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 아들, 민주화 운동, 인권 변호사...기득권에 맞서온 64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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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JAEIN
SEOUL, SOUTH KOREA - MAY 2: Moon Jae-in, the presidential candidate of the Democratic Party of Korea poses for photograph ahead of a televised presidential debate on May 2, 2017. South Korean voters will head to the polls to replace ousted leader Park Geun-hye on May 9. (Photo by Kim Min-Hee-Pool/Getty Images) | Pool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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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피난민 집안의 장남, 비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외 대학) 출신 운동권, 지방의 인권변호사, 영남의 김대중(DJ) 지지자…

9일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문재인 당선인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는 대한민국 ‘비주류’의 흔적이 가득하다. 일부는 타고난 것이지만, 스스로 뛰어든 삶에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대한민국 ‘주류’를 바꾸고 싶었다”고 외치는 문 당선인이 걸어온 64년, 그 삶에는 ‘사회적 보편상식’에 맞춰 살려다 보니 역설적으로 기득권 세력에 맞서 싸우게 된 한 시민이 국가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피난민 아들, 유신반대 민주화운동하다 인권변호사로?

■ 운동권, 특전사 1953년 1월24일 문 당선인은 경남 거제의 가난한 피난민 집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가난은 그에게 지워야 할 부끄러운 흔적은 아니었다. 부자에 대한 ‘부러움’을 키우기보다는 보통 서민들이 겪는 설움과 억울함에 ‘공감’하는 마음을 키웠다. 1972년 어려운 형편에 무리해 들어간 경희대 법대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보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운동권 학생’이 된 것도 암울한 독재의 현실에 눈감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 당선인은 유신 반대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975년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다음날 유신독재 화형식을 주도하다 구속됐다. 석방된 뒤에는 강제로 군에 징집됐다.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억지로 끌려갔지만 군 생활은 의외로 체질에 맞았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 최정예 요원으로 선발돼 미루나무 제거작전에 투입됐고 표창도 받았다. 특전사 경험은 야당 정치인에게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종북’, ‘안보불안’ 딱지를 떼게 해준 소중한 자산이 됐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들, 특전사 출신 문재인 앞에서 안보 이야기 하지 마시라”는 문 당선인의 호통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사람들은 그를 ‘안보를 가장 잘할 것 같은 후보’로 꼽았다. 인생, 새옹지마다.

1978년 제대했지만, 복학이 안 됐다. 구속 전력 때문이다. 당연히 취직도 못 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된 건, 그 시절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께 아들이 잘되는 모습 한번 보여주지 못했다는 회한 때문이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희망했던 판사가 될 수 없었다. 운동권, 시위 경력 때문이었다.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묻는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의 물음에 “내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 친구·동지, 노무현을 만나다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한 문 당선인은 1982년 제2의 고향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평생을 따라다닐 ‘운명’적 인연,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처음엔 그저 ‘동업자’였다. 승소율이 높아 잘나가던 변호사와, 판사 임용이 좌절된 초짜 변호사는 부산 서구 부민동 법원 후문 근처에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여섯살 나이 차이에도 두 사람은 선후배 관계를 넘어 ‘동지’로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말로 문 당선인에 대한 신뢰를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찾아오는 사건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열심히 공감하면서 열심히 변론”하다 보니 어느덧 부산은 물론 울산·창원·거제 지역을 망라하는 노동·인권변호사가 돼 있었고, 재야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되었다. ‘부산·경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창립한 데 이어, 전국에서 처음으로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만드는 데 참여하며 1987년 6월항쟁을 열어나갔다.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한 6월항쟁의 기억은 살아온 동안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 3당 합당에 반대해 부산에서 민주당 깃발을 들고 줄곧 김대중 지지를 외쳤지만, 그에겐 ‘변방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녔다.


■ 마지막 비서실장, 왕수석
변방의 인권변호사였던 문 당선인이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한 건 2002년 대선 직후다. 권위주의 타파를 내건 노 전 대통령이 ‘군림하지 않는 청와대’를 만들자며 문 당선인에게 ‘민정수석’을 맡아달라고 한 게 계기였다. “당신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게 아니냐”는 말, “검찰을 장악할래야 할 수 없는 비검찰 출신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해 ‘초과권력’을 내려놓는 것, 그를 통해 정치적·시민적 민주주의 완성하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호소에 떠밀려 그는 청와대로 들어갔다. “정치하라는 말 하지 마라, 민정수석으로 끝낸다”며 노 전 대통령의 다짐을 받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지만, 노 전 대통령 탄핵 소식에 변호인단으로 불려왔다. 이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2007년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하는 날까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함께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수석과 비서실장을 두루 거친 그의 경력은 ‘국정운영 경험이 있는 준비된 대통령’ 이미지를 구축하는 주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하지만 ‘왕수석’, ‘왕실장’으로 불리며 노무현 정부에서 명실상부한 2인자였던 그에게 ‘참여정부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약한 고리이기도 하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상주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아침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경남 양산으로 낙향한 문 당선인을 다시 정치권 한가운데로 소환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에 전국이 울분으로 들끓던 그때, 그는 국장을 이끄는 ‘상주’로 국민 앞에 섰다. ‘정치적 보복이 부른 타살’이란 비통함 속에서 절제력과 의연함을 보여준 상주 문재인을 사람들은 주목했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백원우 전 의원이 ‘사죄하라’고 항의한 데 대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식을 줄 모르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고조되면서, 그를 차기 대선주자로 호명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총선으로, 대선으로…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문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됐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권교체라는 ‘대의’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그는 2011년 말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한 데 이어 2012년 4·11 총선에선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2년 6월17일에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처럼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많은 이들이 ‘문재인 대망론’을 얘기했다. 하지만 당내 경선은 룰 합의에만 한달 이상을 허비하면서 삐거덕거렸다. 승자에게 힘을 모아주는 축제 같은 경선은 온데간데없었다. 경선이 끝날 무렵엔 “다시 하나가 되기 힘들 정도로 당이 분열”되고 말았다. 기존 민주당 조직(민주캠프)과 학자·정책전문가 그룹(미래캠프),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 조직(시민캠프) 등 세바퀴로 돌아가는 선대위는 ‘구심’ 없이 따로 돌며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어진 안철수 후보와의 야권후보 단일화 논의도 거친 가시밭길이었다. 새누리당은 일찌감치 박근혜 전 대표를 대선 후보로 확정짓고 앞서가던 터였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등 대선 이슈를 선점하고, ‘노무현 대 박정희 프레임’으로 선거구도를 치고 나오는 데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국민들의 강력한 정권교체 열망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52 대 48’, 뼈아픈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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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서거 뒤 ‘정치의 길’, 대선 재수 끝에 청와대 입성

