 24분 KST

간첩조작사건 다룬 '자백'이 좋은 다큐인 이유

무엇을 다루었느냐가 중요하지 작품의 함량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 엄혹한 세상에, 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별로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다큐 <자백>에서 과거 군부독재 시대를 비판하는 등장인물의 대사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을 위해서라면 프로파간다라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과 동업자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다큐들을 모두 퉁쳐서 함량 미달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좋은 다큐가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세상을 망치는 건 그런 사람들이다. 자, 그렇다면 최승호의 '자백'은 좋은 다큐인가.
2016년 10월 13일 11시 37분 KST

자력구제 권하는 사회 | '왕따' 피해자를 '살인미수' 가해자로 만들어버린 비극

왕따를 검색해보면 연관검색어로 가장 먼저 뜨는 건 '왕따를 당하지 않는 방법'이다. 왕따를 당하고 있을 때 알려야 할 곳이나 해결할 수 있는 과정을 다루는 대처법 같은 건 검색어에 없다. 예방법은 찾아보되 해결책은 포기한 병증. 그것이 지금 한국의 '왕따' 문제다. 한국에서 왕따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내부고발자를 다루는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2016년 10월 06일 11시 33분 KST

'머니 몬스터'의 실책이 드러내는 진실

'머니 몬스터'는 외연이 화려한 영화다. 조디 포스터가 연출을 맡았다. 조지 클루니와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다. 이야기 또한 관객의 마음을 잡아끌기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머니 몬스터'는 외연부터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언뜻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무것도 성취해내지 못하는, 초라한 완성도를 드러내고 만다. 어떻게 된 일일까.
2016년 09월 09일 18시 24분 KST

엄마, 나의 가장 친애하는 적

그녀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아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이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엄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엄마 생각을 하면 나는 늘 조금 울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엄마 무릎 위에서 울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못한다.
2016년 08월 05일 12시 45분 KST

도플갱어가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는 한다. 대개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체계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다. 이를테면 방금 전자담배의 배터리가 모두 닳았다. 무심코 일어났다가 충전기 앞에 가서야 불과 십 분 전에 이미 충전을 했다는 걸 생각해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미스터리한 게 아니다. 접촉 부위가 헐거우면 가끔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런 일은 체계를 알고 나면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셔츠의 단추가 채워져 있거나 엄청나게 눈이 큰 사내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거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니가 내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 있다며 일기토(일대일 싸움)를 신청해 오는 일 따위에는 체계도 없고 경위도 알 수 없다.
2016년 07월 08일 12시 09분 KST

'아가씨'가 원작의 설정을 버리면서 취한 몇 가지 영화적 강점

결국 <아가씨>에서 겉으로 보기에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성적 묘사 부분이 될 것이다. 이 영화에 남녀간의 섹스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가씨와 숙희 사이의 굵직한 섹스 시퀀스가 몇 차례 있고, 이 과정의 성적 묘사는 대단히 과감하고 생각보다 조금씩 더 길다. 그러나 그렇게 긴 묘사를 통틀어 딱히 성적 흥분을 일으키게 할 만한 구석은 거의 없다. 이 영화에서 포르노그래피를 향한 욕구를 챙기고자 했던 관객이라면 다른 걸 찾는 게 좋겠다(그녀들이 탈주하는 세계가 정작 남성-포르노그래피화된 야설의 세계다). 대신 그간 한국영화에서 본 적이 있나 싶었던 자세나 표정들이 나와서 좋다(표정이 특히 마음에 든다. 이 영화에는 섹스 장면에 언제나 등장하는 재채기하기 직전의 표정 같은 건 없다).
2016년 06월 06일 12시 13분 KST

극한의 공포 '곡성'의 악(惡)이 범상치 않은 이유

이 영화에서 공포의 순간은 관객이 예상할 만한 순간에 예상할 만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장르적인 공식 안에서 운용되기보다 극중 현실 안에 그냥 '발생되어'져 있다. 나는 악이 어떤 사연과 이유를 가지고 탄생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꽤 좋아하는 괴담의 마지막에서 "대체 왜 나냐"는 희생자의 절규 앞에서 귀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런 종류의 우연과 무작위성이야말로 공포를 배가시킨다. 아귀가 딱 들어맞는 설명은 음모론이나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지, 대개의 경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2016년 05월 16일 15시 53분 KST

문제는 드라마다 | 개연성과 설득력 상실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문제는 드라마다. 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옮겼느냐의 문제는 애초부터 거론할 가치가 없다. 관객의 구할이 보지 않았을 원작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한편의 영화로서 얼마나 잘 굴러가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이 영화가 가진 드라마의 구멍은 '원작과 다른 동기로 인해 팀이 분열된다'가 아니라 '팀이 분열되는 동기 자체가 원작과 달리 큰 설득력을 갖고 있지 않다'로부터 출발한다.
2016년 04월 30일 15시 40분 KST

열심히 모래를 퍼내는 삶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2016년 02월 28일 09시 32분 KST

간증의 시간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접한 제다이교 신자의 행복과 기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기존 '스타워즈' 시리즈를 통틀어서 가장 유머러스하고 비주얼 효과는 최고 수준이며 신인 위주의 캐스팅도 기가 막히고 연기의 합도 굉장히 뛰어나다. 그러나 새로운 관객이 올드 시리즈의 관객처럼 팬덤화될 것이냐를 따지고 보면, 나는 회의적이다. 일단 이 영화는 뛰어난 리부트이자 연작의 새로운 장이기는 하지만, 어찌 됐든 전작들의 위상과 잔상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밀레니엄 팔콘은 등장 자체만으로 오줌을 지리게 만들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오래된 동그란 우주선일 뿐이다. 기존 시리즈를 영 모르는 사람들은 많은 대목에서 어리둥절할 수 있다.
2015년 12월 27일 14시 43분 KST

왜 '송곳'은 '미생'이 되지 못했나

'송곳'은 성공하기 위한 미션을 수행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송곳'은 단 한번의 성공의 경험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실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실패할 걸 알면서도 기댈 곳이 없어 소속되고 싶지 않은 곳에 소속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보다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공포를 먼저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다. 사실 이 공포는 자기부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시청자의 대부분이 이미 '송곳'이 다루고 있는 현실 안에 있기 때문이다.
2015년 12월 13일 11시 34분 KST

별일이 다 있다니까요!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거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굳건해진다. 부끄러운 벌칙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내게도 일어난다. 그러나 내 고통을 내가 별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의 사연을 별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훨씬 더 힘들고 어렵다. 한국에서는 특히나 말이다. 극중의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영화는 드물다. 나는 라스를 응원하고 싶었다. 저 공동체는 염려되지 않았다. 저런 공동체는 알아서 잘 굴러갈 수밖에 없다. 라스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 그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2015년 11월 08일 13시 31분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