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학교와 한방의료원 논쟁이 벌어진 학교에는 '차별의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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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한 초등학교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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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임대아파트(학교 본관 오른쪽 하얀 건물)에서 태어났다. 지역 유일의 학교는 과밀할 만큼 북적였다. 한부모·조손·장애인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 아이들이 한데 모여 어울렸다.

민간 분양아파트 쪽에 새 학교가 지어졌다. 하나둘 옮겨갔다. 같이 공부시키기 싫다는 분양아파트의 민원을 교육청이 받아들였다. ‘분리와 구별’이 공식 추인됐다. 빈부가 동거하던 학교에서 부가 빈을 눈치 보지 않고 떼어냈다. 외면받고, 거부되고, 따돌림당하면서 학교는 영구임대아파트만의 시설로 졸아들었다. 왕따당해 빼빼 마른 학교는 앞으로 계속 마를 것(학생 감소)이란 이유로 폐교(이전)됐다.

고립의 원인은 사라지고 고립의 결과만 떠안은 학교의 사망은 결코 ‘자연사’가 아니었다. 그 학교가 6년을 건너 다시 불려 나왔다. ‘이생’은 ‘전생’보다 가혹했다. 가난 대신 장애를 품도록 소환된 학교가 새 학생들을 받기도 전에 혐오의 한가운데 섰다. 개교→고립→분교→폐교→부지 사용 논란으로 이어지는 옛 공진초등학교(강서구 가양동)의 시간엔 한국 사회의 ‘분리 욕망’이 노골적으로 투사돼 있다. 계급과 계층, 차별과 배제, 교육과 정치, 공존과 개발이란 거대한 주제들이 이 작은 학교의 역사에 응축돼 있다.

한겨레는 2011년 8월 국내 언론 중 처음으로 공진초에 닥친 ‘운명’을 보도했다. 6년 뒤 이 학교의 ‘용처’를 두고 열린 장애인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7월6일)가 인근 주민들(본관 왼쪽 강서한강자이아파트 주도)의 반대로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파행했다.

9월5일 2차 토론회가 열린다. 6년을 사이에 둔 취재로 ‘공진초의 일생’(1992년 개교~2015년 폐교~그리고 현재)을 재구성했다. 폐교 뒤 방치된 학교에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철조망 안으로 초록을 이뤘다. 살아 있었다면 포착되기 힘든 풍경 속에 2017년 여름 ‘그 학교’가 있다.

지난 7월6일 서울시교육청이 강서구 가양동의 공진초등학교 폐교 부지에 장애인 특수학교를 신설(2019년 3월)하는 내용으로 주민토론회를 열었다. 욕설과 고성이 난무하다 토론회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9월5일 2차 토론회를 앞두고 ‘특수학교 결사반대’를 외치는 주민들은 ‘국립한방의료원 유치’를 주장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장애인 학교’로 거부되기 전에 공진초는 ‘가난한 학교’로 거부되다 사라졌다. 아파트 종류와 위치, 빈부의 크기, 장애와 교육 등을 둘러싼 겹겹의 차별이 한 학교의 일생에 중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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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로 방치된 옛 공진초등학교(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운동장에서 페인트칠이 벗겨진 축구 골대가 붉게 녹슬어 있다.]

“내보내.”

욕설과 고함이 난무했다.

7월6일 ‘강서지역 공립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는 시작도 하기 전에 파행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주민토론회에 초청한 패널(김남연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대표)이 ‘강서구 주민’이 아니라며 주민들이 단상으로 뛰어올랐다. 단상 아래에선 박수에 맞춰 구호가 터졌다.

“신분확인!” “신분확인!” “신분확인!”

의자를 단상 위로 던지려다 제지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남자가 소리쳤다.

“저 여자는 전문꾼입니다. 이런 데 돌아다니는 전문꾼. 그래서 교육청이 동원한 거예요. 기분 나쁘면 여기서 나가면 돼. 나가란 말이야.”

구호가 합창됐다.

“나가!” “나가!” “나가!”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양천구에는 없는 장애인학교가 강서구에 왜 또 들어와야 합니까.”

