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롬복 공항 72시간..."마른 하늘에 화산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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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휴양지 발리섬의 동북쪽 아궁산에서 화산재 분출 등 화산활동이 강화돼 현지 당국이 폭발 위험단계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했다. 발리 동쪽의 롬복 국제공항에 이어 이날 발리 응우라라이 국제공항(덴파사르 공항)도 잠정 폐쇄돼 6만명 가까운 관광객들 발이 묶였다. 외교부는 “발리 동쪽에 위치한 롬복에 우리 국민 20여명이 관광 목적으로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20여명 가운데 휴가차 가족들과 발리를 찾은 정유경 <한겨레> 정치팀 기자도 포함돼 있다. 그는 현재 방송사 기자인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롬복 공항에 발이 묶여 있다. 두 아이를 챙기며 틈날 때마다 휴대전화로 현장 소식을 보내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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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복 공항에 몰린 관광객들

26일 오전 10시 : 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니 화산이라니

“화산이 폭발해서 발리 공항이 문을 닫는다고요?”

티비엔(TVN) 예능 프로그램인 '윤식당'으로 유명해진 길리 섬의 한 리조트에서 26일 아침 10시 체크아웃하는 중이었다. 역시 체크아웃 중이던 다른 한국인 가족이 “지금 나가도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하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얄궂게도 길리의 하늘은 티없이 푸르러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화산이라니?!

그들은 이날 길리에서 발리 누사두아로 향하는 일정이라 현지 소식을 확인했다고 한다. 화산재로 인한 비행중 사고 우려로, 발리 공항은 대거 결항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섬들로 이뤄진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도 발리와 롬복은 바로 곁에 자리한 이웃 섬이다. 롬복에 딸린 작은 섬 중 하나가, 바로 익히 알려진 윤식당의 촬영지인 길리 트라왕안 섬이다. 악천후 등으로 발리 공항이 폐쇄됐다면, 롬복 공항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다.

26일 정오: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마음을 졸이며 2시간여 배와 버스를 갈아탄 끝에 도착한 롬복 공항에선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짐을 부치러 카운터로 들어가자, 오후2시 55분 자카르타로 향하는 가루다 항공은 ‘캔슬’됐다. 반면 저가항공인 바틱 에어(라이언에어)는 용감하게 오후 2시께 비행기를 띄웠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팀을 나누어 가루다 인도네시아 사무실에 가서 가장 빠른 비행기 표로 바꾸는 줄에 합류하고, 다른 한 조는 바틱 에어 사무실 창구 줄로 달려갔다. 줄을 섰다기엔 좀비들이 마구 달려드는 영화 '월드워Z'의 한 장면과 유사했지만, 3시간 만에 가루다 항공 직원과 대면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줄이라고 부르겠다. 그는 말했다. “여기서 표 교환 안돼니 수속 카운터로 가세요. 여긴 환불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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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 사무실에 몰린 사람들

아까 수속 카운터에서 표 교환은 항공사 사무실 가라고 했다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그래서 ‘나한테’ 화내는 거야?” 하고 도리어 화를 냈다고 한다.

실랑이 끝에 결국 가루다 항공 직원은 저녁 비행기 표로 바꿔줄 수는 있지만, 그 비행기도 취소되면 또다시 와서 교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바틱에는 그날 저녁 표가 있으나, 현금결제만 가능하며, 5시간 전에 취소해야 50%를 돌려주고 그 이후엔 환불 불가란다. 계산해보니 결제하면 75만원은 무조건 날아간다. ‘가루다가 운항을 재개할 수도 있는데...’ 고민하고 있는데, 오후 4시께가 거의 다 되어 갑자기 사람들이 바틱 에어 사무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루다가 그날 운행을 모두 접기로 했다고 한다.

75만원이 날아가더라도 결제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잠시 후 그 고민도 ‘사치’가 돼버렸다. 이어 공항이 폐쇄된다는 이야기가 건너건너 전해졌다. 즉 바틱 에어도 못 뜬다. 이 모든 과정이 전광판 알림이나 방송 메시지 따위 없이 전부 줄 같지 않은 줄을 선 사람들과 직원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사람들을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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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복 공항 항공사 카운터에 몰린 사람들

아궁 화산에서 50여킬로미터 떨어진 발리 공항은 26일 항공사 결단으로 부분 결항했을 뿐 공항 전체가 문을 닫지는 않았는데, 화산에서 100여킬로미터 떨어진 롬복 공항은 왜 전부 문을 닫는가? 바람의 방향이 화산재를 동남동향으로 날리고 있어, 인도네시아 교통국이 오후에 화산재가 롬복 공항 상공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측했다는 것이었다!

