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옷 입고 활짝 웃는 독재자...이것은 ‘풍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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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도 요즘 팝아트나 키치 예술이 유행하는 걸까?’ 2013년 북한의 한 건축물 도록에 나온 ‘김일성 주석 천연색 입상’을 국내 미술인들이 본다면 대부분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입상은 웅장하고 비장했던 지금까지의 김 주석 동상과 전혀 다르다. 김 주석은 혈기 넘치는 젊은이로 묘사된다. 새파란 하늘에 불꽃이 펑펑 터지는 광경이 묘사된 벽화를 배경으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김 주석은 하얀 상의, 검은 바지의 군복 차림으로 웃으면서 손을 들고 서 있다.

입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컬러로 채색됐다. 권위를 내세운 영웅상의 조형적 특징인 흑백톤이나 금속성 느낌이 거의 없다. 서구 미술관에 전시했다면, 북한 권력자를 소재 삼아 풍자한 현대미술품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2012년 권력 전면에 등장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핵 도발로 국제정치판을 뒤흔들고 있지만, 북한의 시각문화 영역에도 심상치 않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조각사의 상식을 뛰어넘는 컬러 조형상을 창안해, 김일성·김정일 신격화를 대변해온 영웅 풍모 동상들을 대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북한 근현대미술 전문가인 박계리 홍익대 연구교수는 최근 내놓은 ‘특이한 북한의 지속 가능성과 미술의 역할’이란 논고에서 김정은 등장 뒤 북한 기념물 조각의 변화 양상을 처음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2017 서울 도시건축비엔날레 ‘평양 살림’ 전시의 딸림행사로 지난 1~2일 열린 북한 문화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이다. 박 교수의 논고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북한 현대미술의 단면을 뜯어본다.

■ ‘젊음’ ‘웃음’ ‘천연색’이 새 유행으로



북한 기념상의 변화 조짐은 김정은 위원장의 권력 장악 뒤인 2012년, 부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정을 점퍼 차림에 환하게 웃고 있는 태양상으로 만들게 하면서부터 나타났다.

이후 2013년 7월 평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의 중앙홀에 들어선 ‘김일성 주석 천연색 입상’은 김정은 시대 특유의 컬러기념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떠올랐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 당시 마흔줄에 들어선 김일성 주석이 평양 전승광장에서 환호에 답례하는 사진과 흡사하지만, 훨씬 젊게 얼굴이 묘사됐다. 북한 정권은 각종 선전매체 등에서 이런 컬러상을 ‘색 조각상’이라고 호칭해왔다. 이 ‘김일성 주석 천연색 입상’은 김정은 시대 창안한 색 조각상의 시초로 꼽힌다. 일본 총련 월간지 '조국'(2014년 2월호)에는 2013년 6월 김정은 위원장이 만수대창작사의 대리석 입상 제작장을 찾아가 “모자를 쓰시지 않은 주석님 상으로 하되 채색상으로 해보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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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문수물놀이장 중앙홀에 들어선 김정일의 컬러석고입상. 파도치는 원산 명사십리 해변을 배경으로 점퍼를 입고 웃는 김정일의 생전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입상을 시작으로 평양에서는 색 조각상 제작이 이어지고 있다. 2013년 10월엔 평양 문수 물놀이장(풀장)이 개장했는데, 중앙층 정면에 김 위원장의 아버지 김정일의 천연색 석고 입상이 들어섰다. 원산 명사십리 푸른 바닷가를 배경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점퍼 차림으로 앞을 보며 웃는 모습을 컬러상으로 형상화했다. (위 사진)

뒤이어 김정은 위원장은 2015년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태양궁전에 놓였던 부자의 대리석 입상을 교체하기에 이른다. 근엄한 표정을 지었던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입상을 치우고, 아침노을 같은 조명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양복 차림의 할아버지와 점퍼를 입고 있는 아버지의 상으로 바꾼 것이다. (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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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아닌 조각상이다. 흰색 대리상이었다가 2015년 사실적인 색조 조각상으로 바뀐 만수산 기념궁전의 김일성-김정일 부자 조각상.