폭언과 적대로 꽉 찬 강당에서 장애인 아들딸을 둔 부모들이 목에서 나오는 소리와 눈에서 나오는 물을 눌러 참았다.

한 학교가 있었다. 23년 동안 학교로 존재했으나 이젠 ‘학교였다는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옛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의 용처를 두고 강서구 가양동의 저녁이 들끓었다. 서울시교육청이 17년 동안 이루지 못한 장애인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장소가 그 학교였다. 인근 주민들이 “장애인학교 막아내고 우리도 잘 살아보자”며 국립한방의료원을 주장하는 곳도 그 학교였다. 학생들이 사람을 배우는 공간으로 태어나, 사람들로부터 거부되고, 구별되고, 끝내 폐교됐던 그 학교가 사람들이 ‘날것’을 뱉어내는 땅으로 재소환됐다. 차별과 배제의 시간을 통과한 뒤 숨을 멈췄던 ‘그 학교’의 일생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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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초 운동장 구석에 빈 술병이 버려져 있다. 폐교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 학교, 공진초등학교(강서구 가양동 1477)는 도시개발로 태어났다.

한강종합개발계획(88서울올림픽 유치 직후인 1981년 10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입안)으로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과 염창동에 27만평의 땅이 생겨났다. 강변과 수면을 다져 올림픽대로 제방을 쌓은 뒤 버려진 ‘폐천 부지’였다.

1989년 5월 건설부는 그 땅과 논밭을 묶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했다. 97만7265㎡에 서민아파트 1만538가구를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그해 도시개발공사가 출범했다. 서울시가 직접 하던 ‘시영아파트’ 건설을 넘겨받았다. ‘도공’이 세우는 아파트는 ‘도시개발아파트’(공사 명칭이 ‘SH공사’로 바뀌는 2003년 전까지 사용)가 됐다. 1992년 10월 가양도시개발아파트 2·4·5·6·8·9단지가 준공했다.

4단지(1998가구)와 5단지(2411가구)는 영구임대아파트였다. 두 단지의 75%가 24㎡ 크기의 집이었다. 41㎡(전체의 11%)가 최대 평형이었다. 공진초는 4·5단지 입주(1992년 11월)와 동시에 개교했다. 4단지와 맞닿은 곳에 후문을 만들었다. 10개 학급 183명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학교가 분할했다. 도시개발아파트 준공 전까지 가양동에 아파트는 가양우성(1990년 10월 입주·414가구)뿐이었다. 인근에 초등학교는 공진밖에(가양초는 8단지와 9단지 사이) 없었다. 개교 이듬해 46개 학급으로 늘어났다. 2부제 수업을 할 만큼 학생이 넘쳤다. 1993년 9월 540가구가 대림경동아파트에 입주했다. 10개월 뒤 탑산초가 대림경동 옆에 개교했다. 공진초 정문에서 직선으로 200여m 거리였다. 1592명(34학급)이 탑산초로 전입하면서 공진초는 37개 학급으로 재편됐다.

학교가 외면당했다. 영구임대아파트 4·5단지에 입주 신청이 미달했다. 도공은 1140가구를 1993년 2월 청약저축 가입자들에게 내놨다. 4·5단지는 장애인과 한부모·조손 가정 등이 주민의 다수였다. 절대빈곤층이 청약 입주자들과 한 단지를 이뤘다. 주변 분양아파트를 지나가다 ‘출입 제지’를 겪는 4·5단지 아이들이 생겨났다.

