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여성은 진짜 여성인가? 페미니스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답변해야 한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CHIMAMANDA NGOZI ADICHIE
NEW YORK, NY - APRIL 05: Author Chimamanda Ngozi Adichie attends the 8th Annual Women In The World Summit at Lincoln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on April 5, 2017 in New York City. (Photo by Monica Schipper/WireImage) | Monica Schipper via Getty Images
인쇄

아, 의미론이란. 단어의 중요성, 단어의 의도한 의미, 추정된 의미,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중요성에 대한 모든 것이 이 이야기에 들어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수상 경력도 있는 나이지리아 출신 저자 겸 페미니스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최근 영국 채널 4 뉴스의 캐시 뉴먼과 인터뷰를 하던 중 트랜스 여성도 진짜 여성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뉴먼은 “...어떻게 하여 여성이 되었는가가 중요한가 - 즉, 예를 들어, 스스로의 정체성이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남성의 특권을 누리며 자랐다가 트랜스 여성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여성이 아니게 되나? 덜 진짜 여성인 것인가?” 아디치에의 답은 짧게 말하자면 “내가 느끼기에 트랜스 여성은 트랜스 여성이다.”였다.

아디치에는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약 2:44 부터 들을 수 있다.)

아디치에는 이 세상에서 남성에게 거저 주어지는 특권들을 누리며 남성으로서 살다가 “젠더를 바꿨다면, 당신의 경험을 이 세상에서 처음부터 여성으로서 살았던 사람의 경험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긴 나로선 어렵다.”고 말했다. “내 말은 젠더는 생물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라는 뜻이다.”라는 말로 아디치에는 이 부분을 마무리했다.

사실 나는 마지막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만약 아디치에가 트랜스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트랜스 여성이 광범위한 여성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노골적으로 하지 않는 게 왜 모두를 위해 더 좋았을지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부족함도 많지만, 현재 우리는 믿을 만한 젠더 정체성 연구, 조사, 문헌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젠더의 광범위한 개념 자체는 문화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사회적 구조이지만, 믿을 만한 자료들은 젠더 정체성은 선천적이고 (성기가 아닌) 뇌에 있는 것이라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다. 임신 중에 태아가 테스토스테론에 얼마나 노출되었는가 등 다른 기여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린 안다. 젠더 연구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다른 측면은 젠더 정체성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타고난 젠더와 다르다는 것을 일단 깨닫고 나면 좀처럼 변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조사에 의하면 성전환(일생 내내 걸릴 수도 있다)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코 타고난 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성전환을 두 번 하는 사람들도 소수 있긴 하다.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대체로 젠더는 아디치에가 시사한 것처럼 간단히 ‘바꾸는’ 게 아니다. 중고품 위탁 판매점에서 옷을 바꾸듯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트랜스들은 자신의 진정한 젠더 정체성과 일치하는, 자신이 (보통은) 평생 알고 있었던 젠더 표현(gender expression)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여기엔 혼란스러울 것이 없다. 트랜스젠더 성인들 대부분은 평생 자신의 젠더를 알고 있었지만, 공포 때문에 자신의 그 부분을 강제로 숨겨야 했으며, 시스젠더 남성 혹은 여성의 역할을 연기했다고 말할 것이다. 혹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혹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나쁜 기분, 잘못되었다는 기분을 느끼도록 길러졌기 때문이라고.

가장 심한 차별을 받는 것은 트랜스 여성들인 것 같다. 그 이유는 다른 글에서 따로 논해야겠지만, 트랜스 여성들만이 느끼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트랜스 여성들을 다루겠다.

