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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치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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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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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재원 (성원중 교사/실천교육 교사모임 고문)

우리 속담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다. 여러 종류의 치마가 있다면, 그중에서 모양이 제일 예쁜 것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겉모습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속담이다. 이게 꼭 우리 문화만의 특징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상 기능과 비용이 비슷한 선택 가능한 제품들이 앞에 있다면, 그중 예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품질을 가진 제품이 더 훌륭한 디자인까지 갖추고서 같은 가격일 수는 없다. 만약 가격이 같다면 성능이 조금 떨어지거나 즉 빛 좋은 개살구거나, 아니면 만드는 과정에서 주어야 할 누군가의 몫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빛도 좋고 맛도 좋은 살구도 나타난다면, 어김없이 생산자들의 대가 없는 초과 노동의 결과물이다.

은근슬쩍 이 속담의 의미도 바뀌었다. 원래 이 속담은 선택할 때 기능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미적 취향도 따른다는 의미에서 소비자의 행동을 통찰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생산자들의 초과 노동을 강요하는 말로 바뀌었다. 그 전에는 치마만 만들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 어느새 다홍색까지 들여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다홍색에 대한 보상은 없다. 다만 "이왕 했으면 다홍색도 들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치마보다 다홍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변덕스런 현대 사회 소비자들은 순간의 선택에 매달리지 어떤 상품을 오래 사용하지 않으니, 다홍색으로 일단 소비자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마 본연의 기능, 예컨대 입기에 편하고, 보온 혹은 통풍이 잘되고, 견고해서 쉽게 상하지 않는 것보다는 다홍색 물이 얼마나 잘 들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이걸 '다홍치마주의'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 곳곳이 이 '다홍치마주의'에 깊게 물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업 계획서의 생명은 정확한 내용과 비전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왕이면 다홍치마"가 붙으면서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사업 계획서는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발표의 생명은 주장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발표 내용보다는 발표를 드러내는 파워포인트의 화려함이 더 중요해져 버렸다. 핵심을 정확하게 단 한 페이지의 문서로 발표한 사람보다 책 한 권 분량의 계획서, 수십 페이지의 화려한 슬라이드 쇼를 보여주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 대접을 받는 지경이 되었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든 비결이 무엇이냐고 어느 일본인이 물어보자 "야근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저 많은 사람들이 야근까지 하면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거의 대부분 문서를 보기 좋게 꾸미고, 파워포인트를 멋있게 제작하느라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에서 일하다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사람이 한국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자 "파워포인트 좀 그만 만들어라."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 어느 대기업의 전문 경영인이 각종 보고서나 계획서를 작성할 때 표지를 생략하고, 내용을 두 페이지 이내로 하고 파워포인트 사용을 금지시키자 업무 효율이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중요한 건 치마이지 다홍색이 아닌 것이다.

아이들을 진실되게 길러야 할 교육까지 이 '다홍치마주의'가 어지럽히고 있다. 학생들의 '역량'이 아니라 학생들을 '역량 있어 보이게 하는' 각종 방법들이 비싼 돈에 거래되고 있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생활기록부에 학생의 역량과 인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학생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드는 꾸미기를 대놓고 요구하기도 한다. 능력, 역량이 아니라 볼거리라는 의미의 '스펙'이라는 용어가 거의 공식 일반명사로 사용되는 것 자체가 이 다홍치마의 병폐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학생들이 역량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스펙을 수집하고, 그 스펙마저도 직접 노력하여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실상 남의 것을 사서 꾸미는 곳에서 어떤 교육이 가능할까? 학생다운 문제의식과 정확한 탐구방법으로 간결하게 작성한 보고서보다 아무 의미 없이 참고문헌과 인용문으로 한껏 멋을 낸 두툼한 보고서가 상을 받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교육이 가능할까? 진학 때 제출하는 교사 추천서를, 학생에 대한 교사의 진실한 견해가 아니라 학생이 훌륭하게 보이게끔 꾸며주는 장신구처럼 생각하는 곳에서 과연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할까?

그런데 학생들이 이런 스펙질을 어디서 배웠겠는가? 이는 결국 학교의 책임이다. 학교 역시 실제 교육 역량을 키우고, 실제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보다는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다홍치마주의'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소통하고 교육 실천을 알차게 한 교사보다는 공문서와 보고서를 멋지게 작성하고, 공개 수업이나 발표회에서 내외빈에 대한 의전에 소홀함이 없는 교사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학생들에게 따뜻하고 진취적인 배움터가 되어 온 학교보다는 각종 특색사업 추진실적을 보기 좋은 책자로 잘 꾸며내어 놓는 학교가 우수 학교로 선정된다. 말하자면 학교도 교육 실천의 내용보다는 스펙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이 역량을 알차게 키우기보다는 스펙을 화려하게 꾸미려 드는 것도 나무랄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이오덕 선생은 학생들에게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면서 '글짓기'라는 말도 쓰지 말자고 했다.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글을 써야지, 어째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짓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 학교, 그리고 사회는 '글짓기'의 수준도 넘어 '글 꾸미기'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페이퍼 백이 많은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값비싼 양장본이 많이 나오는 우리나라 출판시장 역시 독자들이 책의 내용보다 모양을 보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이건 차라리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고, 그래서 역량의 계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만도 못하다. 그럴듯하게 꾸미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럼 잘못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가 온통 다홍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뭔가 잘못되고 있지만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찾아보기도 어렵다. 공교롭게도 요즘 중학생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화장들을 하고 다닌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입술을 '다홍색'으로 덕지덕지 물들이고 다니는 청소년과 어린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혁신은 먼저 학교에 짙게 물들어 있는 다홍색 물을 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 학교, 교사의 진실된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다홍색 물을 들이려는 일체의 시도를 반교육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특히 다홍색 물이 빠진 자리에 혹은 다홍색 물이 미처 빠지기도 전에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다홍색 물을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편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가 피우는 꽃 색깔이 예쁜 다홍색이라는 사실이 좋은 경계가 될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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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교육을바꾸는사람들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