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동영상' 판결문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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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부끄러운 고백이다. 2015년 8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관련한 동영상 제보를 받아 취재에 나섰다. 하지만 이듬해 '뉴스타파'에서 이 회장의 성매매 의심 동영상을 공개할 때까지 기사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당시 '한겨레'에 들어온 제보는 해당 동영상을 넘길 테니 돈을 주고 사라는 내용이었다. 제보자와 금전거래를 하는 것은 '한겨레' 취재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국 동영상 전체 내용을 살펴볼 순 없었다. 대신 경찰과 공조를 통해 취재에 나서보려 했으나 이마저도 벽에 부딪혔다.

경찰은 이 회장의 성매매 혐의에 대한 수사에 앞서, 먼저 동영상 관련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부터 요구했다. 당시 제보자이기도 한 이들 정보를 함부로 넘겨줄 순 없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과 관련된 삼성과 씨제이(CJ) 등 기업 관계자들의 거짓 설명을 쉽게 받아들인 것도, 더욱 끈질기게 취재에 매달리지 못한 근본 책임도 모두 취재기자에게 있다. 최근 나온 해당 사건 재판의 판결문을 근거로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과 여전히 남아 있는 의혹을 살펴본다.-이정훈/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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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동영상’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은 선씨 일당이 삼성과 씨제이 관계자들과 전자우편을 주고받은 흔적들.

2011년에 동영상 첫 촬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징역 5년형(1심)을 받은 지난 8월25일. 같은 날 또다른 흥미로운 판결이 있었다. 이 부회장의 아버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성매매 의혹 동영상과 관련된 판결이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부장판사 김수정)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공갈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씨제이제일제당 전 부장 선아무개(56)씨에게 징역 4년6개월과 40시간의 성폭력 교정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선 전 부장과 공모한 그의 동생 선아무개(46)씨와 이아무개(38)씨에게도 각각 징역 3년과 징역 6개월이 선고됐다. 또 동영상을 직접 촬영한 중국 국적 여성 김아무개(30)씨는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동생 선씨와 이씨, 김씨 등은 모두 비슷한 마약 전과를 갖고 있다.

8일 <한겨레>가 판결문을 살펴보니, 사건의 시작은 2011년으로 돌아간다. 2011년 12월11일 김씨는 이 회장의 성매매 의심 동영상을 촬영해 동생 선씨에게 보여줬다. 이후 동생을 통해 동영상을 본 형은 동영상을 더 촬영할 것을 권했다.

“앞으로 이거 더 찍을 수 있냐? 더 찍을 수 있으면 나한테 하나 주고 삼성과 쇼부(승부)를 봐도 되니 삼성을 흔들어라.”(형)

“촬영하려면 장비도 사야 되고 경비도 없다.”(동생)

형은 회사로 동생을 불러 차량과 신용카드를 줬다. 동생 선씨 일당은 볼펜 모양의 몰래카메라를 구입한 뒤 2012년 3월31일 추가로 동영상을 촬영했다. 2011년과 2012년 찍은 동영상 두 개가 삼성을 협박하는 무기가 됐다. 성매매는 이후 2013년 1월5일, 4월19일, 6월3일에도 이어졌다. 서울 논현동의 빌라와 삼성동 저택에서 여성 4∼5명이 성매매를 했고, 이들 여성은 매번 500만원씩 받았다.

선씨 일당의 협박은 2013년 3∼6월께 시작됐다. 이들은 이 회장의 비서 최아무개씨가 이용하는 미용실과 삼성그룹 서초사옥 안내 데스크에 동영상이 담긴 이동식 저장장치(USB)를 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들은 전자우편 주소와 비밀번호를 적고 ‘메일을 확인하라’는 내용이 담긴 쪽지와 유에스비를 보냈다.

