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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펴지 않고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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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의 두루마리 성경이 베일을 벗었단다. 두루마리는 1970년 이스라엘 엔게디 지역 성당에서 발견됐다. 46년 동안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불에 탄 채로 발견돼 조금만 손대도 바스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국 켄터키대학 연구진은 엑스(X)선으로 두루마리를 스캔한 이미지를 3차원(3D) 공간에 가상으로 펼쳤다. 그런 다음 X선을 투과해 반짝이는 부분만 추출해 분석했다. 두루마리에 적힌 글귀는 성서 '레위기'로 밝혀졌다.

기술은 끊임없이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하지만 놀라긴 이르다. 두루마리 문서보다 훨씬 두꺼운 내용물을 '투시'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조지아공대 학자들로 이뤄진 연구팀이 공개했다. 연구진은 얇은 두루마리가 아니라 두꺼운 책에 도전했다.

어떻게 책을 펼치지도 않고 글자를 읽겠다는 것일까. 비결은 '테라헤르츠파'(T-Ray)다. 테라헤르츠파는 병원에서 질병을 진단하는 데 쓰는 전자파의 한 종류다. X선이나 초음파처럼 물체의 표면을 뚫고 침투하는 특성을 지녔다. 인체에 해가 없고 투과율도 X선보다 높아 '꿈의 전자파'로 불린다. 우편물이나 가방에 숨긴 폭발물이나 마약류를 찾는 데도 두루 활용된다.

연구진은 테라헤르츠파가 화학 성분에 따라 다르게 침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특성을 이용하면 책에 테라헤르츠파를 쏴 종이와 잉크를 구분할 수 있다. 페이지별로 글자를 분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각 책장 사이의 간격은 20㎛(마이크로미터)에 불과하다. 머리카락 굵기의 5분의 1 수준이다. 연구진은 짧은 간격을 두고 테라헤르츠파를 여러 차례 쏜 다음, 각 파장이 책장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했다. 이런 식으로 연구진은 얇은 종이라도 페이지마다 정교하게 두께를 구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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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읽는 데는 '머신 이미징' 기술을 활용했다. 이런 식이다. 카메라가 쏜 테라헤르츠파는 잉크에 부딪혀 다시 카메라로 반사된다. MIT 연구진은 자체 개발한 알고리즘으로 이를 분석해, 데이터를 이미지로 변환했다. 작업이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반사된 데이터를 이미지로 변환했더니 처음엔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찌그러진 이미지는 조지아공대 연구진이 개발한 또 다른 알고리즘을 이용해 해독했다. 이 알고리즘은 웹사이트가 사람과 봇(bot·로봇의 준말)을 구분하기 위해 인증 수단으로 쓰는 '캡차'(CAPCHA)와 비슷한 원리다. 연구팀은 책 맨 앞부터 페이지별로 한 글자씩 뽑아내 원문과 맞는지 대조했다. 이런 식으로 9페이지까지 정확히 글자를 '투시'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테라헤르츠파가 반사한 신호는 잡티투성이다. 그러나 센서가 더욱 정교해진다면 언젠가 책 한 권 전체를 펼치지 않고 읽는 시대가 올 것이다. 특히 이 기술은 손상이 심한 책이나 고대 유물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 실제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오래전부터 이들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보관 중인 고서적들을 연구팀에 실험용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기술이 좀더 숙성되면 손만 대도 바스러질 듯한 고문서나 책을 모서리 하나 건드리지 않고 과학의 힘으로 투시할 수 있게 된다. 책뿐이랴. 테라헤르츠파는 사물의 화학 성분을 구분하는 특성을 지녔다. 겹겹이 싸인 물건 속을 들여다보는 데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다. 책을 기기 위에 올려놓기만 해도 전체 내용이 스캐닝되는 시대가 올 모양이다. 연구팀은 이 논문을 9월9일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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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