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파리의 연인'의 결말은 출구가 없는 미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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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SBS에서 방영된 ‘파리의 연인’은 당시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였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 드라마의 결말이 가져온 충격 또한 하나의 현상이었을 정도. 당시 시청자들은 마지막회에 가서야 그동안 지켜보았던 20부의 이야기가 단지 주인공의 상상이었다는 실체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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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를 쓴 작가는 ‘태양의 후예’와 ‘도깨비’의 김은숙 작가다. 그는 6월 2일 보도된,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결말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간스포츠’ - [취중토크③]김은숙 ”'파리의 연인' 결말은 아직도 반성 중이죠” -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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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작가의 말은 아래와 같다.

“그때는 그 엔딩이 보너스트랙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시청자가 못 받아들였으면 그건 나쁜 대본이란걸 깨달았어요.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재미있어야하죠. 저 혼자 재미있으면 일기를 써야겠죠. 시청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욕을 들으면 그건 잘못이에요."

김은숙 작가가 당시의 엔딩을 ‘보너스트랙’으로 여겼다는 건, 이미 시청자들이 만족할 만한 엔딩을 만든 후에 새로운 엔딩을 덧붙였다는 이야기다.

‘파리의 연인’에서 강태영(김정은)이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한기주(박신양)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보낸다. “나 유치한 말 한마디 할까? 사랑하니까. 보내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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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게 태영은 유학을 떠나는데, 이어 한기주도 모든 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파리로 떠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도시에 있지만, 우연히 스쳐지나갈 뿐 만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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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한기주와 강태영은 그들이 1회에서 재회했던 분수앞에서 다시 만난다. 한기주는 방금 분수에 동전을 던졌던 상황이었다.

  • 마지막회의 분수대 장면
  • 1회의 분수대 장면


강태영을 본 한기주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소원 빈 거 알아? 샌드위치 같이 먹을 사람 보내달라고?” 두 사람은 함께 세느강변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페이드아웃.

여기까지가 그냥 이대로 끝났어도 될 엔딩일 것이다. 어쨌든 두 연인은 파리에서 다시 만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페이드아웃에 이어 장면이 전환되면, 갑자기 큰 여행가방을 든 태영이 파리에 나타나는 장면이 시작된다. 그녀는 분명 지금 막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는데, 그녀의 뒤에는 수트 차림의 한기주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때 들리는 나레이션과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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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태영은 처음 파리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아름다웠다. 그때 태영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등 뒤에 앉은 그 남자를 평생 사랑하게 될 것을....”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 어떤 남자의 집에서 출장 파출부로 일하는 강태영이 그 집의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본 모든 게 이 여자의 상상에서 나온 거라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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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고, ‘파리의 연인’은 또 다시 강태영과 한기주의 미래를 열어놓았다. 강태영은 거리에서 인형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그녀의 좌판을 망가뜨리고, 이때 하필 그것에 자동차를 주차해놓은 한기주가 누명을 쓰는데, 강태영이 한기주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파리의 연인’의 1회를 본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다. 1회에서 파리에 있던 한기주와 강태영이 처음 만났던 이야기의 서울버전이 이 마지막 엔딩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파리의 연인’의 마지막 엔딩에는 더 흥미로운 한 컷이 있었다. 바로 아래와 같은 인서트 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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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설을 쓰던 강태영이 출장 파출부로 일하던 어떤 남자(사실 한기주)의 집에서 나와 우편물 함앞에 놓인 신문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신문의 1면에는 GD자동차 한기주 사장이 파리에서 피앙새와 만나 해피엔딩을 맞이했다는 내용이 써있다. 1면에 박힌 사진은 분명 김정은과 박신양이지만, 신문을 보는 강태영은 “와, 좋겠다”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반응한다.

이 엔딩을 정리하면, ’파리의 연인’에는 한기주와 강태영은 여러 분신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회부터 20회의 엔딩 약 5분전까지 보았던 한기주와 강태영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쓴 강태영-1과 그녀가 만나게 될 한기주-1이 있다. 그리고 강태영-1이 쓴 소설의 내용과 거의 모든 게 흡사한 인생을 살고 있는 신문속의 강태영-2와 한기주-2가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 분신들의 이야기가 M.C 에셔의 판화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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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다시 정리해보자. 강태영의 이야기를 쓰고 있던 강태영-1은 신문에서 강태영-2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한기주-1을 만난다. 아마도 그녀는 한기주-1과의 만남에서 신문에서 본 강태영-2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한기주-1과 사랑하면서 강태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반복. 그런데 이 강태영은 알고보니 강태영-1이 쓰던 이야기였고, 그녀는 강태영-2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다시 한기주-1을 만나 강태영이 될 것이다. ’파리의 연인’의 마지막회가 준 충격은 이 미로의 복잡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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