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트랜스젠더 변호사를 만났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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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을 취재하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차별금지법과 관련해 <한겨레21>의 긴 인터뷰에 응해준 트랜스젠더 한희씨가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변호사가 됐다. 그녀가 앞으로 부딪혀야 할 벽, 바꿔갈 세상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한희씨의 기나긴 사연에 귀를 기울여보면, 한국 사회의 ‘차별’이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성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다.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문재인·안철수 두 대선 후보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라는 한 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견해를 함께한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낮은 출산율 때문에 동성혼이 불가하다”고 했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종교의 자유 때문에 동성혼은 안 된다”고 했다.


두 후보는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이미 ‘차별’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차별을 금지하는 별도의 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정의하는 차별은 “합리적 이유 없이 (중략) 누군가를 우대, 배제, 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다. 동성 간 사랑은 차별의 합리적 이유가 될까. 뜨거웠던 촛불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후보들은 차별 문제는 차갑게 외면하고 있다.


국방부는 시대 역행적인 폭거에 나섰다. 육군 보통군사법원은 4월17일 ‘동성애자’ 군인인 대위 한 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현행 군형법에 따르면 동성 간의 성관계는 합의된 것이라도 불법이다. 그의 모친은 탄원 호소문을 통해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혼란스럽긴 하지만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죄가 아니라는 거, 그게 부끄러운 일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고 말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면 한국 사회 내의 차별이 근절될 수 있을까. 한희씨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일까. 다른 이유는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거대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강고한 ‘인식의 벽’을 두려움 없이 두드리는 이들과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더 절실히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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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잘 몰랐다. 제도교육을 받을 때, 소년은 늘 ‘우월’한 존재였다. 강원도의 작은 바닷가 도시에서 또래 가운데 공부를 제일 잘하던 착실한 학생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던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생각은 했다.

‘내가 남들과 조금 다른가.’

억눌렀다. 그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했다. 학교라는 제도의 틀은 빡빡했고, 벗어날 생각을 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반듯해, 벅찼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애써 적응하며 살았다. 아니, 숨길 수 있었다. 내가 좀 다르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묻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됐다. 아니 드러낼 수 없었다. 겁났다. 사실 “드러낼 생각을 아예 못”했다.

남성, 여성, 그리고 ‘있어선 안 되는 것’

물론 알고는 있었다. 1999년이던가 2000년이던가 ‘하리수’가 세상에 나왔다. 트.랜.스.젠.더. 그때 처음 들었다. 멈칫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인터넷에서 ‘여장 남자’ ‘남장 여자’를 검색한 적이 있다. ‘내가 그런 것은 아닐까.’ 그때도 혼자만, 생각만, 했다. 하리수 기사를 읽을수록 ‘그녀’의 경험과 소년의 경험은 실체적으로 겹쳤다.

생각해본다. 왜 겁났을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강원도라서, 작은 도시이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남녀를 벗어나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런 사람’이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차별은 공기처럼 사회를 흘러다녔다.

그래서 되뇌었다. “평범한 삶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냥 고등학교 졸업하면 좋은 학교 가고, 취업하고, 양복 입고 회사 다니고, 선후배들과 어울리고.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대학에 갈 때쯤 겨우 고향을 떠났다. 멀리 가지 못했다. 바닷가 작은 도시에서 바닷가 공업 도시로 왔다. 어릴 적부터 로봇공학자가 되고 싶어 선택한 학교였다. 포항공대 기계공학과. “삼척의 친척들이 플래카드를 걸겠다”고 했다. 말렸다. 남자만 득실득실할 거라는 얘기를 숱하게 들었지만 어차피 소년은 늘 혼자였다. 상관없었다. 박사가 될 때까지 열심히 공부만 할 생각이었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꼭 로봇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 와 드는 생각이지만, 그때도 잘 몰랐다.

고향을 떠날 때의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대학은 달랐다. 교실의 속박에서 놓여나자 봉인해둔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단 한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아팠다.

