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한열 열사 어머니가 30주년 추도식에 참석해 "잊지 않고 불러줘 감사하다"고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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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sa may

▶ 촛불이 광장을 가득 메웠고 기세에 놀란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했다. 현직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 교도소에 갇혔다. 티끌만한 폭력 없이 이뤄진 드라마였다. 그 겨울을 지나고 맞은 6월이 아들이 떠난 지 꼭 30년 되는 6월이다. ‘그때도 최루탄이 없었다면.’ 드라마를 지켜보던 내내 어머니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한겨레>는 고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의 ‘2017년 6월9일’을 함께했다. 8일 진행한 사전인터뷰도 덧붙였다.

엄마는 알고 싶었다. 한열이는 살려고 도망가다 죽은 것일까, 아니면 군사 독재에 맨주먹으로 투쟁하다 죽은 것일까. 최루탄을 맞고 앞으로 팍 고꾸라지는 순간, 무슨 말을 했을까.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쓰러졌을까, 아니면 그저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쓰러졌을까.

1987년 6월9일 오후, 2남3녀 중 넷째 큰아들이었던 이한열(사망 당시 22)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다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피를 흘리던 아들의 모습은 6월 민주항쟁에서부터 6·29 대통령 직선제까지 이어지는 개헌의 기폭제가 됐지만, 아들은 26일 뒤인 7월5일 최루탄 파편에 의한 뇌손상으로 인해 끝내 숨졌다.

“뭔가 알고 싶어서 거리에서 살아왔지만,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뒤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내 아들만 없어져버렸네요.”

30년이 지났지만 ‘건강했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엄마가 채 하지 못한 질문에 답해줄 유일한 사람, 아들은 이 세상에 없다. 답을 얻지 못한 엄마는 30년간의 삶에 대해 “허탈하다”고 했다.

이한열 피격 30주기를 맞아 9일 서울 연세대학교, 시청광장 등에서 이한열 기념 문화제가 진행됐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77)씨는 아들이 피격된 학교와 아들의 장례 행렬이 이어진 거리 위를 30년 만에 다시 걸었다. 6월이 되면 가장 바빠지는 삶을 살았던 배씨의 발걸음엔 지난 30년의 모진 세월이 엉겨붙어 힘이 실렸다. 비가 내리고, 햇볕이 내리쬐는 땅 아래 내디딘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두 아들을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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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있대요. ‘못 가’ 소리 못하죠.”

9일 오전 11시. 옷깃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 모양의 배지를 단 배씨가 벽화 ‘청년’ 복원 기념식이 열리는 서울 경희대학교 문과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경희대에서도 와보라고 해서, ‘못 가’ 소리 못하고 온 거죠. 행사 자체가 이한열이에 관한 것이란 말이에요. 그분들이 그때 당시 벽화를 그려 놓은 것을 복원을 했다고. 자기들 학교 동기도 아닌데, 그런 거 생각하니까 참 고맙더라고요.”

‘청년’은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해 1989년 경희대 문과대학(당시 문리대학) 흰색 벽에 그려진 가로 11m, 세로 17m 크기의 벽화다. 6월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통일과 민중에 대한 염원을 담는 의미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의 모습이 담겼다.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낡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화를 경희대학교 졸업생들과 학생들이 지난 5월28일부터 2주간 복원했고, 이날 복원 기념식이 열렸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경희대학교 민주동문회 등 약 100여명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배씨가 축사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배씨는 경희대학교에서 ‘청년’의 이름으로 된 벽화가 남아 있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격스럽다며 말을 이었다. “30년 전 우리 청년들이 지금 반백이 됐습니다. 반백이 된 우리 청년들의 모습이 여기서 부활한 것 같습니다. 그 속에 내 아들의 모습도 있겠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5, 4, 3, 2, 1!”

참가자들의 구호와 함께 벽화를 가리고 있던 천막이 걷히자,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박수를 치며 벽화를 바라보던 배씨가 말했다. “벽이 저절로 무너질 일은 없으니, 우리 세대, 다음 세대 계속 보존되어야겠죠.”

“유가협 추모제,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벽화 복원 기념식이 끝난 뒤, 배은심씨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소속 회원들과 함께 벽화 ‘청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유가협 공동의장인 배씨는 고 장현구 열사 아버지인 장남수 유가협 회장, 고 김윤기 열사 어머니인 정정원 부회장 등 유가협 회원들 10여명과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배씨에게 유가협 회원들은 같은 고통을 안고 사는 ‘가족’이나 다름없다. 1987년 7월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고통스러워하던 배씨는 그해 8월 유가협 창립 1주기 행사에 참석했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만나 큰 위로를 받았다.

유가협 활동 덕분에 전국의 시위 현장을 누비는 삶도 시작됐다. 배씨는 1998~99년 유가협 회장을 맡아 자식 잃은 부모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1999년에는 국회 앞에서 274일간 천막농성을 하며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할 말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활동이었다.

“유가협에서는 매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요. 그때(80~90년대) 많은 아들딸들이 죽어갔고, 하나같이 돌아가면서 추모제 하는 거예요. 지난번에도 숭실대 박래전 추모제에 가서 사람들 만났는데, 매번 하는 일이 그거예요. 추모제에 못 가면 내가 섭섭할 정도로,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불러줘서 감사해요.”

이한열 열사 30주기 추도식이 진행된 서울 연세대학교 한열동산. 오후 3시가 되자 뜨거웠던 햇볕이 걷히고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769757922’.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된 날짜(1987.6.9), 숨을 거둔 날짜(7.5), 장례식을 치른 날짜(7.9), 숨졌을 당시 나이(22)를 연이어 새긴 기념물 앞에 배은심씨가 앉았다. 이한열의 대학 후배들이 매년 6월마다 치른 추도식도 올해로 서른번째다. 배씨는 지난 3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도식에 참석했다.