일부 트랜스 여성들은 매일 호르몬을 사용하거나, 가슴 확대, 얼굴 성형, 목소리 성형, 엉덩이 수술, 심지어 성기 수술까지 받지만, 가슴 확대 등 한 가지 시술만 받는 사람, 아무것도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먼저 알려주지 않는 한, 이 모든 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또한 트렌스젠더라는 것은 애초에 성전환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타고난,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자아에 대한 극도의 자각이며, 이 자아는 흔히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제 3, 4, 혹은 그 이상의 젠더들에 대한 오래된 전통을 가진 문화가 전세계에 수백 개는 된다. 이들을 절대적으로 가장 높이 우러러 보는 문화와 종교도 많다. 트랜스혐오가 있는 곳이 전세계 여기저기에 있긴 하지만, 대부분 현대에 들어 서구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그런데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인 내가 왜 이에 익숙할까? 나는 소외된 집단을 옹호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내 세 아이 중 막내를 옹호하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 막내는 만 두 돌 반이었을 때부터 공주 옷을 입는 놀이를 하며 무척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 난 그저 내 몸 때문에 남자애인 거 알죠?” 이 아이는 언제나 전형적인 여성에 가까운 자신의 젠더 표현에 확신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이해해보려고 조사를 시작했지만, 2008년에는 지금 만큼의 정보가 없었다. 우리는 아이가 트랜스젠더인지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우린 아이가 남을 육체적으로 위협하거나 해치지 않는 이상, 원하는 대로 마음껏 스스로를 표현하게 하기로 했다. 4학년이 되었을 때 찰리는 자신이 ‘젠더 크레이이티브’라고 했고, 전형적인 소녀스러운 것들을 전적으로 선호했고, 시스 남성 또래들을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찰리는 이제 11세고, 젠더퀴어이자 넌 바이너리(non binary)라고 말한다. “they/them”이라는 형용사를 선호한다. 이는 찰리가 넓은 의미의 ‘트랜스젠더’에 속함을 의미한다. 찰리는 지금으로서는 성적 정체성을 밝히고 있지 않은데,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요소 중 이와는 무관한 별개의 한 조각이다(이 역시 따로 글을 써야 할 주제다). 찰리는 자신이 남성이라고도, 여성이라고도 느끼지 않는다. 두 성이 섞여 있다고 느낀다. 찰리는 때로는 남성형 대명사를 쓰기도 하지만, 만약 “너는 남성 여성 중에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느끼니?”라고 물으면 찰리는 언제나 “난 그냥 사람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찰리의 젠더 표현은 옷, 액세서리, 장난감, 게임, 활동, 취미, 친구들 등 모든 면에서 전형적인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깝다.

긍정하는 가족으로서,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는 쭉 넌 바이너리이자 젠더퀴어로 남을 수도 있지만 성전환을 할 수도 있다. 찰리는 에이젠더(agender 어떤 젠더로도 정의하지 않음)로, 혹은 시스젠더로 정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같은 부모들은 최대한 잘 준비해두어야 한다. 우리는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 특히 전국 정부 회계 위원회(NCGA)의 절대 다수가 반 LGBTQ+로 악명 높으며 시에서 차별을 할 수 있게 하는 법을 추진하는 노스 캐롤라이나 같은 주에서는 더욱 그렇다.

옹호는 평생에 걸친 헌신이며, 내가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아직 다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동맹 혹은 옹호자가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배운 가장 중요한 규칙은, 억압 혹은 소회 받는 집단은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가질 권리가 있어야 하며,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 내러티브를 들어야 한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소외된 집단의 옹호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블랙 라이브스 매터’를 옹호한다면, 백인 여성인 나는 결코 흑인 여성의 경험을 알 거나, 체화했거나,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백인 여성으로서, 나는 옹호자이든 아니든 간에 ‘블랙 라이브스 매터’에 대한 논의에 끼어들어 “나는 우리 사회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백인인 우리는 다수이며, 억압받는 사람들의 내러티브를 무시하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 난 흑인 친구들이 있어! 난 흑인을 사랑해!”라는 말 만큼이나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내게 흑인 친구들이 있고, 내가 그들을 사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억압받는 그들 커뮤니티의 동맹이나 옹호자가 되는 건 결코 아니다. 그저 흑인 친구가 있는 사람일뿐이다.

즉 억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이슈들을 논의할 때는 그들 본인이 논의를 이끌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선 안된다.

안타깝게도, 아디치에는 선의로 인터뷰했고 후속 발언으로 의미를 더 분명히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경험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트랜스젠더들의 목소리를 덮으며 말했다. 트랜스 커뮤니티에는 전반적으로 이런 일이 엄청나게 자주 일어난다. 시스 여성인 아디치에가 트랜스 여성의 경험에 대해 발언했다. 그것 자체가 문제다. 게다가 그녀는 실제 트랜스 여성들, 특히 래번 콕스, 라켈 윌리스, 재닛 목, 아이시스 킹 등 유색인종 트랜스 여성들에게 힘을 줄 기회를 얻었다. 시스 여성으로서 우리는 트랜스 여성들의 내러티브를 일축해버려선 안 된다. 때로는 우린 그저 닥치고 트랜스 여성들이 직접 말하게 해야한다. 지금 페미니스트 내러티브에 가담하려 하는 트랜스 여성들이 많지만 묵살되고 있다. 그들의 신체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아디치에가 트랜스 여성과 이야기해보지도 않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원래 했던 말의 뜻을 다시 명확히 밝히기까지 했다. 아디치에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해 말한 것을 트랜스들이 언짢아 하는 것은 정당하다. 최소한 자신에겐 시스라는 특권이 있고, 굉장히 규범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깨달을 수 없었을까? 그녀의 규범적 젠더 세계관 때문에 그녀 자신의 특권을 보지 못한 걸까? 그 세계관이 자신의 렌즈에 영향을 주었고, 이제 타인들의 렌즈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디치에는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뜻을 보다 명확히 밝히며,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이 여성인 것과 똑같이 트랜스 여성도 여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은 ‘솔직하지 못하게’ 느껴지며 트랜스 이슈를 주류로 가져오기 위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트랜스 이슈를 주류로 만들려는 의도는 “그들이 경험하는 여러 억압을 줄이기” 위해서일 거라 상정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취했던 “트랜스 여성은 트랜스 여성이고, 그들은 남성으로 태어나 세상이 남성에게 주는 특권의 혜택을 받았고, 우리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의 경험과 트랜스 여성의 경험이 같다고 말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부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미국인이 가진 남성의 특권에 대한 서구적 시각은 결코 유일한 시각이 아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출생 직후부터 남성의 특권을 누리게 될 수도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초음파 검사 결과 페니스가 있다는 것만으로 성 선택에 따른 낙태를 피하게 될 수도 있다. 갓난아기일 때 페니스가 없이 태어난 사람에 비해 두 배의 영양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여성 할례라는 극도의 고문과 그에 따른 평생의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5세에 성 인신매매로 팔리지 않고 학교에 다니며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강제로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8세에 나이가 2배 많은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외에도 남성의 특권은 많다.