공진초가 유일한 초등학교일 때 빈부는 한 학교에서 동거했다. 탑산초가 개교하면서 부가 빈을 떨어낼 기회를 얻었다.
가양우성아파트는 5단지와 담 하나 사이로 아래쪽에 있었다. 우성에서 보면 탑산보다 공진이 좀더 가까웠고, 탑산에서 보면 5단지보다 우성이 좀더 멀었다. 교육청으로 민원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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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아파트의 경우 (탑산초로 등하교 하려면) 가양5단지를 무조건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음에도 ‘빈곤한 임대아파트 거주 학생집단’이라며 공진초를 외면했습니다. 공동통학구역으로 만들어 힘있는 자들의 손만 들어주었습니다.”(2011년 공진초 학부모들 탄원서)

1996년 강서교육지원청은 우성아파트를 ‘공동통학구역’으로 지정했다. “결정 당시 우성아파트 쪽에서 공진초로 아이들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요구가 있었던 것 같다. 학구는 조금씩 변동이 있는 것이지만 민원이 없었다면 지금과 다른 형태였을 수는 있다.”(2011년 강서교육지원청) 공동통학구역이 되면서 ‘공진 자동 배정’이 ‘공진과 탑산 중 선택’으로 바뀌었다. 우성 자녀들의 ‘탑산 전학’이 잇따랐다.

공동통학구역 지정은 공진초가 ‘4·5단지만의 학교’가 되는 ‘결정적 순간’이 됐다. 4·5단지엔 학교 선택권이 없었다.

학교가 말라갔다. 2단지와 3단지(분양아파트)도 탑산으로 아이들을 보냈다. 학구 조정 뒤 입주한 아파트 자녀들은 모두 탑산초 학생이 됐다. 공진초 학생 수가 급감했다. 2010년엔 12학급 218명으로 쪼그라들었다.

4·5단지 입주 조건 변경도 공진초 입학생들을 증발시켰다. 2000년대 들어 청약저축 가입자들이 입주 자격에서 제외되고 임대가구주가 사망하면 집을 빼야 했다. 이사 나간 ‘공가’가 늘어났고 입주민 구성이 고착됐다.

아파트는 ‘분리 욕망’을 건축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주민’으로부터 분리시켜 한곳에 몰아넣으며 영구임대아파트는 디자인됐다. 아파트에서 자라난 ‘분리’가 교육청의 승인을 받아 학교로 건너갔다. 가난한 아이들의 학교와 가난하지 않은 아이들의 학교가 선명하게 구별됐다.

학교가 낙인찍혔다. “탑산초 애들이요. 우리한테요.” 2011년 8월 영희(가명·2011년 공진초 3학년) 머리 위로 ‘송충이 비’가 내렸다. “막 욕하고요.” 이파리 무성한 나무 아래에서 영희가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를 질렀다. “공원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탑산 다니는 남자애가 어느 학교냐고 물어서요. 공진 다닌다고 했더니요. 거지라고 놀렸어요.” 땅바닥을 살피며 폴짝폴짝 뛰었다. “친구 다영(가명)이는요. 원숭이란 말도 들었어요. 우리 학교 남자애들은 가만 안 있고 탑산 애들하고 싸워요.” 영희가 4단지와 연결된 후문을 통과해 학교로 뛰어들었다.

구별은 차별로 옮아갔다. 공진초가 ‘대단위 임대아파트 학교’로 틀 지워지면서 “지역에서 ‘거지들의 집단’과 ‘오염균이 득실거리는 집합체’처럼 낙인”(학부모들의 탄원서)이 새겨졌다.

엄마 안현주(가명·2011년 당시 2학년 학부모)는 복지관에서 혼자 있는 딸을 봤다. 두 명이 짝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딸과 탑산초 학생이 짝 없이 있었다. 엄마가 “손잡고 같이 하라”며 탑산 아이 쪽으로 딸을 데려갔다. “공진 싫다”며 탑산 아이가 울었다. 짝이 없어 울면서도 딸과 짝이 되길 거부했다. 탑산초 옆의 사설유치원에서도 4·5단지 아이들은 ‘입학 퇴짜’를 맞았다.

어른들도 위축됐다. 택시를 타면 4·5단지에서 내리지 않고 우성아파트나 대림경동아파트 쪽에서 내려서 걸어왔다. 두 학교 간의 실제 거리는 한 블록이었지만 심리적 거리는 강의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졌다.