2016년엔 만수대 의사당에도 역시 웃는 부자의 채색입상이 등장했다. 박계리 교수는 “김일성 상의 경우 70대 노령의 기존 수령 입상에다, 현재 김정은의 연령대에 맞는 젊은 20~30대 나이의 김일성 입상을 새 양식으로 추가하면서 두가지 갈래로 나뉘어진 것이 주목된다”고 짚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젊어진 김일성 동상에 자기 이미지를 결합시킨 것으로, 권위적 기념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는 분석이다. 본래 수령상 이미지는 하나만 본보기로 삼는데, 김정은 등장 뒤 노년·청년상의 파격적 분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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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거대한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 과거 김일성·김정일 정권 시대의 숭엄한 수령상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새롭게 창안한 ‘색 조각상’의 의미

김일성과 김정일이 알록달록한 색조 속에서 젊은 용모로 변신하거나 한결같이 함박웃음을 짓고있는 ‘색 조각상’의 형상화는 외부적 시선에서 볼 때 낯설고 기묘하게 비친다. 김일성, 김정일의 기념상 하면 국내 언론매체에도 숱하게 보도된 것처럼,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거대하고 경직된 모양의 김일성 동상을 흔히 떠올리게 마련인 까닭이다. 사실, 밝은 표정의 색 조각상은 전통적인 북한 동상과는 정면 배치된다. 영도자인 수령을 사실상 신격화하는 북한 주체사상론의 측면에서도 영웅의 품격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의 선전물과 '조선예술' 등의 문예잡지 등을 보면, 기존 기념상 조각은 ‘수령 형상 창조이론’의 틀 속에서 제작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정일의 ‘수령 형상 창조이론’에 따르면, 수령 형상은 정치적 영도자로서의 권위가 강조되었으며, 근엄한 표정을 통해 범접할 수 없는 ‘숭엄함’을 표출하는 것을 가장 중시해왔다.

박 교수는 “이와 달리 김정은 시대의 색 조각상에선 김정일 시대 강조되던 ‘숭엄’의 의미는 희석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생동감’이 더 강조되고 있으며, 이런 미학적 취향이 김정은 시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등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전국적으로 이런 동상 교체 작업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권력 전면에 나서기 전이지만, 2011년 2월 현지지도에서는 “수령을 근엄하게 형상화하여야 한다는 종래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환하게 웃고 계시는 태양의 모습으로 위대한 장군의 태양상을 형성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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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에 걸려있는 채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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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주재 유엔 북한 대표부에 걸려있는 채색화



■ 사회주의 문명 강국이라는 통속적 환상

김정은 시대 이후 북한의 색 조각상들은 석고나 ‘쥬라늄’ 원료에 유화나 아크릴 안료로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박계리 교수는 논문에서 소개했다. 이런 색채 사용은 서양미술사에서 18~19세기 계몽시대 이후 공공조각 제작에서 금기시됐던 것들이다. 중후한 대리석의 매끄러운 표면은 단순한 순수를 표현한 반면, 채색은 열등하게 간주되는 인간의 오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낮춰 봤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엔 조각과 색채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뿌리내렸고, 지금도 이런 인식이 조각상 제작의 근본적인 지침으로 자리잡고 있다.

당연히 서양미술사의 시각으로는 색 조각상이 시대착오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관점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들은 선전매체·간행물 등을 통해 이 영웅적 조각상들이 인민들에게 와닿는 특유의 진실성, 친밀함, 생동감을 지녔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진실성을 추구한다지만, 북한의 색 조각상은 서구 현대미술 조류인 극사실주의와도 차별화된다. 북한 공예작가들은 극사실주의 조각에 필적할 만한 제작 기술을 갖고 있지만, 그런 기법을 색 조각상에는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김일성, 김정일 상은 사실적이지만, 그대로 떠옮기는 묘사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표정과 자태 등에서 ‘숭엄함’이란 기존 북한 기념상의 요소도 함께 갖추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논고에서 눈여겨보는 건, 색 조각상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통속성의 미학이다. 김일성 주석의 천연색 입상 배경에 그려진 폭죽 터지는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환상적인 배경과 함께하는 색 조각상들은 디즈니랜드에 세워진 미니어처 같은 인상을 준다.

박 교수는 통속성과 환상성을 결합시킨 사실주의 색 조각상엔 김정은 정권이 ‘사회주의 문명 강국’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낭만적인 착시 현상을 만들어내려는 정권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짚는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런 파격을 줄곧 시도하면서, 21세기 변화한 감수성을 지니게 된 인민들에게 권위적 면모를 벗고 새 시대를 여는 젊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으려 한다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낙원의 환상처럼 보일 물놀이장, 과학자 거리 같은 대규모 건축 공간을 계속 지으면서 사회주의 문명국이 도래하고 있는 것처럼 과시하려는 시도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사진 '조선예술', '천리마' 등 북한 매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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