방황의 시간은 길었다. 오래 앓았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할 때쯤 다시 앓이가 시작됐다. 머리로 키워온 꿈들이 가슴에서 사라져갔다. 깊은 생의 우울증이 도졌다 번졌다 타올랐다. 스스로를 적대했다. “누구와도 거리를 뒀다.” 주위에는 온통 남자들뿐이었다. 공대 특유의 “으샤으샤 하는 분위기”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아니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 MT 때가 시작이었다.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남자들의 얘기”가 미치도록 싫었다. 대학을 다니는 모든 순간 철저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10년간 쌓아온 벽을 허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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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유일한 위안은 “머리를 기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남성성을 강하게 뽐내지 않던 친구 한둘과 얘기했다. 익숙한 생존법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그들로부터 나를 지킬 도리가 없다”고 믿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사람들은 “내가 게이라고 수군덕거렸다”고 한다. “어떻게든 빨리 서울에 간다”는 생각만 했다. 포항에 살며 트랜스젠더를 딱 한 명 봤다. 졸업하기도 전에 “일할 수 있는 서울 회사”부터 찾았다. “삼척시청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를 마치고 27살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선 큰 건설회사 구매과에서 일했다. 당연히 학교보다 규율이 훨씬 더 셌다. “머리 자르고 양복 입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숨통이 트였다.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중에는 남자로 회사 다니고, 주말에는 커뮤니티 카페나 술집에서 정체성대로 살았다.” 사람들 눈에만 띄지 않으면 주말에 갈 데가 있고 놀 공간이 있었다. 짧게나마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해 또래보다 훨씬 돈 잘 벌고 커리어가 쌓일수록 더 윤택해질 삶이었다.” 그런데 편치 않았다.

다시 우울증이 찾아왔다. 혼자서 또 생각했다. “쌓은 게 많아질수록 무너뜨리는 것은 힘들어진다”고. 그때 처음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커밍아웃을 하자”고 생각했다.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쌓은 것이 한번에 무너지고 만다.” 겁이 나서 혼자 다독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경력을 지울까. 그러면 남자로 살아온 모든 걸 감춰야 할 텐데. 그런 삶이 가능할까.” 어쩌다 이렇게 30년을 살았는데, 또 60살까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불안해졌다. 회사 규율이, 주중의 삶이, 남자로서의 생활이 온통 자괴감뿐이었다. 서서히, 무너지지 않게 결심을 굳혀갔다. “평범하게 사는 건 안 된다.”

회사부터 관뒀다. “커밍아웃을 하더라도 차별 없이 먹고살려면 전문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직업은 변호사뿐이었다. 주변에 그런 이유로 법조인을 택한 성소수자가 몇 명 있다. 로스쿨에 진학했다. 전셋집을 학교 근처 관악구로 옮겼다. 계약할 때는 남성이었다. 주인집이 4층에 있고 내가 5층에 살았다. 학교에 가니 다시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 “옷은 철저히 유니섹스한 것만 입었다.” 이번에도 학교에 “게이다. 성별 구분이 안 된다”고 소문났다. 아무도 대놓고 뭐라 하지 않았다. 적어도 “법을 공부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행운이었다. “아침저녁으로 헌법을 보던 사람들이 누군가를 외모로 차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로스쿨 1학년을 마치고 한 학기 휴학을 신청했다.

그때 결심했다. “생각한 대로, 10년 동안 쌓아온 걸, 평생 망설이기만 했던 벽”을 스스로 허물기로. 어제와 별달리 변한 것도 없지만 경이로운 해가 떠오른 것은 “딱 서른 살 되던 아침”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남들 보기 반듯했던 삶의 궤적을 꺾어버렸다.

“원래대로, 나대로 여성으로 살자.”

내 이름은 박한희. 그냥 한희라고 부른다. 운명인지 부모님은 내게 중성적인 이름을 지어줬다.

한희씨는 제일 친한 언니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너, 참 여성스럽다”는 말을 달고 살던 언니였다. “10년 동안 쌓아온 결심”이었는데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화의 박자가 계속 틀렸다. 한희씨의 얘기가 느릿한 진양조장단이라면, 언니 반응은 휘모리장단이었다. “그래, 너 그럴 줄 알았다. 애인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언니는 구별을 못했다. “트랜스젠더라고 이야기했는데 언니는 ‘게이’라고 이해했다.” 당연한지도 모른다. 언니는 “트랜스젠더를 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사진은 여성, 주민등록번호 첫 자릿수는 ‘1’

한국 사회 구성원 누구도 사회적으로 ‘강요된’ 성 구분과 그에 따른 역할 외에 다른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학습하지 못했다. 그럴 기회는 아예 봉쇄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적 존재로서 자기 인식이 후천적으로 획득된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사회에 차별이 여전히 공기처럼 흐르는 이유다. 그 받아들이지 않음을 한희씨는 이해한다. 그동안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한국 사회는 그런 이들을 그냥 배척해왔을 뿐이다.

