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 집주소는 상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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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우리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들어오는 차들과 사람들 때문에 이웃 주민들도 불편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17일, 가수 이상순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올린 글에서 자택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사생활 침해를 멈춰줄 것을 호소했다. 2013년 이효리와 함께 제주로 이주한 이후부터 꾸준히 코스의 일부인 양 집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시달렸던 두 사람은, 예능을 통해 두 사람이 사는 모습이나 집안 내부를 공개하면 호기심이 충족된 이들이 걸음을 멈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집에서 제이티비시(JTBC) 예능 <효리네 민박>을 촬영했다. 오산이었다. 방송이 나간 뒤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택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효리와 이상순은 “우리가 결정한 일이니 뒷감당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 말이 관광버스가 집 앞에 정차하는가 하면 담을 넘으려는 사람들까지 등장한 상황까지 감당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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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순의 호소에 수많은 사람이 댓글을 통해 부부를 위로하고 일부 몰지각한 이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꼭 이런 댓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티브이를 통해 자신들의 집을 널리 홍보한 건 본인들이 아니냐.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들이 제공했으면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사뭇 점잖은 말투로 걱정하듯 말한다. “힘드시겠지만 이미 두 분의 집이 제주의 명소가 되어 찾아가고 싶어하는 팬들이 많다는 건 인정하셔야 한다.” 누군가는 ‘자신은 그렇지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며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라 말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시민의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예상 못 했다면 너무 낭만적인 것 아닌가.”

급기야 20년 가까이 방송인으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방송의 생리를 가르치려는 사람까지 튀어나온다. “방송을 시작하는 순간 쇼케이스 모드가 될 것이라는 걸 정말 몰랐나.” “사생활을 보여줘서 돈과 명성은 얻고 싶고 그로 인한 부작용은 생각하지 못했다면 욕심이다.” 분연히 들고일어난 누군가는 배신감을 느낀다며 외친다. “팬들더러 찾아오지 말라고 하는 건 연예인의 근본인 인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팬들은 사랑해서 찾아가는 건데 그게 싫으면 은퇴를 해라.” 아, 피곤하기도 하지.

‘소비자주의’와 ‘갑질’ 사이

“당신들이 먼저 사생활을 팔았고 우리는 관심과 시청률로 보답을 했는데 인제 와서 사생활을 침해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면 프로그램을 시청한 우리는 뭐가 되느냐”는 식의 반응들은 낯설지 않다. 이효리 이상순 부부의 사례 외에도 사석에서 사인이나 기념사진 촬영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싹수없다”며 화를 내는 팬들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연예인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았나. 말하자면 “나는 당신의 부와 명예를 가능케 한 소비자이니까 당신은 나를 만족하게 해야 한다”는 식의 소비자본주의적인 반응인데,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돈을 줬으면 돈값을 해야지”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정서 중 가장 지배적인 정서가 이거다. 세상 수많은 갑들에 치이고 살면서 피로감을 호소하던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을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고되고 지루한 길을 걷는 대신 자신이 갑이 될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빠르게 찾는 방향을 택한 것이다.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누구라도 지갑을 꺼내 소비하는 순간 ‘고객’이라는 갑의 지위를 점유할 수 있으니까.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윗사람에게 치이고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사람이라도 당장 가까운 카페에만 가면 갑이 될 수 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나 또한 그 부조리의 일부로 참여하는 건 쉬운 세상. 덕분에 세상은 가도 가도 크고 작은 폭군들이 지갑을 꺼내 흔들며 알아서 모셔주기를 바라는 공간이 되었다.

서비스업이 고도로 발달하며 굳이 돈을 쓰지 않아도 ‘고객’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된 이후엔 상황이 더 암담해졌다. 서울시 120 다산콜센터 상담노동자들에게 폭언과 고성을 일삼는 민원인들의 사례나, 홈리스들의 자립을 돕는 잡지 <빅이슈>가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다룬 칼럼을 게재하자 몇몇 남성들이 “좋게 봤는데 꼴페미 잡지였다니 이제부터 불매하겠다”고 들고일어난 사례는 너무 익숙해서 쓸쓸할 지경이다. (참고로 <빅이슈>의 독자 중 90% 이상은 이삼십대 여성이다. 분연히 들고일어난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이 대부분 “사다가 안 사야 불매운동인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이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나오셨습니다” 같은 어색한 높임말이 만연하게 된 것도, 상담 전화를 시작하기 전에 “서비스 품질관리를 위해 모든 통화는 녹음됩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나오는 것도, 모두 다 ‘고객’의 지위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거래를 빌미로 상대의 우위에 서고자 하는 이들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정서 뒤에는 오랫동안 소비자들이 자본과 기업의 농락에 손해를 봤던 역사적 맥락이 있다.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소비자가 되어 부당한 거래를 막겠다는 소비자 주권주의는 그 자체로는 나쁘다 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거래에 올라온 재화인가 하는 기준이 갈수록 제멋대로 되고 있다는 점이다. 카페 종업원이 고객 응대에서 제공해야 할 노무는 고객이 주문한 메뉴를 안전하고 정확하게 제공하는 것이지, 어법에도 맞지 않는 존댓말을 사용해가며 고객을 상전으로 모시는 게 아니다. 콜센터 상담노동자들이 민원인들에게 제공해야 할 노무는 의문점이나 불만 사항을 접수해 해결방안을 안내해주거나 대신 해결해줄 만한 부서로 연결해주는 것이지, 민원인들의 갈 곳 잃은 분노와 욕설을 묵묵히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언론이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상품은 사회와 문화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시선을 보편인권의 기준에 맞춰 담아낸 기사들이지, 실재하는 혐오를 부정하려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의 경계선을 “돈을 냈으니 돈값을 하라”는 말로 지우려는 이들 속에서 세상은 점점 얄팍해진다.

세상에는 예의나 양식처럼 돈으로 사거나 앗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으며 사생활은 누구에게나 보장이 되어야 하는 천부인권이라는 기본적인 명제조차 흔들리는 마당이니, 소비자본주의적으로 다시 정리해보자.

그들은 사생활 일부를 팔았을 뿐

일상 기반의 관찰 예능에 출연하는 이들은 시청자들이 보내준 관심과 시청률에 대한 대가로 제 사생활의 일부를 제공했다. 그 지점에서 이미 거래는 끝났다. 그들은 방송에 나갈 만큼의 사생활을 판 것이지, 그 외의 모든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매물로 내놓은 게 아니다. 판매자가 팔지 않겠다는 물건을 “왜 안 파느냐”며 역정을 내는 건 소비자의 권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동차 매장에서 전시된 판매용 차량 말고 딜러가 타고 다니는 차를 팔라며 억지를 부리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카페 종업원에게 밑도 끝도 없는 극존칭을 요구하고, 콜센터 직원에게 내 분노를 군말 없이 받아내기를 강요하고, 연예인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사생활도 모두 다 오픈하기를 요구하는가?

공자 왈 맹자 왈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이라면 남도 당하기 싫어할 것이라는 건 기본적인 일이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돈을 빌미로 부당한 처우를 강요받기 싫다면, 그 부당한 일을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니까 너라고 예외는 아니다”라며 타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같이 그런 부당함을 근절할 방안을 찾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일이다. 그리고 그 방안을 같이 고민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단 나부터 ‘고객’이라는 갑의 지위를 부당하게 휘둘러 우위에 서는 일을 멈추는 것, 이효리 이상순이 사는 집 주소가 어딘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부터 함께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