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발포 명령권자 밝혀낼 단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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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505보안대(광주)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 문서.

23:00 완전 무장한 폭도가 1만여명에 달하고 있음.
2 3:15 전교사 및 전남대 주둔 병력에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 (1인당 20발 )
*광주 소요가 전남 전 지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마산주둔 해병 1사단 1개대대를 목포로 이동 예정 .

80년 5·18 당시 군 당국이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도록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군 내부 기록이 처음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네차례 5·18 조사에서 ‘현장 지휘관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을 뿐 상부 명령에 의한 발포는 없었다’고 주장해온 군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24일 5·18기념재단이 확보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505보안대(광주지역 관할부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 문서를 보면, 80년 5월20일 ‘23시15분(밤 11시15분) 전교사 및 전남대 부근 병력에게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이었다. 당시 3공수여단장인 최세창 준장(육사 13기)은 당시 신군부 실세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제1공수여단장이었을 때 부단장을 지낸 전두환의 측근이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80년 5월20일 밤 10시30분 ‘경계용 실탄’을 위협 사격용으로 공수부대 각 대대에 지급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기록 보고서를 보면,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에 있던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전남대에 있던 여단본부 병력에게 명하여 광주역 인근에서 차량 돌진 등의 공격을 감행하는 시위대에 고전하는 여단 병력에게 실탄 지급을 명령하고 결국 3공수여단 소속 군인들이 발포했다고 명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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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낸 '광주사태체험수기'(1988)에도 이상휴 중령(당시 3공수여단 13대대 9지역대장)이 “전남대학교에서 급식 후 중대장 지역대장에게 M16 실탄 30발씩 주고, 사용은 여단장 통제”라는 부분이 나온다. 제2군사령부로부터 발포 금지, 실탄통제 지시(5월20일 밤 11시20분)가 있었는데도 5월20일 밤 광주 시민 4명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하지만 2007년 참여정부 때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의 발포 명령자에 대해서는 “판단 불가”라며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5·18기념재단이 공개한 이번 자료는 당시 공수부대가 20일 밤 실탄 지급뿐만 아니라 상부의 발포명령을 하달받았다는 정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정수만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보안대가 작성한 군 자료에 발포명령 하달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 발포 명령권자가 누구였는 지를 밝히는 단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 문서엔 당시 계엄사령부가 공군 전투기 폭격 대기 명령에 이어 해병대 병력을 광주에 파견하려고 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이 상황일지엔 ‘마산 주둔 해병 1사단 1개 대대 목포로 이동 예정’이라고 나와 있다. 수원 제10전투비행단 101대대 F-5E/F 전투기 조종사들이 5월 21~22일 광주로 출격하기 위해 공지대 공격 폭탄을 싣고 대기중이었다는 증언에 이어 해병대까지 동원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신군부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투입한 공수부대 등 육군 뿐만 아니라 공군(전투기), 해군 예하인 해병대 등 육해공 국군병력을 모두 동원하려했었다는 점은 신군부가 광주시민을 섬멸할 ‘적’으로 간주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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