천부적이라고 여긴 성별을 주체적으로 넘어서니 다음 고난은 상관없었다. 한희씨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육체적 성’과 태생적이지 않은 ‘젠더의 정체성’ 사이에서 자각했다. 그리고 불안이 사라졌다. “법이 나를 어떤 성으로 분류하건, 나는 나일 뿐이다.”

한희씨가 ‘진짜 나’를 찾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분증 사진을 싹 바꾸는 일”이었다. “주민등록증, 자동차운전면허증 사진을 바꾸러 갔을 때 공무원들 표정”을 아직 기억한다. 서른 살 되던 해, 2014년 이맘때 일이다. “운이 좋았던 걸까.” 공무원들은 힐끔거릴 뿐 시비를 걸지 않았다. 물론 그 뒤로 신분증을 확인할 때면 물어본다. 모습도 사진도 여자인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인 맞으세요”는 그나마 괜찮다. 택배 기사는 수령증을 적으며 “남자예요?”라고 묻기도 전에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2로 고쳐 적는다. 그냥 “예, 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남자로 입학해 여자가 되어 학교에 복학했다. 교수님을 찾았다. 커밍아웃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남녀 구별이 있다보니 여러 가지 불편할 텐데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 커밍아웃을 하고 만난 첫 번째 행운이었다. 학생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들 역시 “처음 보는 경우였을 텐데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복학 이후 종종 학교 게시판에 성소수자 혐오글이 올라오지만 한희씨를 직접 지칭하지 않았다. 다행이지만, 생각해본다. 로스쿨이란 곳이 “워낙 보수적이고 자기 바닥을 직접 드러내 보일 필요는 없는 곳”이니까. “대학원이다보니 학부처럼 끈끈하게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견디기 어려웠을까.

트랜스젠더는 성소수자 가운데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존재다. 사소한 것이 매순간 위협이 된다. 한희씨는 화장실이 제일 큰 문제였다. “1학년 때까지 남자 화장실에 다녔는데,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사람들이 받아줄지 걱정이었다.” 같은 과 여자애들이 화장실에서 나랑 마주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려웠다. 행여 모욕당할까 무서웠다. 그래서 복학 뒤 학교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마지막 학기 필수 실습도 고비였다. 충남 아산에 있는 경찰청 연수원 활동 실습을 가야 하는데 숙박이 문제였다. “성별 구분에 ‘여자’라고 적었지만 내 법적 성별은 1로 시작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판단할까 예측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교수님 도움으로 독방을 쓸 수 있었다.

일상의 차별은 방심하고 있던 순간들을 급습한다. 가장 큰 문제는 전셋집이었다. 계약 당시 한희씨는 남자였다. 갑자기 여자가 되어 계속 드나들자 어느 날 주인은 “이 집에 살던 남자 어디 갔느냐”고 물어왔다. 망설이다 “여동생인데 오빠가 유학을 가서 여기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잘 넘어갔다. “사람들이 관념 속에 갖고 있는 트랜스젠더의 정형화된 모습에서 벗어나 있어 가능했던 행운이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하리수처럼 예쁘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외모상으로는 “성형한 예쁜 여성인데 남성의 윤곽이 뚜렷한 트랜스젠더”만 있는 것도 아니다. 외모로는 구별이 안 되는 트랜스젠더도 많다. 그런 이들은 거리에서 아무 이유 없이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쳐죽여라”와 “나중에”를 외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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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문제가 된다. 한희씨 같은 중성적 이름은 천운이다. 트랜스젠더에 예명이 많은 이유다. 가끔 생각한다. “내 키가 180cm쯤 되는 트랜스젠더였으면, 트랜스젠더의 정형화된 외모처럼 생겼더라면 거리를 다닐 수 있었을까.” 사람들의 마음속 그림대로, 전형적 외형의 트랜스젠더는 오히려 더 고립된다.

