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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F PRIDE ①] 성소수자 인권운동가·군인권센터 소장 임태훈 "성소수자에게 중요한 것은 프라이드와 정치세력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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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는 6월 'LGBT 프라이드의 달'을 맞아 한 달 동안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커뮤니티를 조명하는 HUFF PRIDE 기획을 진행합니다. 첫 번째는 현 군인권센터 소장이면서 2000년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활동 중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임태훈 소장과의 인터뷰입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 1990년대 중후반 청년 운동가로 한국의 초기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했고, 2003년에는 군 내 성소수자 차별에 항의하며 입대를 거부해 1년 6개월여 복역했다. 2009년 군인권센터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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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밍아웃


- 인생 최초의 커밍아웃은 언제, 누구한테였나요?
= 다른 사람한테 처음 얘기한 건 대학 시절이에요. 재수학원부터 같이 다닌 과 동기 누나였는데, 속 얘기까지 다 하는 친한 사이였어요. 그때 대학 선배랑 몰래 사귀었는데, 헤어지고 너무 힘들어서 누나한테 얘기하게 된 거예요. 술 마시다 "사실 나 남자 좋아해" 하니까 놀라더라구요. 제일 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커밍아웃하면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 그럼 두 번째 커밍아웃한 사람은요?
= 여성학 교수님. 백명 넘게 듣는 여성학 교양 강좌에서 남성성·여성성 테스트를 했는데, 거기서 제가 여성성이 최고로 높게 나왔어요. 교수님이 자기가 강의하면서 남자가 이렇게 여성성이 높은 게 처음이라면서, "앞으로 21세기에는 저런 남자랑 결혼해야 됩니다"라고 말하길래 안 되겠다 싶어서 찾아가서 커밍아웃했죠. 교수님이 놀라고, 또 좋아했어요. 누가 자기한테 커밍아웃한 게 처음이라고 고맙다고 했어요.

- 10대 때는 커밍아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 10대 때는 커밍아웃이 문제가 아니라 내 정체성에 대한 물음표를 계속 찍었죠. 그럴 때 가장 흔하게 하는 게 사전 찾아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전에 부정적으로 묘사해놨잖아요. 변태성욕자, 성도착증, 비정상이라고. 그걸 보면 스스로한테 되묻게 되는 거죠. 이게 비정상이구나, 내가 무슨 문제가 있구나, 감추고 위축되고. 그러다보니까 또래하고 섞일 때도 그런 게 들킬까봐 걱정되는 상황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부모한테 죄짓는 것 같았어요. 학창시절에 소위 말하는 나쁜 짓 한두 가지씩 할 때 있잖아요. 어머니 지갑에 손 댄다든지 가출한다든지. 그런 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죄책감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동성애자인 것은 계속해서 죄짓는 기분이 들죠. 이성애가 정상적인 성애고, 남녀가 결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가르치는 가부장적이고 가족중심주의적인 교육관. 그 안에서 제가 뭔가 '다르다'는 건 곧 '틀리다'는 것이거든요.

- 사회적인 공개 커밍아웃은 언제가 처음이었어요?
= 1996년에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라는 곳의 1주년 모임에 가게 됐어요. 그때 동성애자들을 많이 만났고 친구사이 모임도 가게 됐고, 홍석천 씨도 그때 알았죠. 그 이후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커밍아웃도 당연히 했죠. 하지만 당시 제 기조는 어머니 아버지가 보지 않을 신문, 그러니까 한겨레나 경향에만 인터뷰하는 거였어요. 조중동은 인터뷰하면 부모님이 볼 확률이 높으니까. 그런데 2000년에 석천 형이 커밍아웃하면서 TV토론에 토론자로 나가게 돼서 그 원칙이 깨졌어요.

그때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 집행위원을 했거든요. KBS 생방송 토론에는 원래 다른 교수가 나갈 예정이었는데 그때 학교 계약 내용에 대외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게 있었나봐요. 그래서 대타를 찾다가 제가 출연하게 된 거예요. 석천 형이 계획을 갖고 커밍아웃한 게 아니었고 저도 계획 없이 방송에 나가게 됐죠.