이후 삼성 쪽으로부터 연락이 오자 전자우편으로 연락하거나 서울 강남의 ㅅ호텔 사우나에서 직접 만나 돈을 요구했다. 결국 이들은 그해 6월 6억원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돈은 이들 지인의 계좌번호로 받았다. 이어 추가로 3억원을 더 뜯어냈다.
이들 일당으로 동영상이 담긴 유에스비를 훔친 또다른 김아무개(39)씨도 같은 해 7∼8월 삼성을 협박하고 나섰다. 삼성전자 이아무개 사장 휴대전화로 동영상 캡처 사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김씨는 삼성 쪽으로부터 연락이 오자 관계자를 만나 우선 3억원을 받고 3년 후에 다시 3억원을 받기로 합의했다. 며칠 뒤인 8월13일, 김씨는 서울 강남의 ㄴ호텔 커피숍에서 유에스비를 건네고 현금 3억원을 받아 챙겼다. 이 과정에서 삼성은 각서를 요구했다. 삼성 관계자는 ‘자료 원본이나 사본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약하고, 사실이 아닐 경우 받은 돈을 반환하는 것은 물론 어떠한 대가(형사처벌 포함)도 감수할 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각서에 대한 서명을 요구했다.

당시 이건희 회장도 협박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있다. 이 회장 자금을 관리하는 삼성 최아무개 임원은 검찰 조사에서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3개의 계좌에 6억원을 입금한 후 얼마 있다가 이 회장이 3억원을 현금으로 달라고 해 3억원을 가방에 담아 전달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현금을 다른 삼성 관계자에게 건네 선씨 일당에게 넘기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협박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해당 동영상을 구매한 곳도 있다. 바로 씨제이다. 2012년 4∼5월께 삼성이 받은 것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전자우편을 접수한 씨제이는 이들과 직접 만났다. 당시 서울 마포구 서강대 정문에서 그룹 감사팀 부장이 이들을 만나 유에스비를 건네받고, 1천만원을 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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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동영상’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은 선씨 일당이 삼성과 씨제이 관계자들과 전자우편을 주고받은 흔적들.

회삿돈 건넸다면 횡령에 해당

동영상 촬영자가 밝혀졌고, 이를 무기로 협박하던 일당도 단죄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우선 이 회장의 비서 최아무개씨란 존재다. 선씨 일당은 2015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최씨를 일러 ‘채홍사’라는 주장을 폈다. 부장 직위로 7∼8년간 이 회장에게 ‘여성’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얘기였다. 최씨가 서울 논현동에 주택은 물론 고급 외제차 등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 내부망으로 직원을 검색했지만, 같은 이름의 부장은 없었다. 삼성 직원이 아니면서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볼 수도 있다. 중국 국적 여성 김씨가 성매매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최씨와 선이 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선씨 일당은 동영상 전달자의 한 명으로 최씨를 택했다. 2013년 당시 최씨가 이용하는 미용실에 유에스비를 보낸 것은 물론 서울 서초동 삼성그룹 안내데스크에 유에스비를 보내며 최씨에게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덕에 삼성 관계자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유죄가 인정된 김씨의 성매매 횟수가 네차례인 점을 고려하면, 최씨 역시 성매매 알선 혐의를 받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판결문에는 검찰이 최씨를 조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누가 현금을 건넸고, 그 돈은 어디서 난 것인지도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다. 만약 회삿돈을 쓴 것이라면 업무상 횡령에 해당한다. 선씨 일당이 2015년 기자에게 건넨 전자우편에는 삼성 임원들의 전자우편 주소가 나와 있다. 한 명은 삼성전자 김아무개 사장이며, 또다른 한 명은 같은 회사 홍아무개 사장이다. 또 삼성전자 이아무개 사장은 2013년 휴대전화로 이건희 회장 동영상의 캡처 화면을 건네받았다.

