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배우가 직접 영화 제작에 뛰어들게 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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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토믹 블론드>(2017)의 줄거리는 다분히 익숙하다. 냉전이 끝나가던 1989년, 영국 첩보원 브로튼은 전 세계 비밀요원들의 명단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을 타국 정보요원들보다 먼저 회수해 오라는 명을 받고 베를린에 잠입한다. 적과 아군의 경계가 흐릿한 베를린에서 상처투성이 몸을 화려한 옷으로 감춘 채, 브로튼은 좀처럼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는 상부의 냉대 속에서 몇 번의 반전과 배신, 좌절과 극복을 경험하며 임무를 수행한다. 몸을 사리지 않는 화려한 액션이나 임지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덤이다.

charlize theron atomic blonde

이 뻔한 이야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브로튼이 여자라는 점이다. 총칼을 휘두르고 피범벅이 되며 맨손 격투를 벌이고 미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카 체이싱을 하면서 마침내 저 무시무시한 소련 스파이들로부터 자유진영을 지켜내는 뻔한 일을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해치우는 새로운 그림. 뻔한 줄거리는 주인공의 성별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질감을 얻는다.

유리천장을 부순 여배우들

스토리의 허술함과 늘어지는 호흡을 오로지 주인공 로레인 브로튼의 매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영화는 주연인 샤를리즈 테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필요로 했다. 첩보액션의 세계에서 여자 캐릭터가 이만큼 근사했던 건 과장을 조금 섞어 <예스마담>(1985) 시리즈의 양자경 이후 처음인데, 맡은 일을 끝내주게 해치우는 프로페셔널한 여자 주인공을 연기하는 데 샤를리즈 테론만한 적역이 또 어디 있으랴. 그는 여자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얄팍함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고군분투해온 사람이니까.

화면 안에서 샤를리즈 테론은 연쇄살인마(<몬스터>, 2003)였고 인간병기(<이온 플럭스>, 2005)였으며, 초인(<행콕>, 2008)이자 왕을 죽이고 스스로 권좌에 앉은 여왕(<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2012)이자 냉혹한 프로젝트 지휘관(<프로메테우스>, 2012)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전사 퓨리오사였다. 그리 생각하면 샤를리즈 테론이 이런 배역을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게 이상할 지경이다. 왜 이런 끝내주는 첩보원 역할이 이제야 온 걸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에도 배역이 그에게 온 건 아니었다. 영화의 제작사는 샤를리즈 테론이 설립한 영화사 ‘덴버 앤 딜라일라 프로덕션’이고, 이 프로젝트를 5년간 이끌고 온 프로듀서 또한 샤를리즈 테론이며, 감독 데이비드 리치와 각본가 커트 존스태드를 데려온 것 역시 샤를리즈 테론이다. 배역이 그에게 온 게 아니라, 그가 배역에게 가기 위해 직접 영화를 제작해야 했던 셈이다. 잡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샤를리즈 테론은 <에일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린다 해밀턴 같은 선구자들이 없었다면 이런 여자 영웅을 연기하기란 어려웠을 거라는 점을 언급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한테도 그런 순간들, 여자가 진정으로 자신을 선보이고 일종의 유리천장을 부순 순간들이 있었죠. 그러곤 좀처럼 이어가지 못해요. 뭔가 시원찮은 영화가 한 편만 나오면, 갑자기 아무도 여자가 주도하는 영화 같은 건 안 만들려고 하잖아요.” 하긴, 모든 할리우드 감독들이 퓨리오사 같은 근사한 캐릭터를 만들 줄 아는 조지 밀러는 아니니까.

reese witherspoon

이런 이유로 직접 제작에 나선 배우가 샤를리즈 테론 혼자만은 아니다. 일찌감치 ‘타입 에이(A) 필름’을 차린 바 있는 리스 위더스푼은 “6명의 여배우가 쓰레기 같은 역할 하나를 두고 벌이는 암투”를 보다 못해 차린 영화사 ‘퍼시픽 스탠더드’를 통해 <나를 찾아줘>(2014)와 <와일드>(2014), 에이치비오(HBO) 드라마 <빅 리틀 라이>(2017) 등을 제작하며 본격적인 제작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 또한 ‘비카리어스 스튜디오’를 차려 직접 제작에 나섰고, 할리우드 내 출연료 성차별에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온 제시카 채스테인 또한 최근 영화사 ‘프레클 필름스’를 차렸다. 물론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결정할 권한을 지닌 제작자 중 여자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히 좋은 변화다. 그러나 괜찮은 배역을 연기하려면 직접 제작사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 결코 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생각해보자. 남자 배우가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성별을 이유로 괜찮은 배역으로부터 배제되는 상황을 견디다 못해 직접 영화사를 차린 예가 얼마나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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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과 무관하게 성별을 이유로 기회에서 배제되는 일은 한국도 미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저한테 일을 왜 안 하느냐고 물어보셨는데, 그건 피디님들께 좀 여쭤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방송 파일럿 예능 <김생민의 영수증> 제작발표회에 공동 진행자이자 제작사 ‘컨텐츠랩 비보’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송은이는, 왜 김숙과는 달리 티브이 활동이 뜸한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물어봐 주는 사람이라도 있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방송가에서 그의 입지가 줄어드는 건 근거도 없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엠비시 에브리원(MBC Every1)의 <무한걸스>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증명해 보인 재담과 유머감각은 어느 하나 시대에 뒤처지는 것 없이 날카로웠다. 그럼에도 그는 자꾸 명확한 이유 없이 일이 줄어드는 걸 경험해야 했다. 예능판의 남초 현상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동료 김숙마저 출연하던 프로그램 제작진으로부터 갑작스러운 하차 통보를 받고는 “다 접고 하와이로 가겠다”고 하자, 그를 붙잡아 달래 함께 만든 게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이하 <비밀보장>)이었다.

<비밀보장>의 지상파 스핀오프 격인 에스비에스 <송은이 김숙의 언니네 라디오>에 이어, <김생민의 영수증>까지 지상파 티브이로 올려 보내며 ‘컨텐츠랩 비보’는 <비밀보장>의 성공이 우연이나 요행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했다. 이럴 거면서 기존의 지상파 제작진들은 왜 그 전까지는 이들에게 변변한 기회를 안 준 걸까?

목마른 자여, 우물을 파라?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2017)를 구성하는 세 편의 단편 중 세 번째 작품인 <최고의 감독>을 공개했던 2015년, 감독이자 주연인 문소리는 연출을 계속할 생각이 있느냐는 <씨네21> 이예지 기자의 질문에 당장은 생각이 없다면서도 어떤 소명처럼 해야 할 이야기가 주어진다면 또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떤 소명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조건을 걸었다. “한국 영화가 자꾸 남자들만 세상을 구하고 역사의 중심에서 활약을 펼치는 기획영화의 판으로만 돌아간다면, 할 수 없이 여자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어야겠지.” <아토믹 블론드>와 ‘컨텐츠랩 비보’가 거두고 있는 크고 작은 성취를 진심으로 응원하면서도 그 앞에서 마냥 웃기만 할 수 없는 건, 이들이 앞장서서 나선 게 문소리의 말처럼 “자꾸 남자들만” 데리고 콘텐츠를 만드는 대중문화계의 상황이 좀처럼 바뀌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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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듯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옛말도 있지 않으냐 묻는다. 하지만 우물이 충분하게 있는데도 두 명 중 한 명이 우물에 접근할 수 없어 타는 목마름으로 새로 우물을 파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공동체는 정말이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