방송으로 커밍아웃하면서 굉장히 후련했어요. 더이상 "여자 만나 결혼해야지", "애 낳아야지"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 다만 아버지 어머니는 굉장히 충격 받으셨죠. 이런 얘길 하면 이기적으로 들릴까봐 걱정되기도 해요.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함으로써 부모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않는 불효자'라는 말도 듣거든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치면 우리 사회에서 불효자 범주 안에 안 들어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영혼 없는 인간처럼 부모가 요구하는 길을 쭉 걸어간다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도 의문이고요.

- 커밍아웃에서 가장 고민되는 부분은 뭘까요.
= 제가 커밍아웃 해야한다고 말하면 '너는 커밍아웃했으니까 말 쉽게 한다' 이런 반응도 있어요. 그것도 일리있는 말이지만, 제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언젠가 할 수 밖에 없는 거라면 준비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미였어요. 확률상 가장 위험한 게 준비되지 않은 커밍아웃이거든요.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을 때 위험하다는 거죠. 특히 가족들의 반응이요.

제 경우는 부모님 반응이 예상과 달랐어요. 보수적인 경상도 남자인 아버지는 절 비난하거나 함부로 말할 줄 알았고, 비밀이 없을 만큼 친했던 어머니는 금세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가 많이 우셨고, 아버지는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해줬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하고 대립각을 세울 줄 알았는데 더 좋아졌어요. 어머니가 우신 건 본인의 기대가 무너져서 그렇지 않을까, 한편으로 내가 뭐 잘못해서 저렇게 된 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어서는 아닐까도 싶어요. 저한테 그런 얘기는 한번도 안 하셨지만. 제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생각을 하고 계셨을텐데 그게 무너진 거죠. 그래도 슬퍼한 기간은 짧았어요. 빨리 포기하고 받아들이셨어요.

*한국의 청소년 성소수자

가장 많이 알려진 10대 성소수자는 2003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인 육우당이다. 게이임이 밝혀져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기도 했던 그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에서 청소년 활동가로 차별금지조항 법 개정 운동을 하다 20살의 나이에 자살했다. 기독교인이기도 했던 그의 일기에는 "정말이지 짜증나. 예수님은 분명,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들이 고귀한 인권을 유린하고 마치 자기네들이 하느님인양 설쳐대니까 말야"라는 구절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5년 11월 발표한 학교·직장 내 성소수자 차별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 만 13~18세 성소수자 청소년 200명 중 20%가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으며, 16.1%는 자해 경험이 있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의 '차별행위'에는 교내에서 성적 지향을 근거로 괴롭히거나 불리한 대우를 하는 행위가 포함돼 있다.


2. 90년대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


-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 기자회견을 통해서 사회적인 여론을 반전하는 데 성공했죠. 가십에서 사회면으로 지면이 옮겨갔으니까 1차적으로 성공한 것이고, 당시 석천 형이 대학 강의를 많이 다녔으니까 그것만 봐도 사회적으로 붐을 일으킨 게 사실이죠. 이제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무엇보다 석천 형이 좌절하지 않도록 만들었고.

그리고 나중에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성적 지향'이 언급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어요. 당시 운동가 커뮤니티 안에서도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이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는 기조가 좀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모임 이후로 그런 의견이 일축됐어요.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이걸 빼고는 갈 수 없다', 이렇게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죠. 그때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이건 차별금지법의 모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됐죠. 물론 지금 난항을 겪고 있지만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반대에 부딪히고 힘들지만 한국인권운동사에서 옥석이 가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에요.

- 홍석천 씨 이전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90년대엔 어땠나요.
= 제가 활동할 때는 친구사이하고 끼리끼리(현 레즈비언상담소)가 다 활동이 많았어요. 그때는 대학교 학생회하고 활동이 활발했고, 사회단체하고는 상당히 벽이 있었어요. 90년대 말까지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가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무지했거든요. 연대하자고 하면 콧방귀도 안 뀌었고. 왜냐하면 한국 NGO 안에서 단 한 번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논의된 바가 없으니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접촉면을 늘리면서 유식해진 거죠.