학교가 개발에 차출됐다. 강서교육지원청이 공진초의 마곡 이전을 2011년 9월 행정예고(2014년 9월1일 예정)했다. 강서구가 전력을 쏟는 마곡지구 도시개발사업(2007년 12월 지정. 면적 366만5086㎡)에 공진초가 동원됐다.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정부는 신규 학교 설립을 억제했다. 강서구와 강서교육지원청은 마곡지구(1만1418가구)에 발생한 학교 수요를 기존 학교를 옮겨 해결하려 했다. 마곡에 새로 학교를 지어 공진초 이름을 붙이고 공진초 학생들은 탑산초로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도시개발로 탄생한 학교가 도시개발을 위해 사라지게 됐다. ‘이전’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상 ‘폐교’였다.

강서교육지원청은 이전 대상 학교(1곳)로 공진초를 찍어 낙점했다. ‘학생 수 급감으로 학교 유지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공진초 고립’을 추인해 학생 이탈을 부른 교육청이 학생 감소를 근거 삼아 공진초를 마곡으로 내보냈다.

맞은편에 790가구의 강서한강자이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 40m 거리에 있었다. 공진초 배정이 상식적이었다. 이 아파트 아이들이 공진에 입학하면 ‘학생 수 탓’은 사라질 것이라고 4·5단지 부모들은 믿었다. 자이아파트는 입주(2013년) 3년 전 이미 탑산초 학구로 지정돼 있었다. 시행사는 자이 자녀의 탑산 입학을 전제로 ‘13억원 지원 협약’(교실 증축과 강당·체육관 건립)을 2010년 12월 학교와 맺었다. ‘학생 수 탓’은 계속됐다. 중학교 가운데선 공진중학교가 이전 대상이 됐다. 논리는 같았다. 공진중과 공진초는 붙어 있었다.

“공진초·중의 학생 감소는 결코 자연현상이 아니다. 인위적이고 물리적이다.”(2011년 공진중 교사)

학교는 저항했다. 공진초 부모들이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임대라고 차별하는데 탑산으로 가면 아이들이 어떤 말을 들을지 알 수 없다”며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공진초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거지 취급 하고 손가락질할 일이 아니라 손가락질하는 그들에게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알게 해야 합니다.”(학부모 탄원서)

폐교 반대 서명을 받았다. 교육청을 찾아가 항의했고, 서울시의회에 협조를 구했다. 긴급 학부모 간담회를 열었다. 언론에도 알렸다. 설명회를 요구해 현장에서 ‘불가’를 외쳤다.

학교의 운명은 돌이켜지지 않았다. 2013년 10월 공진초와 탑산초의 학구 통합이 행정예고됐다. 마곡에 신설된 학교(11월7일 개교식)가 ‘공진초 본교’의 이름을 가져갔다. 2014년 1학기 종료 뒤 마곡 이사가 단행됐다. 그해 8월27일 첫 수업을 시작(29학급)했다.

‘가양동 공진초’는 분교로 전환됐다. 4·5단지 아이들은 전원 분교에 남았다. 그들은 2학기부터 탑산초 학생이 돼야 했다. 학기 중 통합이 가져올 부작용을 염려한 4·5단지 부모들의 요구로 옛 건물은 ‘6개월 한시 분교장’이 됐다. 서울 시내에 최초로 등장한 분교였다. 개발이 앞서고 교육이 수습하는 정책에 치여 4·5단지 아이들은 학교를 잃었다. 2017년 공진초 본교는 마곡에서 부동산 투자를 유인하는 ‘인프라’로 홍보되고 있다.

학교가 생을 멈췄다. 2015년 2월16일 ‘가양 분교’ 교구와 물품이 마곡 본교로 빠져나갔다. 학기가 종료되기 전부터 “책상과 의자에 채권자들이 압류 들어오듯 빨간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딱지 틈에 앉아 공부하는 아들딸을 보며 부모도 울었다. 2015년 2월28일 가양분교가 업무를 종료했다. 구별과 차별의 기억을 안고 23년 만에 학교가 수명을 다했다.

