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30주년: 이한열 열사 부축한 이종창 씨 '살아남은 자로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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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씨가 촬영한 사진. 이 씨는 이후 사경을 헤매다 그해 7월5일 22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우리가 구호를 2~3번 외치자마자 전경들이 최루탄을 일제히 쏘았습니다. 그리고 사복 경찰들이 밀어닥쳤습니다. 화염병 2개를 던지고 마지막으로 학교 쪽으로 뛰어들어가는데 정문 안쪽에 누군가 쓰러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8일 오전 파주시 와동동 소재 가람도서관에서 만난 이종창 관장(51)은 "1987년 6월을 잘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하면 힘드니까 정리가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쓰러진 한열이를 보고는 안전한 데로 옮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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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창 관장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고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년)의 죽음 당시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쓰러진 이 열사를 부축한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의 동갑내기 학생이었다.

이 관장에 따르면 1987년 6월9일은 유난히 쾌청한 날이었다. 서울 신촌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민주광장 집회에는 300~400명의 학생이 모였다. 하루 뒤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여는 ‘6·10 국민대회’(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집회였다.

스크럼을 짜고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고 맨 앞의 '소크조'(뒤의 집회행렬을 보호하고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하는 조)에 속한 남학생들이 정문 밖에 흩어서자 마자 일제히 최루탄 수십 발이 발사됐다.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바로 사람을 조준하다시피 해서 쏜 것이었다.

이종창 관장은 당시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누군가 쓰러진 것을 직감하고는 뛰어가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발견하고 처음에는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이한열은 힘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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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시위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로 한국을 찾은 네이션 벤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이 사진을 제공했다. 사진은 1987년 6월 9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영학과 2학년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도서관학과 2학년생 이종창씨가 뒤에서 부축하고 있는 모습.]



이한열을 안다시피 일으킨 그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어가는 이한열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로이터통신 기자가 찍은 이 사진 속 피 흘리는 젊은 청년의 모습, 부축한 이의 막막한 눈길은 독재정권의 폭압에 희생된 순수한 젊은이의 모습을 바로 보여주면서 보는 이들의 가슴에 '화인'(火印)을 남겼다.

"한열이를 한참을 끌고 올라와 테니스장(현재 공학관) 근처까지 왔어요. 힘들고 최루탄 가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학생 두 명이 제쪽으로 뛰어오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는 정신을 놓고 쓰러졌어요."

얼마나 시간이 흐른지 모른 채 눈을 떠보니 혼자 누워 있었다. 자신이 부축했던 이가 누군지 알지 못한 채 이종창 관장은 털고 일어나 다시 나가서 전경들과 싸웠다. 이한열이 쓰러진 후 연세대는 반독재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병원에 누운 이한열을 지키기 위해 학생들은 병원을 지켰고 경찰은 호시탐탐 학교 진입을 노렸다. 5일 후인 14일 '연세총궐기대회'가 열리는 날 이번에는 이 관장이 전경이 던진 돌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깨어나 보니 부모님이 와 계셨고 옆에 한열이의 어머니가 계셨어요. '바로 옆 침대에 한열이가 있다'면서 '친구냐'고 물으셔서 '친구는 아니다'고 대답했어요." 이한열의 고향은 전남 화순이고 이종창 관장의 고향은 전남 영광이라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그리고 종로학원을 같은 시기에 다닌 것도 같지만, 둘은 이전에는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그 후 이종창 관장은 두 차례의 뇌수술을 받았다. 최루탄을 맞은 지 약 한 달 후인 7월5일 이한열은 운명했고 세월은 30년이 흘러 이 관장은 당시 자신의 나이 또래의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다. 이한열의 죽음은 사회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어떤 개인들에게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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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9일 열린 6월 항쟁관련 시청 앞에 모인 이한열 장례식 행렬 모습.]



"한열이의 아버지는 한열이가 죽은 지 1~2년 후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한열이의 어머니(배은심 씨)는 그 후 투사가 되어서 수년간 전국민족민주주의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장을 지내기도 하시면서 계속 투쟁 현장을 지키셨어요. 그리고는 저를 만나면 '아들 대신으로 생각하겠다'면서 손을 꼭 잡고 등을 감싸안아주곤 했어요."

"평생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해 도서관학과를 진학했던 이종창 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빈곤층에도 책을 읽을 기회를 주자는 생각에 달동네인 난곡에 '난곡주민도서관'을 여는 일에 수년간 매달렸다. 그러다가 연세대 중앙도서관 사서로 취직하면서 20여 년간 그는 매일 이한열이 쓰러졌던 교문을 지나 직장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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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故 이한열 열사 26주기 추모제가 열리는 모습]



"해마다 5월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어요. 6월 초에는 걸개그림이 걸리고 9일에는 추모식이 열리죠. '어떡해야 하나', '오늘쯤은 그림이 걸려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다가 걸개그림을 보면 고개를 푹 숙이고 사무실로 들어가요. 그런데 밖에서 어느날 담배를 피우다가 잊어버리고 걸개그림을 정면으로 봐버렸어요. 파란 하늘에 하얀 뭉개구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그 그림을 보면서 눈이 시리면서 마음도 시렸어요."

"'시대의 대변자'가 된 부담감과 나만 살아남은 데 대한 미안함, '떳떳하게 살았다'는 자긍심이 섞인 느낌"이라고 '시린 느낌'을 다시 설명하면서 이종창 관장은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참여하고 가꿔가면서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장은 "9일 저녁 6시 30분부터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이한열문화제'가 열린다. 100만 인파가 모였던 이한열의 장례행렬을 재현하고 치열하고 비통했던 당시를 담은 사진 전시회도 열 예정"이라며 "한열이를 잊지 말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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