■ 세번의 죽을 고비 대선 패배 후 침잠했던 문 당선인은 2013년 <1219 끝이 시작이다>란 책을 펴내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엔엘엘(NLL·서해북방한계선) 포기 논란, 그리고 나날이 심화되는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등이 그를 다시 정치 일선으로 불러낸 것이다. 이번엔, 등 떠밀리듯 나온 2012년 대선 때와는 사뭇 달랐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권력의지’보다는 ‘역사의식’, ‘소명의식’”이라고 답하던 그는 “적어도 (2012년 대선 때) 대통령이 되려는 열정이나 절박함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깨끗이 반성했다. “대선 패인은 한마디로 평소 실력 부족, 준비 부족”이라고 결론을 내린 그는 2015년 2·8 전당대회로 내달렸다. 총선·대선 승리의 주춧돌을 놓기 위해 당의 체질을 바꾸는 당대표가 되겠노라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꽃가마 태워 대선으로 데려갈 텐데, 흠집만 잡힐 게 뻔한 대표를 맡아 뭘 하겠냐”는 당내 원로, 측근들의 반대도 그를 막진 못했다. “이번에 당대표가 안 돼도, 당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도, 총선을 승리로 이끌지 못해도, 그다음 제 역할은 없다”며 “세번의 죽을 고비”를 스스로 넘겠다고 선언했다.

당대표 취임 이후 10개월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달 만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직후 당내 비주류 쪽에서 불붙은 책임론은 ‘초선 대표의 리더십 논란’으로 비화했다. ‘재신임 카드’로 어렵게 통과시킨 ‘공천 혁신안’에 반대한 안철수 전 대표 등이 2016년 4·13 총선을 눈앞에 두고 대거 탈당했을 때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는 2012년 대선 때 경쟁자인 박근혜 후보 쪽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수도권에서 선전한 것은 물론 부산·경남에서 1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며 총선에서 승리했다. ‘정계은퇴’까지 공언하며 공들인 호남에서 국민의당에 참패한 것은 정치적 부담이 됐으나, “정치력이 크게 성장했다”는 평가가 당 안팎에서 나왔다. “비서실장 깜냥밖에 되지 않는다”는 냉소는 옅어졌고 명실상부한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했다.

■ ‘문재수’ ‘세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자, 곧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곧장 조기대선이었다. 시기가 당겨지긴 했지만, 5년을 준비해온 ‘대선 재수생’은 이제 2012년처럼 머뭇거리지 않았다. “더이상 운명은 없다. 숙명이다”라는 생각으로 일찌감치 경선 캠프를 꾸리고 대선으로 내달렸다. ‘친문(재인)-비문 프레임’을 깨기 위해 측근들을 뒤로 물리고 당내 다양한 인사들을 기용하며 캠프의 울타리를 넓혀나갔다.

‘확장성이 없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촛불 민심’은 줄곧 그의 대세론을 떠받쳤다. ‘좌’에선 이재명 성남시장이, ‘우’에선 안희정 충남지사가 균형을 맞춰준 덕분에 지지율은 20%에서 30%대로, 또다시 40%로 서서히 그리고 견고하게 차올랐다. 치열했던 경선이 끝난 뒤, 경쟁했던 주자들 모두가 대선 승리를 위해 손을 맞잡았다. ‘당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다짐 그대로, 선거대책위원회는 하나로 굴러갔다. 5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손학규 전 대표에 이어 선거 막판 김종인 전 대표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친문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탈당했지만 파장은 미미했다. 분열됐던 보수가 ‘재결집’에 나섰지만, 국민들의 정권교체 열망 앞에선 끝내 맥을 추지 못했다.

19대 대통령이 된 문 당선인은 적폐를 청산한 바탕에서 ‘국민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으로 반목하는 대한민국, 영남과 호남 등 지역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을 하나로 만드는 시작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박정희 시대’가 끝이 났다면, 문재인 정부를 성공시켜 ‘노무현 시대’에도 종언을 고하고 진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이를 통해 “정치의 주류는 국민, 권력의 주류는 시민, 그래서 국민이 대통령”인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문 당선인은 이 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편가르기’나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진영은 물론 대한민국의 주류들은 ‘문재인이 당선되면 나라가 절단 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비주류의 마음을 이해하며, 주류를 설득해 나가는 일. 문재인 당선인 앞에 놓인 진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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