한희씨는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겠지만 “몸에 칼을 댈 생각”은 없다. “성기를 제거해 성별 전환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1번이겠지만 그냥 여자로 살아갈 계획이다.” 한희씨가 하는 것은 호르몬 치료뿐이다. 트랜스젠더에게 호르몬 치료는 필수적이지만 이것이 가능한 병원은 손에 꼽는다. 지방에는 아예 없다시피 하고, 서울에도 대여섯 군데뿐이다. 호르몬 치료를 요청하면 “오히려 의사가 트랜스젠더에게 혐오발언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녹색병원, 마포의료협동조합, 은평구 살림의원에서 트랜스젠더에게 호르몬요법 치료를 한다.

여자로 모습을 바꾸고 커밍아웃한 뒤 한희씨는 꾸준히 성소수자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것은 2014년이었다. 그때 처음 직접적 혐오를 경험했다. 기독교단체들은 행진 대오 앞에 멈춰 있었다.

“사탄이다. 돌로 쳐죽여라!”

팻말에 담긴 언어들은 폭력을 조장했다. 화가 나기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데 성소수자 혐오를 맹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왜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서까지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는 걸까.” 물론 지금은 이해한다. “교리 문제를 넘어 그게 교회의 정치라는 걸. 위기를 맞은 한국 교회가 동성애라는 공통의 적을 만들어 교세를 키워가고 정세에 대응해간다”는 것을.

기독교 우파들이 성소수자와 동성애 문제에 관해 주장하는 논리는 놀랍도록 단편적이다. ‘항문섹스, 동물과의 성교, 에이즈, 지금 세태를 방치하면 학교에서 동성애가 옳다고 가르치게 된다’는 논리 정도다. 그 단편적 맹신으로 “동성애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외치고 웃으며 “동성애 아웃(out)을 주장하는 소풍(집회 참가)”을 다닌다. 나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이 차별임을 그들에게 웃으며 설명할 날이 올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희씨는 ‘그들’ 중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목격했다. “해외에 유학이나 여행 가서 아무 이유 없이 동양인이라고 차별받아본 사람”은 좀 달랐다. 누구라도 소수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을 겪어봐야 차별 문제를 해결한다.

차별금지법은 누구나, 공평하게,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법이다. 물론 안다. 차별금지법 만든다고 그 많은 차별이 단숨에 금지되지 않으리란 건. 한희씨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사람들이 이 운동을 하는 성소수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세상에 만연한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해 국가가 나서 어떤 노력을 할 것이냐에 따라 사회가 달라질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닷페이스

그 노력에 ‘나중에’는 없다. 민주 후보, 진보적 개혁을 주창하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소수자 정책을 발표하며 성소수자 문제를 외면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문 후보가 여성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물었을 때, 청중이 “나중에, 나중에”를 외칠 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다. 차별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법조차 만들지 못하는 정치인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할 염치가 있는 걸까. 사회적 합의가 없어 차별 금지를 법제화하지 못하겠다면 정치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사회적 합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치일 텐데,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린 언제 진짜 민주주의를 해볼까.

차별금지법 지금 당장 제정하라

“지금, 당장해야 한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하리수나 홍석천 같은 성소수자들이 등장한 뒤 벌써 10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이 호적(현 가족관계등록부)상 성을 변경할 수 있게 허용한 2006년 대법원 판결 이후, 성기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아도 성별 전환을 할 수 있다는 2013년 서울 서부지방법원 판결 이후 꿈쩍 않던 세상도 조금씩 변했다. 젊은 세대에서는 보수적인 법제 변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소수자 문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2013년 서울서부지법 안에 꾸려진 ‘성소수자 인권법 연구회’는 성별 정정 신청 결정문을 발표하며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관용은 나에게 편안한 사람들과 편안한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불편한 사람들과 불편한 삶의 방식을 함께할 공간을 내어주는 것으로 차이를 뛰어넘는 동등과 배려와 존중을 의미한다.” 차별금지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예방하며 차별로 인하여 발생한 피해를 구제할 목적’으로 한다. 우리의 주장은 나와 당신 모두 언제든 차별이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법률이라는 사회적 약속으로 명문화해두자는 것뿐이다.

취재 김완·허윤희·진명선 기자, 사진 박승화 기자, 편집 김선식 기자, 디자인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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