1998년에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위한 설명회를 했을 때 저희가 가서 소식지 나눠주면서 '동성애자 차별도 여기 넣어달라'고 했었어요. 그때 사람들이 게이를 처음 본 거예요. 물론 본 사람들도 있기는 있었죠. 통역했던 곽노현 전 사무총장은 유학 시절 아래층에 게이가 살았고, 인권운동가들 중에서도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갔던 천정배 당시 변호사 등은 거기서 게이 레즈비언을 봤고요. 그런 분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겠죠. 그 외에 '이게 뭐야, 이것도 인권이야?'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반 이상이었어요.

그때는 또 여성단체가 레즈비언 단체와 엮이는 걸 싫어했어요. 본인들도 레즈비언이라는 오해를 받을까봐. 역사를 보면 그건 한국 여성단체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미국여성회도 마찬가지였어요. 1970년대에 조직 내 레즈비언들에게 레즈비언임을 침묵하게끔 강요하고, 레즈비언 문제에 못 나서도록 막았죠.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조직에 유리하지 않다고 얘기하면서요. 민주화 선진국인 미국도 그 과정을 거쳤으니까, 한국도 그 과정을 거치는 거죠.

- 지금은 많이 바뀌었나요?
=지금은 바뀌었죠. 시민단체 사회가 스스로 바뀌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도 있고요, 또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여성 운동가 중에서 커밍아웃한 분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죠. 당장 (성소수자를) 대면하니까 바뀌는 거죠.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거예요. 미국 연방대법원의 보수적인 법관 중에서도 자기 비서가 커밍아웃해서 입장을 바꾼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 이게 다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이 모든 것이 아직 과정인 게 아닐까요? 다만 그 과정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특히 죽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진짜 문제인 거죠. 강경하게 발언하기도 해야하고, 타협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3. 군 입대 거부


- 성소수자 차별에 저항해서 군 입대를 거부하셨죠?
= 사실 그냥 갈 수도 있었죠. 그런데 신체검사 받는 날 군에서 동성애를 질병으로 본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징병 신체검사 기준표를 보면 질병마다 항목이 나와있거든요. 통풍은 뭐, 결핵은 뭐 이렇게 신체등급이 5급/4급/3급 나와있는데, 거기서 인격장애 항목에 동성애를 '성적 선호도장애'로, 트랜스젠더를 '성주체성 장애'로 규정해놨어요. 제가 신체검사한 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에는 군대 병무청에서 트랜스젠더하고 게이를 구분 못할 때예요. 정신과 가서 그런 내용의 진단서를 받은 다음에 여장하고 병무청 가서 그 기록을 내면 군 면제가 됐어요. 당시에는 정신과에서 그런 진단서를 끊어주는 데가 있었어요. 원래대로라면 그럴 수 없죠.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잖아요.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이미 1973년에 동성애를 질병이 아닌 것으로 합의했고, 나중에는 아예 분류표에서 삭제했어요. 저도 하자면 그렇게 면제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트랜스젠더는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차별적이고, 군형법 92조(*동성 간 합의에 의한 성행위를 추행으로 규정해 징역으로 처벌하는 내용 포함)가 있어서 그 2가지를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죠.

같은 또래, 같은 동네 애들이 묶여서 같이 신체검사를 받아요. 서울에서도 몇 개 구를 합쳐서 하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동기 만나기 십상이에요. 성당 의자 같은 데 앉아서 방송 나오는 걸 듣고 OMR카드를 체크하는 인성검사가 있는데, 동성애 관련 질문이 서너개 나와요. 남자를 좋아하냐, 이런 질문이 나왔는데 마킹을 못하겠더라고요. 바로 옆에 친구들이 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자기 답안지 마킹하느라 바빠서 제 껀 보지도 않았을텐데,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마킹을 못 했어요.