2011년 폐교 반대 운동 당시 186명이었던 학생(2012년 172명, 2013년 140명)이 폐교 땐 125명으로 줄어 있었다. 마곡 본교는 개교 이듬해 593명의 학생을 받았고 2017년 934명까지 수를 늘렸다. 4·5단지 아이들이 옮겨간 탑산초에도 6학급이 더해졌다.
탑산과 통합이 불변의 사실이 됐을 때 공진 학부모들은 서로 익숙해질 기회(공동 소풍·체육대회 등)를 달라고 교육청에 요청했다. 시행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을 돌보겠다’며 탑산으로 따라간 공진초 교사는 한명이었다. 통합 반대 학부모들이 걱정했던 일들이 한동안 계속됐다. 송지숙(가명·5단지)의 아이(탑산초 6학년으로 전학)는 “임대라고 놀려서 학교 가기 싫다며 매일 울었다”.

이름을 빼앗긴 학교에 다시 학교 이름이 등장했다. 폐교 11일 뒤 텅 빈 본관의 폐쇄된 문에 고시글 하나가 붙었다.

“① 공진초 분교장의 존속 기한이 종료함에 따라 기존 정화구역은 설정 해제하고 ② 학교 설립 예정지(가칭 서진학교)의 학교 환경위생 정화구역으로 재설정함.”

발달장애 특수학교 설립 행정예고는 2013년 11월25일 처음 공고됐다. 서울시교육청이 공진초 부지(1만1002㎡ 중 약 5000㎡ 활용)에 16학급(106명)의 공립특수학교를 세운다는 계획(2016년 3월 개교)이었다. 공진초-탑산초 학구 통합 예고(2013년 10월29일)로부터 한 달이 안 됐을 때였다. 서진학교는 예정대로 문을 열지 못했다.

서울엔 29곳의 특수학교(국립 3, 공립 8, 사립 18)가 있었다. 2002년 경운학교(종로구) 이후 새 학교가 나오지 않았다. 설립을 시도할 때마다 주민 반대로 좌절됐다. 강서·양천구엔 소규모 사립 특수학교(교남학교 정원 106명) 하나만 있었다. 교남학교 입학에 실패한 학생들이 구로구 서울정진학교까지 1시간 이상 걸려 통학했다. 첫 행정예고 이듬해 강서구 중증장애 학생 173명이 원거리 통학을 하고 있다고 서울시교육청은 파악했다.

학교는 쫓겨 다녔다. 설립 계획에 따른 공유재산 심의안건을 2013년 12월 서울시의회가 삭제했다. 학교 설계비(10억원) 전액도 삭감했다. 시의원들을 만난 장애인 부모들은 “내년(2014년) 지방선거부터 치르고 이야기하자”는 말을 들었다.

2014년 7월 조희연 교육감이 취임했다. 다음달 공진초가 분교장이 됐다. 다시 두 달 뒤엔 1년 전 입주한 강서한강자이 주민 1444명이 특수학교 설립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서울시교육청이 대체부지를 타진했다. 2015년 9월부터 마곡지구 내 부지 확보를 위해 서울시와 수차례 협의했다. 마곡 주민들의 반대와 추진 중인 건설계획이 있다는 이유로 대안(2016년 10월 서울시가 4300㎡ 제공 의사를 밝혔으나 변전소 인접 등의 문제로 무산)을 얻지 못했다.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떠돌던 특수학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부되고 따돌림 당했던 4·5단지 아이들처럼 ‘서진’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공진’으로 밀려왔다. 떠안으면 큰일 나는 폭탄처럼 돌려졌다. 2016년 8월31일 서울시교육청은 3년 전과 동일한 내용으로 2차 행정예고(2019년 3월 개교)를 냈다. ‘서진’이 될 ‘공진’은 폐교 1년6개월 만에 구별과 차별이 더욱 노골화된 세계로 다시 불려나왔다.

학교가 선거를 만나 표류했다. 반발은 3년 전보다 훨씬 거세졌다. 새 행정예고 한 달 만에 2만6천여건의 반대 의견이 접수됐다. 정치인이 던진 ‘기대’가 반대를 키웠다.

공진초와 공진중을 등지고 구암 허준이 동상으로 서 있었다. 가양동엔 그의 생가 터가 있었다. 2014년 6월 공진초 정문이 맞닿은 도로에 허준테마거리가 조성됐다. 테마거리 끝엔 허준박물관과 대한한의사협회가 자리했다.