화산재가 비행기 엔진에 들어가면 최악의 경우 엔진이 멈춘다고 한다. 이 정보도 물론 그날 저녁 <아에프페>(AFP) 등 외신을 통해 접한 것이다. 이때 그냥 차라리 배를 타고 발리로 가서 비행기를 아무거나 잡아타는 게 빨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곳은 ‘만약에’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정말 이날 발리로 갔다가 다시 롬복으로 돌아온 스페인 사람을 만났는데, 거기도 다음날 공항이 닫는 바람에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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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복 공항에서 기약 없이 항공 운항 재개를 기다리는 사람들

26일 오후 5시 : 아이들은 공항 먼지를 온몸으로 쓸었다

모두 지쳤다. 아이들은 시골 버스 터미널 같은 롬복 공항의 먼지를 온몸으로 쓸었다. 두 개뿐인 커피숍은 만석이었다. 일단 공항에서 800미터 거리에 있다고 하는 호텔을 잡았다. 택시 기사는 바가지를 씌웠다.

호텔은 최신식 시설이라며 평점이 후한 곳이었다. 방문을 열자 도마뱀과 십여 마리의 작은 바퀴벌레가 반갑게 맞아줬다. 인지력을 지닌 뒤 처음 본 곤충이 여름 매미였던 두돌 아들은 벌레를 볼 때마다 신이 나서 ”매미~” 라고 외쳤다. (아들은 모기도 매미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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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아침 7시: 출근 해야하는데...

비좁은 더블 침대 하나에서 네 식구가 떨어질라 조마조마하게 잠들었다. 약오르게도 창밖 날씨는 좋았다. 비행기가 꼭 뜰 것 같았다. 자카르타 환승에 이틀 정도 넉넉한 여유를 뒀기 때문에 한국에 제시간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공항에 전화하니 롬복 공항 폐쇄는 풀렸고, 발리 덴파사르행만 운행 불가라고 했다. 이번엔 발리 공항이 폐쇄된 것이다. ‘출근도 해야 하고, 아이들 어린이집도…지금 이런 걱정할 때가 아닌데…” 공항에 대기하고 있는 다른 일행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다.

저녁 비행기까진 시간이 넉넉해 편도1시간 거리에 있는 마트도 다녀왔다. 하지만 가루다는 화산 폭발 이후 지금까지 한편도 비행편을 띄우지 않았다. 어쩐지 이 체류가 길어질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기저귀와 아이들이 먹을 주스와 과자를 넉넉히 샀다.

택시 기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압둘이라는 이름의 택시 기사는 “어제보다 아궁 화산의 연기가 커졌다. 여기 롬복에서도 볼 수 있다. 이번 폭발은 클 것 같다. 100년 전 분출 때도 롬복에서 그 연기를 볼 수 있고 소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내 할머니가 그때 발리에서 피난을 와 롬복에 정착했다. 당시 발리 사람들이 많이 롬복에 왔고 힌두교 신전이 많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바람의 방향이 롬복으로 불지만 않는다면 여기는 안전할 것이다. 100년 전에도 이곳은 안전했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서 문제지만…”이라며 위로했다.

27일 정오: 애들은 누가 봅니까?

우리 부부는 각자 회사에 넌지시 상황을 전했다. 여행 온 일행 중 한명은 사교육 종사자였다. 수능이 일주일 미뤄지며 출국 전날까지 고3들을 봐주고 간신히 나왔는데, 기말고사 준비를 봐줄 수 없게 됐다. 다른 일행은 팀장이 왜 하필 이럴 때 휴가냐며 만류(?)하는데 “8개월 전부터 예약한 것”이라며 뿌리치고 나왔다고 한다.

남편도 방송사 기자인 우리 부부는 좀 더 다른 압박에 시달렸다. 방송국에서는 미안해하면서도 8시 뉴스 전에 공항 영상을 요구했다. 방송국 온라인팀은 카드뉴스를 만들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신문사에서는 5시 마감 지면을 비워놓겠다고 했다. 둘 다 기사를 만들면... 애들은 누가 봅니까?

27일 오후 4시: 뉴스에 나왔다

가루다 항공 취소 문자가 왔다. 일행 일부는 공항으로 뛰어갔다. 뭐든 표를 구하기 위해서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약을 하더라도 결제가 안되니 사무실로 현금을 들고 뛰어야 했다. 항공사는 카드도 해외송금이체도 받지 않았다. 온라인 결제가 되는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가루다 항공 사무실에 다시 줄을 서 수요일 비행기표로 바꾸었다. 간혹 출발한다는 바틱 에어(라이언 에어 계열사다) 표는 백방으로 뛰어도 구하지 못했다.

