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 첫 폭로 의사 "23살 학생이 무슨짓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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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넘게 지났지만)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하죠. 그런 사망 환자는 처음이었으니까.”

9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오연상내과의원’ 진료실에서 만난 오연상(60) 원장은 1987년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시신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이다. 현장에서 물고문을 직감한 그가 기자들에게 전한 ‘진실’은 역사적 흐름을 바꿔놓는 기폭제가 됐다. 최근 누적 관객수 400만명을 넘은 영화 '1987'에서 오 원장은 이제 막 서른살이 된 젊은 의사로 등장한다.

오 원장의 기억은 1987년 1월14일 오전 11시께로 거슬러 간다. 그가 일하던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차로 5분 거리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대학생 한명이 죽어가니 긴급 왕진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이 술을 많이 먹었는지 목이 탄다며 물을 달라고 해 주전자째 마시더니 호흡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어요. 형사들도 황급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형사들의 안내를 받아 대공분실 9호실의 문을 연 순간, 오 원장의 눈에 들어온 건 반대편의 하얀색 욕조와 바닥에 흥건한 물이었다. 오른쪽 낮은 평상에 속옷만 입은 채 누워 있는 박종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그 순간 형사들의 설명이 사실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오 원장은 이미 숨진 박종철을 상대로 30분간 심폐소생술을 했고, 그 뒤 형사들은 숨진 박종철을 경찰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날 오후 4시께 형사 하나가 다시 오 원장을 찾아왔다.

“사망진단서를 써달라길래 물었죠. ‘사망의 원인을 적어야 하는데 난 도저히 모르겠다. 직접사인, 중간사인을 전부 미상으로 쓸 거다, 그래도 좋으냐’고.” 사인이 미상이면 변사로 처리된다. 검사한테 부검을 청하는 꼴이다. 진단서를 써주고 얼마 뒤 오 원장은 자신의 진료실 옆 화장실에서 그를 찾아온 기자와 만났다. 그가 쓴 ‘사인 미상’이 기자의 눈에 띈 것이다. 기자는 진료실 앞을 ‘감시하던’ 형사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어요. 남영동 갔었느냐, 그렇다. 학생이 죽은 게 사실이냐, 그렇다. 그렇게 사실 확인만 하고 급히 돌아가더라고요.” 다음날 중앙일보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란 제목의 짧은 기사가 실린다. 영화 '1987'은 중앙일보의 최초 보도 이후 후속 취재를 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오 원장이 만난 것으로 설정을 바꿨지만 오 원장의 기억은 달랐다. 오 원장은 그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다음날 오전 30여명의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 오 원장을 감시하던 형사의 제지도 소용이 없었다. ‘물고문’이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오 원장은 자신이 아는 ‘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적극 알렸다. ‘욕조가 있었고 박종철군도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젖어 있었다. 뱃속에 물이 많이 들어갔는지 촉진해보니 꿀렁꿀렁하더라. 바닥도 물 천지여서 입고 간 가운이 흙탕물에 젖어 빨아야 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가능한 데까지 모두 말하자 생각했어요.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직접 얘기할 순 없으니 뭐든 물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거죠. 예컨대 ‘삽관하고 들어보니 수포음(폐포 내 울혈에서 나는 소리)이 들리더라’ 이런 얘기도 했는데, 사실 그건 물고문과 관계없는 의학용어였어요. 다만 비전문가가 들으면 물과 관련돼 있다 생각했을 겁니다.”

마침내 ‘고문치사 기사’가 나간 뒤, 오 원장은 24시간 검찰 조사를 받고 다시 신길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16시간 동안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사건이 마무리된 뒤, 오 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누구나 각자 경험으로 깨달은 윤리를 갖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야겠단 생각도 있었고 직업윤리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23살짜리 학생이 뭔 나쁜 짓을 했다고 이렇게 고문을 해서 죽였나 싶었죠. 그런 게 화가 났었죠.”

오 원장의 병원 한쪽 벽면에는 ‘1987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주는 제1회 인권상 수상’이란 그의 경력이 짧게 쓰여 있었다. 최규진 건강과대안 연구위원(인하대 의대 교수)은 “1987년 당시 역사의 물꼬를 트는 가장 결정적 계기가 바로 오연상의 신념 어린 증언이었다. 그 증언의 무게가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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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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