“당신께서 ‘이제 사람 사는 세상이 됐느냐’ 하고 물으면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후배가 되고 싶은데, 후배들에게 내준 숙제가 너무 어려워 입이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30년째 지속되는 침묵의 호통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김현수 연세대학교 상경·경영대 학생회장의 추도사가 시작되자, 추도식 식순이 적힌 종이를 쥐고 있던 배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한열을 잊지 않고 행사 준비해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힘든 몸을 이끌고 찾아와주신 어머니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배씨는 추도사를 끝낸 김씨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추도사가 끝나고 헌화가 시작되자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연세대에서 한열이 후배들이 추모제 해준 것도 30년이 됐네요. 이한열이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는 게 참, 고맙기도 하고 때로는 미안한 감도 들고.” 배씨는 한열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후배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매년 힘든 일을 하게 한다는 생각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추모제 할 때는 도서관 앞에서 하는데, 거기서 마음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학생들 공부하는데 시끄러우니까. 그래서 항시 미안했어요.”

미안한 마음은 아들의 친구들에게까지 옮겨갔다. “이한열 부축했던 종창이가 30년 동안 상당히 마음이 아팠어요. 오늘부터 종창이 (그) 마음 털어버리고 세상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상호(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총학생회장도 마찬가지예요. (한열이가) 좋은 후배가 됐으면 괴롭게 안 했을 텐데, 그것이 참 괴롭네요. 이 나라가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지, 여기서 추모제 하는 것은 부속에 불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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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그때 상황 기억하는 마음이 고맙죠.”

1987년 7월9일. 무더웠던 초여름날이 아들의 장례식이었다. 끝까지 아들이 깨어날 것이라 믿었던 배은심씨는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연단에 올라 절규했다. “이제 다 풀고 가거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엄마는 영정사진 속에 담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연세대학교에서 서울시청 광장으로 이어진 장례 행렬을 따랐다. 시청에서는 1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저녁 6시. 30년이 지나 서울시청 광장에서 진행된 이한열 장례행진 재연 행사에서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의 ‘진혼의 춤’ 베가르기 춤사위 공연이 재연됐다. 30년 전 이애주 교수는 흰 민복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며 이한열의 운구 행렬을 이끌었다. 바람을 맞아 생명을 잇는다는 의미의 ‘바람맞이춤’이었다. 연세대학교 동문들과 이한열 장학생들이 양쪽에서 베를 들자, 이애주 선생은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베를 가르며 당시 춤을 재연했다. 배씨는 30년 전 그날이 떠오르는 듯 공연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이애주 선생님이 춤췄던 것도 기억이 나요. 이 춤이 이쁘게, 멋지게 추는 춤이 아니잖아요. 춤으로 인해서 그때 상황을 기억하는 거라서, 춤추시는 분의 마음이 있어야 춤이 안 나오겠습니까.” 배씨가 말했다. “춤추시는 분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때로는 춤으로 인해서 눈물도 나오고 참 고맙습니다.”

배씨는 이날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만났다.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30명의 ‘416 합창단’은 노란색 옷을 입고 광장 무대에 올라 ‘아름다운 사람’, ‘약속해’라는 제목의 곡을 합창했다.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곧은 자세로 무대를 바라보던 배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지난달 17일, 전라남도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온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만난 배씨의 영상이 화제가 됐다. 배씨가 그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내 맘이 먼저 아파야 이 아픔도 전달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 마음이 그 사람들보다 먼저 아팠고, 그것이 전해진 거예요. (세월호 가족들은) 지금이 참 많이 울 때예요. 난 30년이 지나도 많이 울고 있는데 이제 3년이 됐잖아요. 눈물이 밥이에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밥은 먹으니까. ‘눈물이 밥이다.’ 그래요 항시. 똑같은 사람들끼리 뭔 얘기를 하겠어요. 밥 먹고 힘내시오. 그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자꾸 30년 해싸니까 이상해. 엊그제 같은데.”

지난 7일 저녁,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이한열 30주기 기념전시회 ‘2017이 1987에게’에 참석한 배은심씨는 30년 만에 공개된 아들의 피격 직후 사진 앞에서 한참을 흐느꼈다. 혹여 손으로 느껴질까. 배씨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는 아들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훔치기를 반복했다. “30년을 살았는데 남는 건 사진밖에 없고, 참 허탈하네요.”

지난 30년, 배씨의 삶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아들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좋아도 좋은 것도 모르고, 항상 마음이 괴롭게 살았던 나날들’이었다. 배씨는 최근 아들의 사진을 신문에서 봤을 때에도 마음이 아파 밥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항상 힘들어서 아침을 못 먹었어. 그러다가 점심때 늦게 배가 고프더라고. 그게 인간이야. 그래서 그것도 미워. 스스로 내가 미운 거야. 밥을 못 먹다가 오후에 누룽지를 끓여 먹고 그랬는데.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그게 30년 세월이야. 오히려 30년이라고 하는데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아직도 바로 어제 일 같아요.”

‘허탈했던’ 지난 30년의 시간. ‘집에 가만히 있으면 버틸 수가 없어’ 거리에 나선 그 시간들을 버틴 엄마는 아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을까.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한열아 왜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물어보고 싶은 것밖에 없어요. 30년 동안 갖고 있던 질문. 기가 막히니까 할 말이 없고, 그냥 왜 그랬냐고 묻고 싶고, 그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