- 인성검사에서 남자를 좋아한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나요?
= 입대는 똑같이 하는데 가서 관심병사로 분류되죠. 그러면 괴롭힘을 당하거나, 성적인 걸 충족하기 위한 관계를 요구받거나, 그런 위험에 노출되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그건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굉장히 많이 달라져요. 지휘관이 잘 데리고 있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 상황이 혹시 있을까봐 자기 당번병, CP병으로 붙여놔서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하는. 편견 없는 지휘관이면 무사히 전역할 가능성이 높고, 정반대의 경우면 지옥인 거죠.

- 입대 후 복역 중에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사람들의 최근 10년 사례를 보면 정신병원 강제 입원, 성행위 동영상 제출 요구, 목적과 성분을 설명해주지 않은 채 임의의 약을 먹이는 것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요. 요즘은 어떤가요?
= 진행 중인 사건이 있는데요. 진위 여부는 조사 후에 알 수 있는 거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동성애자인지 묻고 합의한 성관계를 추행으로 몰고 간 것은 군 수사기관이 분명하게 잘못한 거죠. 인권적 시각에서 수사의 형평성을 지키지 않았잖아요. 법 집행 공무원은 누구보다도 인권을 잘 지켜야 할 사람들인데도요.

전에 있었던 그런 사건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고 봐요. 이미 신체검사에서 동성애자를 관심병사로 분류하고 있고, 또 지휘관이 병사들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라는 미명 하에 차별금지법 반대 설교나 강제 전환치료 같은 걸 할 수도 있으니까요. 돌팔이 목사 데려와서 기도하면서 때려도 못 막는 거예요.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잘못된 편견으로 병사들을 세뇌시킨다면 그건 나치 군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 군이 의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정신의학적 개념을 규정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한국 군에서는 지금도 동성애를 정신장애로 분류하고 있나요?
= 지금도 그렇죠. 명백하게 의학계 진료 대상에서 배제된 것을 계속 주장하고 있어요. 미국 정신의학회가 심리학회에 이어서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하지 않게 된 게 1973년이에요. 오래됐죠. 이게 정말 정신병이냐 아니냐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토론을 했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의학자들이 아니라고 결정한 거예요.

- 다른 나라에 망명한 한국인 중에는 성소수자도 있는데요. 물론 나라마다 절차나 기준이 다르겠지만, 성소수자로서 한국에서의 삶이 척박하다는 것을 난민 자격을 신청할 때 어떻게 증명했나요?
= 그 나라 정부에서 지정해 준 변호사와 인터뷰를 하고 그 녹취를 판사한테 제출하고요. 국제앰네스티의 통계 자료, 미국 국무성 보고서 같은 외부 공식 자료들을 인용해서 종합적으로 박해의 위험이 큰지 여부를 판단해요. 동성애가 군에서 인권 침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군형법 92조 6항이 있고, 또 신체검사 분류표가 명확하게 있으니까 그게 명문화된 증거가 되죠.

*정신의학계와 동성애

현재 5차 개정판까지 나와있는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은 1973년 2차 개정판에서 동성애를 장애(disorder) 분류에서 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977년 국제질병분류(ICD) 9차 개정판에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기재했으나, 1990년 5월 17일 10차 개정판에서 이를 삭제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이를 기념해 5월 17일을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지정했다.


4. 중요한 것은 프라이드다


-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면서 내부 분위기는 어땠나요.
= 재미있었어요. 90년대에 가장 재미나게 일했던 게 여름인권캠프예요. 1박2일 동안 세미나도 하고, 놀기도 하는데 세미나 주제는 순결주의와 동성애, 종교와 동성애, 기독교와 동성애, 가족주의와 동성애, 끼와 동성애, 자살과 동성애 이런 것들이었어요. 그리고 '여성성을 혐오하는 게 인권 운동에 바람직한가' 같은 인권운동 커뮤니티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토론했어요.

- '순결주의와 동성애'는 어떤 내용이었나요?
= 90년대 후반에 대학가에서 기독교인 학생들의 순결주의 운동이 있었어요. 한 사람하고 잘 돼서 가족을 가져야지 문란하면 안 된다면서 학내에서 언약식 같은 거 하고. 그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해서 우리는 그걸 씹는 반순결주의 운동을 하자고 하면서 순결주의 십자가를 만들어서 화형식도 하고 그랬어요.