더욱이 선씨 일당은 김아무개 사장과 이아무개 사장을 각각 따로 직접 만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 사장과 홍 사장은 당시 이에 관련한 <한겨레>의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이 사장은 동영상에 대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딱 잡아떼며 거짓말을 했다. 판결 뒤 재차 던진 질문에도 아예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판결문엔 선씨 일당이 삼성 관계자를 만난 호텔 가운데 하나가 서울 강남의 ㄴ호텔이라고 명시돼 있다. 2015년 기자에게 이 사장을 직접 만났다고 주장한 바로 그 호텔이었다. 당시 이들은 “이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서로 대화 내용을 녹음한 뒤 다시 같이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선씨 일당은 한 개의 핫메일 계정으로 삼성 쪽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성 쪽에서 돈을 건넨 이가 누구인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9억원의 횡령 여부를 정확히 가리려면 연락을 주고받은 관계자를 찾고, 돈의 출처를 파악해야 한다. 판결문을 보면, 검찰이 삼성전자 이 사장에게 진술서를 받았을 뿐, 다른 관계자를 조사하거나 돈의 출처를 파악한 내용은 없었다.

그룹 회장 전자우편으로 연락을 받은 씨제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씨제이는 삼성(9억원)에 비해 적은 1천만원을 건넸지만, 그 돈이 누구의 돈으로 어떻게 처리가 됐는지는 조사하지 않았다.

만약 이 돈이 이건희 회장의 개인돈이라고 하더라도, 의혹은 남는다. 이건희 회장 동영상이 촬영된 곳은 서울 논현동의 한 빌라인데, 이곳 전세자금은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특별검사 수사 때 드러난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서 나온 것이었다. 2014년까지 실명전환을 완료했다고 밝혔는데도 여전히 차명재산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또다른 의문은 선씨 일당이 삼성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씨제이 쪽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이건희 회장의 과거 이름을 사용했다. 이 회장이 5살 때 현재 이름으로 바꾸기 전의 이름을 쓴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집안에서나 가끔 쓰는 이 회장의 옛 이름을 알 정도면 상당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더욱이 씨제이 부장이던 선씨가 고 이맹희 씨제이그룹 명예회장의 의전을 담당한 경력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인천의 한 고교를 졸업한 그는 이맹희 명예회장이 국내에 입국할 때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거나, 중국으로 출장 가 돕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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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등 여성들이 성매매 대가로 받은 자기앞수표.

검찰, 이 회장 시한부 기소중지 처분

이처럼 상당한 정보와 의전 경력 등을 생각하면, 씨제이의 조직적 개입 여부도 충분히 의혹을 살 만하다. 선씨 일당이 씨제이 쪽과 연락을 주고받던 2012년 4∼5월은 이맹희 명예회장이 아버지인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차명 상속재산을 돌려달라며 동생인 이건희 회장 쪽과 한창 소송전을 벌이던 시절이다. 당시 두 그룹 간 감정싸움은 극에 달했다.

당시 상황과 관련해, 씨제이의 한 임원은 “당시에는 ‘한번 다퉈보자’ 식으로 양쪽 모두 감정이 좋지 않아 서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검찰은 지난 3월 씨제이헬로비전과 대한통운 사무실 등 4곳을 압수수색했지만, 씨제이그룹의 조직적 개입 의혹을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했다.

씨제이 쪽은 의혹 자체를 강하게 부인한다. 씨제이 관계자는 “감사팀 직원은 협박범들이 어떤 의도로 접촉해왔는지, 사실인지 진위 파악 차원에서 만났을 뿐”이라며, “만난 이후에도 연루되지 않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연락을 끊었다고 밝혔다”고 해명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씨제이 개입 의혹에 대해 검찰이 조사했지만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재판에서도 검찰이나 피고인 모두 씨제이가 개입했다는 의혹은 제기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지난 4월 사건의 당사자인 이건희 회장에 대한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시한부 기소 중지 처분했다. 관건인 이 회장의 성매매 의혹 자체를 가리는 일이 과제로 남았다는 얘기다. 한편, 검찰의 공소 사실이 틀려 재판부가 이를 수정하기도 했다.

검찰은 선씨 일당이 씨제이 쪽 관계자를 만난 시점을 2013년 4∼5월이라며 기소했지만, 재판부는 증거들을 종합할 때 그 시기가 2012년 4∼5월로 보인다고 내용을 고쳤다. 선씨 일당이 기자에게 건넨 전자우편 캡처 사진에도 씨제이와 전자우편을 주고받은 시기는 2012년으로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