이제는 27일 자정께 예정이던 인천행 아시아나 비행기를 연기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일행 9명의 예약번호를 일일이 불러 모두 바꿨다. 각자 회사에도 알렸다. 딱 하나 성과는 있었다. 남편은 공항에 간 김에 영상을 찍어 보내고 멘트도 따서 8시 뉴스 리포트를 내보냈다. 마트에서 급하게 산 셔츠 한벌 비용은 매몰 비용이 됐다.

27일 자정

공항 앞 호텔이 점점 북적거렸다. 일행 한명은 미친듯한 새로고침 신공을 선보이며 밤새 바틱 에어 취소표가 한두장씩 나올 때마다 예약을 걸었다. 예약하고 송금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예약이 취소되기 때문에 나오는 표가 있었다. 고마운 현지 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찌저찌 한밤중 송금을 마치고 29일 저녁발 비행기 3개에 나눠 타는 조합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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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복 공항 로비에 드러누운 관광객들

28일 새벽 4시

나와 일행 1명이 공항으로 뛰어갔다. 새벽3시에 오전 11시 30분발 바틱 에어 비행기표 3장이 갑자기 등장했다. 1시간 내로 현금을 치르고 확정을 받아야 했다.

전날 사무소 직원은 자신들이 새벽 4시에 다시 출근한다고 했다. 4시 공항은 놀랍게도 사람들이 있었다. 6시 비행기를 타려는 이들 또는 예약을 확정하려는 이들이다. 그리고 직원들은 없었다.

우리는 종이를 깔고 출국장 앞에 앉았다. 뒤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인터내셔널 하소연이 이뤄졌다. 중국,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호주, 미국... 이탈리아 여성이 투덜댔다. "얘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아. 전광판을 봐, 아무 정보도 없어!"

5시 직원들이 들어갔다. 6시 출국장 입장이 허용됐다. 미친듯이 뛰어 바틱 에어 2번째로 줄을 섰다.

하지만 오전 11시30분 표는 이미 날아갔다. 더블부킹 몇개를 취소하고 환불 50%를 날려가며 세팅을 마쳤다. 오후 4시 30분, 저녁 6시 55분, 8시에 각각 흩어졌다. 우리 네 가족도 2석씩 다른 비행기를 타게 됐다. 확률상 바틱 에어의 저녁 비행기는 6시 이후 거의 취소됐다. 다시 로또를 빌어야한다. 가루다는 올 캔슬이다. 이제 가루다는 기대도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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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 사무실로 계속 몰려는 사람들

28일 오전 10시

28일 오전 6시 롬복 공항은 운영을 재개했다고 뉴스는 보도했다. 8시 화산이 재분화했다. 발리 공항은 29일까지도 폐쇄가 결정됐다. 당국에서는 발리에 발이 묶인 이들에게 롬복 등으로 배를 타고 이동해 비행기를 타라고 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롬복에서도 공항 문이 열렸다고 비행기가 뜨는 것은 아니다. 호텔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이 9시 30분 바틱 에어 수라바야 행 말고는 오전에 다 결항됐다고 알려왔다. 호텔은 점점 붐볐다. 객실 하나는 더 연장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28일 오전 11시

수라바야까지 배와 차량, 기차로 이동한 뒤 다시 비행기를 타는 코스를 추천받았다. 최단시간을 상정해도 1박2일의 대장정이다. 두돌, 다섯살, 여섯살 아이들과는 무리였지만 심각하게 고심했다. 대규모 분화가 이뤄지기 전 일단 화산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는 게 나을지 고민이었다.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아궁 화산의 연기는 롬복에서도 보였다.

택시기사인 Jaelani abdul kadir 가 창 밖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저기 연기 보여? 어제보다 더 커졌어. 1963년 아궁 화산이 터졌을 때 우리 할머니가 발리에서 롬복으로 피난을 왔어. 그때는 화산이 터지는 소리가 롬복까지 들렸대." 그는 덧붙였다. "그때도 롬복은 안전했어. 발리 사람들이 다 롬복으로 피난와서 그 뒤 여기도 힌두교 사원이 많이 생겼지. 화산재만 이쪽으로 날리지 않으면 돼,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다고 하니 아마 비행기도 뜰거야."

28일 오후 3시

마침 일행 중 공항 상주팀이 2시 15분 바틱에어부터 다시 뜬다고 낭보를 알렸다. 4시30분 비행기 팀은 여차하면 더 빠른 비행편 예약도 해보고 최대한 흩어진 일행들을 한 비행기로 모으기 위해 오전부터 공항에 상주중이었다. 상주자는 카톡으로 타전했다. "어제보단 사람들이 질서가 있다." 고립 3일째, 월드워z의 세계도 룰이 잡히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쩐지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 72시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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