하지만 미국의 사정은 좀 다르다. 물론 트랜스 여성들은 생리,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우려, 강간에 의해 생긴 아기를 낳아야 하는 경우 등은 겪지 않는다. (나는 트랜스 여성들이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공 장소에서 수유를 하다 수치를 당하는 경험은 할 수 있다.) 생리와 원치 않는 임신이 트랜스 여성의 내러티브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시스 여성의 내러티브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면 트랜스 여성은 덜 여성인 것인가? 간성(intersex)이라면? 시스 여성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성 염색체 이상이 있다면, 생리를 하지 않는다면, 임신을 할 수 없다면? 수유를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전형적인 여성성의 ‘보편성’을 가지지 않은 시스 여성들이 많지만, 그렇다 해서 그런 여성들이 덜 여성인 것도,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여성 내러티브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이들을 배제한다는 건 가부장제를 돕는 일이고, 페미니스트로서 우린 그러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트랜스 여성을 여성 내러티브에서 제외하는 것 역시 가부장제가 하려는 일을 대신 해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또한 아디치에가 사용한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 women born female’이란 말은 어마어마하게 트랜스혐오적이다. 트랜스 여성들은 외부 성기는 다를지 몰라도, ‘여성으로 태어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으로 태어났다’, ‘남성으로 태어났다’ 같은 말로 여성의 내러티브를 하찮게 만들어선 안 된다. 우리는 유전학적으로 많은 돌연변이가 일어나며, 성 생물학은 언제나 둘 중 하나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여성을 ‘여성으로 태어난’, ‘남성으로 태어난’으로 축소해 버리는 것은 천성적으로 상호교차적인 페미니스트들의 노력 전체에 피해를 준다.

또한 트랜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는 남성이었던 트랜스 여성들이 남성으로 사회화되고, 고로 잠시라도 남성의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에서는 규정된 남성성의 현 상태를 따를 때만 그런 특권을 얻을 수 있고, 대부분의 트랜스 여성들은 그러지 못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남성 행세를 해서 누린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이 여성임을 알고 있는 트랜스 여성들은 부모가 얼마나 노력한다 해도 남성으로 사회화되지 않는다. 남성으로 태어난 어린 트랜스 소녀들은 괴짜 취급을 받고, 겁에 질린 가족들은 얼른 그 사실을 숨기게 해버린다. 트랜스임을 숨기고 있는 트랜스 여성들은 때로는 남성으로 간주되어 특권을 누리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의 경험은 모든 여성들이 받는 미묘하고 불편한 메시지들의 폭격일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이 남자 아기와 여자 아기를 대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는 것엔 나도 동의한다. 우리는 남자 아기와는 더 거칠고 활동적으로 놀아주는 경향이 있다. 여자 아기와는 좀더 사회적으로 민감하게, 무드럽게, 덜 경쟁적으로 논다. 아들과 딸을 다 두고 있는 나는 개인적 경험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아주 어릴 때에 이렇게 다뤄진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주 어린 나이에 우리가 주었을지도 모를 특권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사실은 자신이 여성인 걸 아는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뭔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경향이 있다. 자기 장난감이 자기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자기를 둘러싼 세상이 자기를 낯선 방식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안다. 한 사람을 겨냥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매체 등을 통한 간접적 메시지와 뿌리깊은 문화적 메시지를 느낀다.