- 당시 게이들 사이에서 여성성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있었나요?
= 있었죠. 지금도 있어요. 여성적인 게이들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거요. (만날 사람을 찾으려고 올리는) 자기소개글 보면 '상대방이 끼가 없었으면 좋겠다', '남성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들이 있어요. 그런 걸 보면 그게 그 사람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부에도 여성성에 대한 혐오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같이 다닐 때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데, 그냥 여성성이 과도한 사람은 싫다 정도의 얘기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경향이 생겨서 혐오까지 가는 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 남자가 소위 '여성적'인 것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이 반영된 건가요?
= 그런 것도 있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긍정이 없는 거죠. 왜냐하면 동성애 자체가 창피하니까. 그 정체성을 긍정하지 않으니까 여성스러운 게이랑 같이 다니는 게 창피하다고 말하잖아요. '걸커'라고 해요. '걸어다니는 커밍아웃'. 자기가 게이라는 걸 발산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인데, 사실 게이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자기 프라이드를 뽐내면서 다니잖아요. 그게 '대중이 볼 때 창피하니까 나도 창피하다'고 할 필요는 없어요. '너 옷 못 입어서 같이 다니기 싫어', '너 못 생겨서 같이 다니기 싫어' 이러니까 다들 외모지상주의에, 성형하는 데 돈 쓰는 거 아니겠어요?

- 본인은 소수지만 겉모습은 다수이고 싶은?
= 그런 거죠.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김조광수 감독이 결혼식에서 드레스 입은 걸 창피하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결혼식에서 턱시도를 입든, 드레스를 입든, 반바지를 입든, 스타킹을 신든, 체육복을 입든 그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게 이성애자들도 정형화된 틀 안에서 찍어내듯이 식을 하잖아요. 그걸 본인이 획기적으로 하겠다는데 뭐라고 할 순 없는 거죠. 그건 본인의 선택이니까 존중받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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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결혼식에서 드레스를 입은 김조광수-김승환 부부, 오른쪽: 드레스 차림의 웨딩 화보

한국은 굉장히 유교주의적인, 보수성이 강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거기로부터 자유롭진 않겠죠. 당장 퀴어문화축제가 비난받는 이유도 그거잖아요. 꼭 벗어야 되냐고. 저한테 그런 얘기 하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임태훈 씨, 이번에 축제에 얘기해서 좀 안 벗으면 안 되겠냐'고. 그래서 제가 한채윤 퀴어문화축제 위원장한테 얘기를 했어요. 이런 말들을 전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랬더니 "게이들이 벗고 나오는데 어떻게 내가 그걸 입히냐, 다 개인들이 오는데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더라고요.


5. 또 중요한 것은 정치세력화다


- 앞으로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정치인이 있나요?
= 박원순 서울시장, 문재인 씨, 안희정 충남도지사, 유승민 씨, 그리고 또 다 기대가 커요. 그런데 기대는 기대고요. 결국 정치를 하는 건 본인이기 때문에 본인이 결정할 문제죠. 박원순 시장이 더 큰 정치인이 되려면 서울시인권조례 문제로 자신을 비난하는 입장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느 것이 더 옳은 결정인지, 어느 것이 더 후회없는 결정인지. 인권변호사 출신으로서 더 경솔한 거죠. 오바마 대통령도 취임 전에는 동성결혼 반대 입장이었어요. 다만 클린턴이 했던 'Don’t ask, Don’t tell' 정책은 고쳤죠. 클린턴은 대선 때 동성애자 입대를 허용하겠다고 했다가 당선되고 나서 입을 싹 닦았죠. 그리고 절충해서 만든 게 동성애자인지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Don’t ask, Don’t tell'이에요. 그래서 당시에 클린턴을 보좌하던 게이 비서관이 사표 쓰고 나와서 백악관 앞에서 시위했죠. 그 기조가 민주당 내에 이어지고 있던 걸 오바마가 깼어요. 클린턴이 멈춘 걸 오바마가 재선 때 동성결혼 합법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깨준 거예요.

