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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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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선-나의 섹슈얼리티 기록
홍승희 글·그림/글항아리·1만5000원

“한 여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혹은, 쩍 갈라져 비로소 열릴 것이다. 최근 몇년 사이 한국 사회가 뮤리엘 루카이저(미국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의 저 말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림 그리고 글 쓰는 페미니스트 홍승희 작가의 첫 책이 나왔다. 섹스, 성폭력, ‘임신중절’(임신중단), 성노동, 데이트 폭력/강간, 비혼, 비출산 등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날것의 치열한 언어로 기록된 <붉은 선>. 책 제목은 저 모든 것이 여자가 밟으면 안 되는 붉은 선, 금기라는 점을 지시한다. 그러나 “사실은 누군가가 멋대로 쳐놓은 허술한 실타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또 한번 일깨운다. 지은이의 작품인 표지그림(‘붉은 선 위의 비체’)에서 붉은 선은 응어리진 생리혈처럼 힘없이 구불구불하다. 책엔 작가의 그림 29점이 실렸다.

이 책은 성 역할극을 폭로하는 여성의 목소리다. 남성은 폭력과 지배, 여성은 의존과 순종을 연기하는 섹슈얼리티 역할극. 삽입 위주의 페니스 중심 섹스, 대부분 여자의 문제가 돼버리는 피임과 임신중단, 이성애에 기반을 둔 일대일 연애와 결혼, 침대에선 요구받고 광장에선 혐오받는 여성성에 대한 이중잣대 등 성 역할극의 허구를 직시한다.

여성이 ‘여성의 몸’에 일어난 일을 말하는 일은 왜 중요할까. 책이 출간된 사이 인도를 다녀와 현재 포항 바닷가 집에 머물고 있는 지은이는 <한겨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여성의 글쓰기, 말하기는 ‘내 몸이 나’라고 외치는 일이다.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 억압과 부조리는 몽땅 몸에 새겨지는데, 이걸 들여다보지 않고 어떻게 나의 미래, 인권, 민주주의, 정의가 있겠나. 자기 몸의 이야기를 쓰는 건 억압의 족쇄를 풀어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몸과 섹스 이야기는 넘치지만 그걸 말해온 사람은 남자였다. 그래서 이야기들이 천편일률적이다. 하다못해 핸드폰 케이스도 다양한 세상인데.”

지은이는 임신중단 수술을 한 뒤 부모 뒤에 숨어서 성노동 경험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전 애인, 섹스 중 허락도 없이 콘돔을 빼는 남자, 성노동을 하면서 만난 남자들의 유형, 애인의 애인까지 존중하는 비독점적 다자연애 등을 서슴없이 밝힌다. 이런 얘기를 불편해하는 시선이 있을 것이다. ‘뭘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실 대부분의 여자는 말 안 해도 안다. 나와 같을 당신이 “독방”에 갇히지 않길 바라니까. 지은이 역시 “분노와 허무, 열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용기가 된다고 했다. 그 벗 가운데 페미니즘 에세이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동녘)의 작가 홍승은은 지은이의 친언니이기도 하다. “사람이 곁에 있으면 누구든 두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 한 사람이라도요.”

그는 몸이 느끼고 몸에 남은 흔적을 기록한다. 그래서 의식을 감각에 갖다대는 역류하는 힘이 글에 있다. 의식이 감각을 관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억압받아온 몸의 감각을 벗고 고유한 몸의 감각을 되찾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인도에서 국적, 나이, 성별, 언어가 다른 사람 60명이 두 줄로 마주 보고 길을 만들었어요. 한 사람씩 눈을 감고 지나가는데, 손과 어깨 등을 만지면서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안내해줘요. 울컥할 만큼 감격이었어요. 피부는 모든 차이를 잊고 교감할 수 있는 강력한 촉수예요.” 지은이는 주인 된 자기 몸을 찾고 목소리를 내게 도와준 다른 여성들로 <성노동-성의 정치경제학>을 쓴 멜리사 지라 그랜트 그리고 고정희 시인을 꼽았다. ▶관련기사 : 아주 작은 차이 그리고 성‘노동’

이 책의 글들은 시적이고, 작가는 시인을 자주 인용한다. 여성의 글쓰기가 “망가진 걸 고치는 치료가 아니라 버려진 걸 줍는 치유”라는 표현은 이미 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모래 한 알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으로 시의 정신을 노래했고,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외쳐요. ‘모래 한 알이 자기를 믿을 때 우주는 뒤집힌다’ ‘사소한 변화들이 정치다’라는 뜻이죠. 시와 페미니즘은 작은 것으로 여겨온 목소리를 듣게 해준다는 점에서 연결돼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