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핵 전쟁에서 구했던 소련 중령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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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clear bomb test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핵 전쟁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옛 소련 공군 중령이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77세.

그가 '핵 전쟁으로부터 인류를 지킨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건 1983년 9월26일 자정을 막 넘긴 새벽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18일(현지시간) 부고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정리했다.

당시 44세로 소련 공군 중령이었던 그는 소련군의 미국 위성 조기 경보 시설인 모스크바 외곽 비밀 통제센터 세르푸코프-15에서 몇 시간째 당직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 때 알람이 울렸다.

컴퓨터는 미군 기지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5발이 발사됐음을 알렸다.

그는 후일 "15초 동안 우리는 충격 상태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우리는 '다음은 뭐지?' 알아야만 했다." (뉴욕타임스 9월18일)

그는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미사일 발사와 폭발 사이에는 고작 25분 가량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됐다. 그 사이에 보복 대응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soviet missile 1983

당시는 냉전 시대 중에서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다. 이 사건이 있기 3주 전, 소련은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대한한공 여객기를 격추시켰다. 탑승객 269명이 숨졌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군비 경쟁 동결 요청을 거부하며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했다.

NYT는 "페트로프 중령은 결정을 내리는 체계 내에서 핵심 포인트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기 경보 시스템 본부의 상사들이 이를 소련군 작전 참모에 보고하면, 이들이 당시 소련 대통령 유리 안드로포프에게 보복 핵 공격을 조언할 수 있었다는 것.

30년 뒤인 2013년 9월26일 발행된 BBC 기사에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미사일 공격이 진행중이라는) 모든 데이터가 있었다. 상부에 이를 보고했다면 누구도 이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을 것이다." 30년 뒤 그가 BBC '러시아 서비스'에 말했다.

(중략)

"사이렌이 울려댔지만 나는 몇 초 동안 '발사'라는 글자가 적힌 붉은 대형 스크린을 응시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말했다.

시스템은 경보의 신뢰성이 "최고 수준"이라고 알렸다.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미국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1분 뒤 사이렌이 또 울렸다. 두 번째 미사일 발사였다. 그 다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알람이 울렸다. 컴퓨터는 경보를 '발사'에서 '미사일 공격'으로 바꿨다." 그가 말했다.

페트로프는 값싼 러시아 담배를 피우며 그가 머릿 속으로 수없이 재생했을 사건을 설명했다.

"공격을 보고하기 전에 얼마나 오랫동안 이를 검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해진 규칙은 없었다. 그러나 결정을 지연시키는 매 초마다 귀중한 시간이 날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소련군과 정치 지도자들은 즉각 보고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최고위층 지휘부와 연결된 직통 전화를 걸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BBC 2013년 9월26일)

stanislav petrov
사진은 2004년 3월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자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페트로프 중령.

5분 가량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페트로프 중령은 이 알람이 오작동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나중에 그가 밝힌 것처럼, 이건 좋게 따져도 "50대 50" 추측에 불과한 직관적 결정이었다. 과거 오작동 사례 때문에 경보 시스템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발사된 미사일이 이상할 만큼 적었다는 점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만약 이 판단이 틀렸다면, 불과 몇 분 뒤 소련에는 핵 폭발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는 "23분 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만약 진짜 공격이었다면 이미 파악됐어야 했다.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그는 BBC에 당시 자신이 팀 구성원들 중 유일하게 민간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내 동료들은 모두 직업 군인이었다. 그들은 명령을 내리고 명령에 따르도록 교육 받았다."

다음은 1999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페트로프의 결정은 부분적으로 추측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핵 공격은 막대한 규모로 진행될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소련의 방어를 단 한 번에 뚫을 수 있는 맹공격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모니터는 고작 다섯 개의 미사일 만을 보여줬다. "전쟁을 시작할 때, 고작 미사일 다섯 개 만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가 당시의 판단을 떠올리며 말했다. "미사일 다섯 개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소는 소련의 지상 레이더였다.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미사일을 감지하는 이 레이더에는 공격이 있다는 증거가 탐지되지 않았다. 지상 레이더는 다른 지휘통제센터 소관이었다. 이 레이더들은 지평선 너머를 탐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위성이 파악한 뒤 몇 분 뒤에야 날아오는 미사일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1999년 2월10일)

알람은 인공위성이 미국 노스다코다 상공의 구름에 반사된 햇빛을 미사일로 잘못 인식했기 때문에 오작동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stanislav petrov
사진은 2012년 2월24일, 페트로프 전 소련 중령이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2011 독일 미디어상' 수상식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

이 일화는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 미사일 방어사령부에서 근무했던 퇴역 장군 유리 보틴체프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공개한 건 16년 뒤인 1998년의 일이었다.

사건 직후 페트로프 중령은 소련 당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왜 당시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인터컴을 들고 있었고 세 번째 손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당시의 침착한 결정으로 인해 징계를 받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상을 받지도 않았다.

페트로프 중령은 1984년 은퇴했다. 조기경보 시스템을 설계했던 연구소에서 시니어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암 투병 중이던 아내를 돌보기 위해 이마저도 그만 두었다.

뒤늦게 그의 역할이 조명되면서 페트로프 중령은 2006년 '세계 시민 연맹'으로부터 상을 수상했다. 2013년에는 드레스덴 평화상을 받았다. 2014년에는 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세계를 구한 남자'가 제작됐다.

페트로프 중령은 연금을 받으며 홀로 여생을 보내던 모스크바 인근 프랴지노(Fryazino)에서 5월19일 숨졌다. 이 죽음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그의 아들 드미트리에 의해 확인됐다. 페트로프 중령의 일화가 소개된 후 줄곧 그와 가까이 지내왔던 정치운동가 칼 슈마허가 최근 그를 만나기 위해 러시아를 찾았다가 발견한 사실이다. 사인은 침감성폐렴이었다.

'세계를 구한 남자'는 2월에 러시아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그저 제 때에 제 자리에 있었던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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