이건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정치인이 위임받은 권력으로서 헌법의 기본권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갈등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 갈등을 얼만큼 잘 조정하고 약자 편에 서는가가 중요한 거죠. 우리는 한번 입장을 가지면 그걸 바꾸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마치 자기 존재가 다 무너지는 것처럼 인식하는데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대가 독재자와 열심히 싸워 이긴 건 높이 평가하지만 정작 민주주의가 체득화되지 않은 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기계적인) 객관성과 중립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기존 질서에 안주하겠다는 건 보수가 아니라, 보수도 못 되는 퇴행이죠. 보수는 그 자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점진적인 발전을 위해서 천천히 가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프랑스의 보수인 사르코지가 '동성결혼은 반대하지만 대신 팍스(PACS·동거 제도) 예산은 올려주자' 한 거요. 이게 보수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 안 하잖아요. 그건 극우예요, 파시즘이고.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는 거죠. 앞으로 대선에 나갈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해서 포용력을 가져야 하고 철학이 깊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신영복 선생이 얘기하는 '변방으로부터의 변화'죠.

그래서 저는 성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대한 답은 결국 정치세력화라고 봐요. 권력을 위임한 정치인들에게만 기댈 문제가 아니예요. 오바마가 동성결혼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도 미국 내 LGBT조직이 견고하기 때문이죠. 1달러부터 시작해서 고액까지 기부가 많아져서 조직이 커지고, 세력화돼서 정치를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거거든요. 한국에서도 성소수자들이 단체에 천원, 만원, 이만원, 매달 적극적으로 기부한다면 많이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좀 멀었죠.

- 기부액은 몰라도 기부자 수는 늘고 있지 않나요?
= 늘고 있죠. 그래도 다른 OECD 국가들에 비교하면 낮고,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것에 비하면 굉장히 낮죠. 프라이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긍정과도 연결되는 문제인 것 같아요. 한국의 동성애자들은, 특히 게이들은 자기의 시민권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게이바에 가서 노는 게이바 손님으로서의 소비자의 권리에 안주하고 있다는 표현도 많이 써요. 비꼬는 거죠. 노는 것도 좋지만 게이로서 시민권을 어떻게 획득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아마 게이바에 갖다주는 돈의 10%만 게이 레즈비언 단체에 기부한다면 대놓고 성소수자 지지하는 국회의원이 더 늘어날 것 같은데요? 반대쪽이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목사들이 조직해서 전화 돌리고 의원실 들어가서 괴롭히고, 당번 짜서 계속 들이닥치잖아요. 그게 어디서 오겠어요, 돈에서 오는 거죠. 내가 못하니까 인권운동가들이 할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운동'이에요.

- 언제쯤 동성 커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보세요?
= 아주 멀었지 않을까요? 미국에서는 성소수자 인권운동 70년 만에 동성결혼이 합법화 됐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이제 20년 됐으니까요. 동성결혼 등록이 거부된 걸로 소송을 건 사례가 김조광수 부부 이후로 없잖아요. 전 그게 더 큰 문제라고 봐요. 그런 케이스가 많아야 법원이 부담을 갖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데. 물론 동성애자들은 공개적으로 연애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더 어려운 건데, 그것도 결과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긍정하고 연결되는 거예요. 여기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죠. 자식이 범죄자라도 형량을 조금이라도 깎으려고 부모는 무슨 일이든 하곤 하는데 성소수자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부모로부터 버림 받는 것일까. 저도 커밍아웃했을 때 어머니가 돌변해서 창피하니까 나가라고 했으면 감당 못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최악의 경우에 자기 목숨을 끊는 경우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프라이드가 중요한 거예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 거죠.