2015년 10월 김성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민설명회를 열어 ‘공진초 부지에 국립한방의료원 건립’을 약속했다. 2016년 4·13 총선(공약에 포함) 6개월 전이었다.

‘보건복지부 사전 타당성 조사비(2억원) 확보’를 근거로 업계 매체들이 ‘몰아가기 보도’를 했다. “건립 초읽기” “한방병원 곧 등장” “복지부 추진 확인” 등으로 기정사실화했다. 복지부 타당성 조사로부터 국책사업 선정과는 현실의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학교용지인 공진초 땅도 변경 없인 사용 불가능했다.

“국립한방병원을 빼앗지 말라.”

7월6일 주민토론회장 벽에 붙은 노란색 플래카드는 서울시교육청과 장애인들이 ‘다 된 의료원’을 강탈한다며 부글거렸다. 주민들이 토론회를 무산시킨 장소는 공진초에서 분할됐다 공진초를 통합한 탑산초였다.

학교는 혐오받았다.

“장애인은 한군데 몰아넣어야 한다.”

누군가 그 말을 외쳤을 때 장애학생 부모들은 경악했다. 이은자(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강서구민)는 ‘비강서구민’으로 몰린 김남연 옆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내 아이를 싫어할까. 이렇게 싫어하는 세상에 아이를 두고 어떻게 죽을까. 딸아, 제발 나보다 먼저 죽어라. 그 생각 하며 울었다.”

토론회장에 있던 한 장애학생 엄마는 평소 알던 사람을 보고 찾아가 인사했다. 돌아오는 말에 심장이 찌그러졌다.

“장애인이 많으면 무섭다.”

그 말을 중학교 교사한테 들을 줄 엄마는 몰랐다. 그 교사는 자이아파트 주민이기도 했다. 서진학교 설립을 자이 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자이 입주자대표가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반대 추진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그를 대신해 한겨레 전화를 받은 관계자가 “인터뷰하지 않는다”며 끊음)이었다. 도로 쪽 가로등과 나무엔 비대위에서 내건 플래카드들이 ‘결사반대’ 의지와 ‘지역개발’ 기대를 분출했다.

“국립한방병원 건립하여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그 구호에 마음을 뜯긴 장애아동 엄마는 자이아파트에도 있었다.

“아파트 방송으로 반대 집회와 서명을 독려한다. 투쟁기금도 관리비에서 비대위로 일괄 입금된다. 가장 큰 반대 이유를 나는 솔직히 집값 때문이라고 본다.”

자이는 지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 속했다. 김성태 의원도 자이아파트에 주거지를 두고 있다. 비대위 추천으로 토론회 좌장을 맡았던 변호사는 그의 비서관 출신이었다. 기피시설이 된 특수학교의 현실과, 집값 떨어진다는 주민들의 우려와, 개발 이슈를 앞세워 선거를 치른 정치인이 만나 ‘장애 혐오’를 강화했다.

학교가 아니라 학교 안의 학생들이 고통받았다. “우리 아파트로 일주일만 다녀보시라.” 7월 주민토론회장엔 2011년 공진초 폐교 반대 운동을 했던 송지숙도 있었다. 그가 조희연 교육감을 향해 소리 높였다. “그럼 우리가 왜 공진초 자리엔 안 된다고 하는지 아실 거다.”

‘공진초를 살려 달라’며 뛰어다녔던 4·5단지 부모들이 “장애인 특수학교 반대”를 외쳤다. 배척당하는 아이의 아픔을 아는 부모들이 배척당하는 장애학생·부모들을 지지할 것이란 생각은 어긋났다.

“15년 전 5단지로 이사왔다. 8층 복도에서 6개월간 매일 아래를 내려다보며 뛰어내릴지 고민했다. 이 아파트는 뛰어내리는 사람들(서울시의 ‘자살 다빈도 집중관리 지역’)로 넘친다. 문만 열고 나가면 암울한 사람들밖에 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야 하는데 ‘너네들끼리 살라’고 몰아넣는 것 같다. 강서구에 특수학교 신설은 찬성하지만 그 터로 공진만큼은 안 된다. 공진초 자리에 특수학교를 세우는 건 우리가 가장 약하고 만만하기 때문이다. 아예 울타리를 쾅쾅 쳐서 그 안에 우리를 가두는 일이다.”

