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 소리상표 첫 등록...개그맨들 ‘유행어 권리장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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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자. 요즘 최고의 유행어인 “스튜핏” “그레잇”을 활용해 전문 성우가 김생민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라디오 광고를 녹음했다. 청취자들은 김생민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할 정도다. 김생민이 출연하지 않았지만, 김생민이 나온 효과를 낸다. 이럴 경우 광고 제작사는 김생민한테 사용료를 지급해야 할까, 하지 않아도 될까.

개그계의 오랜 화두였던 유행어의 상업적 이용에 대한 권리 보장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눈길을 끈다. 개그계의 선배 격인 김대희와 김준호가 지난 11월16일 파이특허법률사무소와 함께 유행어를 소리상표로 등록받아 지식재산권으로서 보호에 나선 것이다. 소리상표는 상품의 출처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소리’에 상표권을 부여한다. 에스케이텔레콤의 징글(브랜드 로고처럼 쓰이는 짧은 음악) ‘딩딩디리리~’ 등 통신사 고유의 연결음 등이 소리상표로 등록되어 있다. 파이특허법률사무소 조민정 변리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유행어는 단어 자체보다는 톤이나 억양 등으로 특정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소리상표로 인정이 됐다”고 말했다. 소리상표는 우리나라에 2012년부터 도입됐는데, 유행어가 등록된 것은 처음이다.

■ “케어해 주쟈나” “밥 묵자” “쌩뚱맞죠” 등 첫 유행어 소리상표 등록

현재 소리상표로 등록한 유행어는 4가지. 김준호의 “케어해 주쟈나”와 김대희의 “밥 묵자”, 컬투의 “그때그때 달라요”와 “쌩뚱맞죠”다. “케어해 주쟈나”는 '개그콘서트'- ‘뿜엔터테인먼트’(2013년), “밥 묵자”는 '개그콘서트' - ‘대화가 필요해’(2007년), “그때그때 달라요”와 “쌩뚱맞죠”는 '웃음을 찾는 사람들' - ‘그때그때 달라요’(2004년)에서 사용됐다. 이미 한차례 유행이 휩쓸고 지나간 말들이지만, 김준호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유행어가 소리상표로 인정될지 여부를 알 수 없어서 일단 선배들의 상징적인 유행어로 등록을 시도했고, 이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넓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행어와 함께 박나래가 집에 바를 설치하고 부르는 ‘나래바’는 문자상표로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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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상표로 등록된 유행어를 상업적으로 사용할 경우 일정 금액의 사용료를 내야 하고, 무단 도용하면 권리를 갖고 있는 개그맨들이 법적 제재에 나설 수도 있다. 소리상표는 저작권과 달리 상표법에 규정된 각 상품분류에 따라 분야별로 각각 등록해야 하는데, 현재 엔터테인먼트업과 광고업에 등록했다. 특히 개그맨들은 성우들이 성대모사까지 하며 유행어를 따라하는 라디오 광고로 막대한 손해를 봤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소리상표 등록도 라디오 광고의 피해를 막는 것이 첫번째다. 김준호는 “인형이나 이모티콘에 유행어를 음성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김대희는 “시청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재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기업이나 업체에서 광고를 통해 상업적인 용도로 무단으로 사용할 경우에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민정 변리사는 “사례가 없어서 어디까지 침해가 인정되는지 세세하게 특단하기는 어렵다. 판례가 정립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며 “개그맨들의 권리와 침해에 대한 제재장치가 생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내가 만든 유행어 수출하고도 한푼 못 받는 현실

사용료 수익 문제를 떠나, 개그맨들은 유행어에 대한 권리가 인정됐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한겨레'와 통화한 개그맨들은 모두 “내 아이디어를 내 것이라고 인정받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개그맨들은 1주일 내내 밤낮없이 꼭지(코너)를 짜고 유행어를 만드는 등 노력해왔지만, 결과물에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2014년 한 기업이 ‘뿜엔터테인먼트’ 포맷을 무단으로 광고에 사용하는 등 티브이나 라디오에서 개그맨들의 아이디어가 상업적으로 도용되는 일이 허다하다. 2006년 김미려의 소속사가 '개그야'(문화방송)에 나온 “김 기사, 운전해 어서~”라는 유행어를 무단으로 사용한 업체에 항의해 광고를 중단시킨 일은 있었지만, 대부분 권리가 없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2015년 '개그콘서트'와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중국에서 리메이크된 것에 대한 수익도 방송사가 모두 가져가고 개그맨들은 한푼도 받지 못했다. ‘시청률의 제왕’, ‘생활의 발견’, ‘달인’ 등은 한국 포맷을 중국 개그맨들이 그대로 사용했고, 한국 개그맨들이 현지로 건너가 노하우 전수까지 했다. 당시 리메이크에 참여했던 한 개그맨은 “돈을 떠나 어떤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는 게 슬펐다”고 말했다. '한국방송' 쪽은 당시 “코너가 방송을 타면 모든 권리가 방송사에 귀속된다”고 말했지만,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조차 방송사가 만든 노래의 음원 수익을 적게나마 가수한테 분배한다. 김준호는 “그동안 개그맨의 창작물에는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무단 도용해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며 “특허청에서 인가를 받아 이제 유행어에 대한 산업재산권이 인정된 것이 값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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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는 유행어를 소리상표로 등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계적인 명성의 링 아나운서 마이클 버퍼가 권투 경기를 앞두고 하는 말인 “레츠 겟 레디 투 럼블”(싸움을 즐길 준비를 합시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1992년 소리상표로 등록했다. 버퍼는 이 멘트 하나로 약 25년간 무려 4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고유 멘트가 허락도 없이 상업적으로 사용되자 상표 등록을 했다. 미국 영화사 엠지엠(MGM)의 사자 울음소리도 등록됐고, 일본 게임인 ‘슈퍼마리오 시리즈’의 동전 소리 효과음은 2016년 2월10일 소리상표로 출원됐다. 일본의 유명 개그 기획사인 요시모토흥업의 김진중 한국사무소 실장은 “저작권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본의 경우 개그맨들의 위상이 높고 기획사가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개그맨들의 개그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 개그도 창작물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유행어에 대한 창작가의 권리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한 개그맨은 “유행어는 많이 사람들이 써야 ‘유행어’가 되는데, 사용료를 받게 되면 아예 사용하지 않으려고 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유행어는 주로 라디오 광고에서 많이 활용하는데, 흉내를 잘 내는 성우를 섭외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개그맨의 가치를 낮게 보는 시선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법적 제재가 좋은 방향으로 흐를지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유행어에 대한 권리가 누구한테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유행어 대부분이 티브이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개그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한 예능 피디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꼭지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작가나 피디 등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가 보태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구 한명의 것으로 규정짓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개그맨들이 직접 짠 개그로 여러 방송사에 출연하고 공연하기 때문에 아이디어에 대한 권리는 개그맨에게 있는 게 명확하다. 조민정 변리사는 “유행어는 개그맨 특유의 어조와 억양, 톤 등의 소리적 특징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에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맞다. 창작 과정에서 제작진이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다면 방송사가 이의 제기를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유행어는 개그맨 개인의 지적 재산”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참작하더라도 개그맨이 노력으로 만든 창작물에 대한 권리는 인정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컬투가 한때 유행어의 저작권을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한 문장 정도의 문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되지 않는 등 여러 이유로 창작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2012년 소리상표가 도입되면서 유행어의 가치도 인정받게 됐고, 이제 그 시작점에 섰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창작자의 권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해야 개그맨의 위상도 높아지고 우리나라 코미디 수준도 향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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