저한테 '게이인 게 뭐 자랑이라고 떠벌리냐'는 메시지들이 와요. 전 자랑한 적 없는데요. 다만 창피하지 않다고 얘기한 것뿐이죠.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돼죠. 역으로 생각해봐요. 세상에 동성애가 정상이고 이성애가 비정상이어서, 남녀 커플이 길에서 눈치 보면서 손잡았다가 저쪽에 사람 오면 손 놓고 그런 모습이요. 입장을 바꿔보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둔감합니다. 동성애 공포증을 조장하는 건 소시오포빅한 범죄예요. 말로 사람을 죽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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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퀴어문화축제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올해에도 그럴까요?
= 저는 해마다 더 늘어날 거라고 생각해요. 1년에 한번 뿐이라 희소성이 높기도 하고, 또 아직은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그 외엔 없거든요. 게이바, 트랜스젠더바, 레즈비언바 간다고 희열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거긴 수다 떨러 가는 거지, 아니면 혹시 누구 만나볼 수 있을까 하고 가지만 그건 착각이고. 내가 존재하는 게 좋다, 기쁘다, 이런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곳은 퀴어문화축제 한 곳 밖에 없고 일년에 한번 열리기 때문에 규모는 더 늘어날 수 밖에 없어요.

-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긍정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 그렇죠. 그래서 희망이 있다고 보는 거고요. 가끔 신촌 거리 나가면 손 깍지 끼고 다니는 젊은 친구들을 봐요. 그러면 그래도 내가 인권 운동을 헛한 건 아니구나, 저렇게 몸소 실천하는 친구들도 있구나 싶어서 약간 흐뭇해지기도 해요.


6. 동성결혼과 결혼


- 개인적으로 결혼할 생각이 있으세요?
= 그건 나 혼자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고민하는 문제기도 해요. '내가 (결혼이라는 개념에 대해) 세뇌된 건가'라는 생각도 들어서요.

- 동거라도 법제화돼야 한다고 하셨는데, 한국은 남녀를 떠나서 동거 자체가 인정되지 않잖아요.
= 전 동성애, 이성애, 어떤 관계든 구별 없이 모든 동거는 팍스처럼 법제화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독신, 비혼, 이런 사람들까지도 세수 체계를 좀 다시 잡아줘야 한다고. 혼자 살면 비경제적이거든요. 그래서 그걸 타개하기 위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고요. 예를 들면 우리 둘이 친구인데, 한 집에 한 10년 같이 살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친권도 없고, 그래서 내가 아프면 보호자 역할도 못 해주고. 사회계약적 측면의 문제인 거죠. 꼭 동성결혼으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요.

- 비교적 흔한 시민결합과도 또 다른 제도여야 하겠네요.
= 그렇죠. 전 시민결합은 굉장히 좁게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걸 사회적 기본권 측면에서 봤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부양가족이 없는 사람들도 시민이잖아요. 차이나는 부분을 우대해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게 소외를 일으키면서 차별이 되면 안 되니까요.


7. 진보


- 마지막으로, 종교에서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과, 사회에서 '나와 다름' 혹은 '다수와 다름' 때문에 혐오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진보에 위협적일까요?
= 둘 다 위협적이지만, 비교하자면 종교 쪽이죠. 확신에 차 있으니까. 재론의 여지가 없잖아요.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이유로 죽었어요. 모든 문제를 선악의 대결로 가져가면 굉장히 위험해요. 인권운동도 종종 인권 문제를 선악의 문제로 바라볼 때가 있어서 함정에 빠질 수 있어요. 저도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증오심이 가득해지고 한 사람을 공격하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군인권센터에서 윤 일병 사건을 폭로했을 때 '악마를 보았다'는 식의 표현을 많이들 했잖아요. 그런데 이건 개인이 악마인 문제가 아니고, 그런 개인을 길러낸 군 시스템의 문제를 봐야한다는 거죠. 종교에서 우리를 악으로 규정하고 돌로 쳐죽일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그쪽을 악으로 보면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올해 퀴어퍼레이드 날이 조금 두렵기도 해요. 그날 (서울광장을 점거한 종교 단체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 때 내가 흥분하지 않아야 하니까. 그게 증오가 되면 선악의 대결이 되는 위험한 상황이 되니까요.

사진, 영상/ 이윤섭 비디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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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서울 퀴어문화축제의 아름다운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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