6년 전 ‘공진’이란 학교를 지키려 했던 이유가 6년 뒤 ‘서진’으로 돌아오는 그 학교를 밀어내는 근거가 됐다. ‘차별받던 4·5단지 학교’에 장애인들이 들어오면 4·5단지에 가해지는 차별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란 판단이었다. 그는 자이 주민들처럼 한방의료원을 원하지도 않았다. “비대위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과 한편이 되어 싸울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했다.

“공진초 없어질 때 그들은 방관했다. 그들이 버린 학교에 들어오는 서진학교는 그들이 받는 대가다.”

공진초를 포기하고 존속을 약속받았던 공진중도 마곡 이전이 재추진(2016년 12월 교육부 심의 통과)되고 있다. 탑산초를 졸업한 송지숙의 딸은 공진중 2학년이 됐다. 중학교까지 이전하면 학교를 두 번 잃게 된다.

배제당한 자들의 통증이 어제의 공진초와 오늘의 서진학교 사이에 층위를 달리하며 쌓여 있었다. 차별은 아래로 흘렀다. 특수학교를 고대하는 장애학생과 부모들은 4·5단지 안에도 있었다.

김수명(가명·4단지)의 19살 딸은 구로구 정진학교(고등부 3학년)로 통학했다. 초·중학교 땐 정원 초과로 받아주는 특수학교를 찾지 못했다. 고등학교 입학 때 겨우 정진학교 학생이 됐다. 엄마는 1시간~1시간30분 걸리는 학교에 주 2~3일만 딸을 보낸다. 하루 3시간쯤 걸려 등하교를 하고 나면 딸은 자주 경기를 일으켰다. 엄마는 2011년 공진초·중 폐교 반대 서명에 이름을 보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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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초 맞은편 강서한강자이아파트의 가로등과 나무에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반대 추진 비상대책위원회’가 내건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다.]

“공진중 폐교 반대 논리 중 하나가 학교가 없어지면 탈북자 자녀가 많은 ㄱ학교와 합쳐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망스러웠다. 내 딸도 우리 안에서 배척될 수 있다는 생각에 폐교 반대 서명지를 돌려보냈다. 우리 딸이 5학년 때 ‘엄마’란 말을 처음 했다. 나는 서명 대신 ‘공진초가 폐교되면 특수학교로 전환해달라’고 교육청에 청원 메일을 썼다.”

학교는 폐교로 방치돼 잡초가 그득했다. 수도꼭지가 잠긴 식수대는 바짝 말라 목이 탔고, 페인트칠 벗겨진 축구 골대엔 붉은 녹이 꺼칠했다. 빈 술병과 담배꽁초가 학교 아닌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봤다. 4·5단지 할머니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부채질을 했다. 이 학교가 거절되고 따돌림 당할 때 구별당하고 낙인찍힌 것은 학교 그 자체가 아니라 학교 안의 학생들이었다.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9월5일 2차 주민토론회(1차 파행 당시 조희연 교육감 약속)를 앞두고 가양동에선 특수학교 저지를 독려하는 비대위의 홍보전단이 돌았다. “우리가 (한방병원을) 지켜야 한다”며 “1가구 1인 이상의 참여”를 호소했다.

서울시교육청은 “토론회는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했다. 조희연 교육감은 서진학교 설립 의지를 거듭 밝혔다. 교육청은 9월20일까지 설계공모를 받고 있다. 설계업체가 연말까지 실시설계를 끝내면 공사업체를 선정해 내년 3월 착공하는 일정을 짜고 있다.
가난으로 차별받던 ‘전생’에서 장애로 혐오받는 ‘이생’으로 불려나온 학교가 8월의 매미 소리로 빈틈없이 빽빽했다. 맞은편에서 자이아파트가 학교를 굽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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