남성으로 타고난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젠더인 여성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수치를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너는 남성이다’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남성이 아님을 암시한다는 건 수치스럽다, 나쁘다, 심지어 역겹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심리사회적 단계 중 하나를 거치며 이걸 배우게 된다. 자율성 대 수치와 의심의 감각을 키우는 아주 어린 나이다. (20세기의 저명한 발달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에 의하면 이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친 어린이는 안전감과 자신감을 느끼는 반면, 그렇지 못한 어린이는 부적응과 자기 회의를 느낀다.)

이런 간결한 메시지를 어린 아이가 금세 받아들이고 나면, 어린 시절 내내 지역 사회와 학교에서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체육팀, 합창단, 클럽, 소년 소녀 단체, 성에 따른 미인 대회와 육영사업 등, 어린이의 활동은 성에 따라 갈린다. 인지 도식은 젠더 고정관념에 따라 강화되고, 가족 모델은 언제나 시스젠더이며 이성애 기반이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문화적 면은 트랜스 소녀들에게서 남성 특권의 엄청난 부분을 앗아간다.

아디치에는 중요한 페미니스트일 뿐 아니라 자신의 고국인 나이지리아에서 LGBT 인권을 위한 운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녀는 전반적으로 LGBT 인권을 지지하는 동시에 트랜스혐오일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LGBTQ+ 커뮤니티의 옹호자와 동맹들 중에서도 한심할 정도로 트랜스들을 잘 돕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LGBTQ+에서 ‘T’는 어쩌면 이해와 대표를 가장 받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하는 걸 제대로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면 아디치에는 페미니즘과 LGBT 인권에 있어서만 힘이 있다고 결론내려야 할까?

아디치에가 뜻을 명확히 하겠다고 추가로 밝힌 글은 솔직히 쓰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아디치에는 “나는 트랜스 여성은 트랜스 여성이고 시스 여성은 시스 여성이며 전부 다 여성이라고 말해야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시스’는 내 어휘의 유기적 일부가 아니다. 그리고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썼다.

42세 여성인 나로서는 ‘시스’는 내 어휘의 유기적 일부가 아니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언어란 원래 그렇다. 언어는 언제나 진화하고, 세상에 계속 관여하고 미래 세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그걸 따라잡는 게 우리의 몫이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에겐 구글이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전세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나라 전체를 흔들 힘을 가진 공인이며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아디치에라면 영국(과 다른 나라의) 청중들에게 말하기 전에 ‘시스’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고, 자신의 말을 든는 사람들에게 알려줄 줄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정말 강력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어서 “왜냐하면 ‘트랜스’와 ‘시스’라는 말을 한다는 건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과 전환하여 여성이 된 여성이 있다고 구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부분이 문제인 이유는 1) 특권 2) 모든 트랜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젠더 정체성은 성기가 아니라 뇌에 있다.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과 ‘전환하여 여성이 된 여성’과 같은 말을 쓰는 건 문제가 있다.

“소녀들은 자존감을 해치는 방식으로 사회화된다- 스스로를 축소하고, 남성의 자아에 맞추고, 자신의 신체를 수치의 저장고로 생각하게 만들어진다. 그러한 사회적 조건화를 극복하고 잊으려 악전고투하는 성인 여성들이 많다.”는 아디치에의 말은 옳다. 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그들의 여성적 젠더 표현은 틀렸고, 수치스럽고, 부적절하고, 숨겨야 한다고 가르침 받는 트랜스 여성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아디치에는 깨닫지 못한 것 같다.

단어와 언어는 정말 중요하다.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 ‘남성으로 태어난 여성’이라는 말을 쓸 때, 또는 트랜스 여성을 ‘남성’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실감을 하든 못하든 트랜스혐오를 영속화한다. 트랜스 여성을 여성이 아니라고 비인간화하는 말을 할 때마다, 우리는 트랜스 여성들에 대한 수십 년 된 폭력의 사이클에 기여한다. 이 사이클은 잘못된 상정과 트랜스혐오적 언어로 시작하여 언어적 학대, 육체적 폭력,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경우에 살인으로 끝난다. 그리고 트랜스 여성이 살해당했을 때, 트랜스 여성에 대한 완전한 말소가 자주 일어난다.

누가 페미니스트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차별, 괴롭힘, 불평등, 배제 등 가부장제의 부당함을 겪었는지는 시스젠더(범죄 현장의 경찰이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처럼 존경 받는 저자이든)가 정하는 게 아니다. 페미니즘의 핵심은 모든 피부색과 신체,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과 문화를 지닌 여성들을 위한 것이다. 페미니즘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여성으로서 함께 일하고 싶다면, 우리가 비인간화 혹은 삭제한 사람들의 연대를 바랄 수는 없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넌 바이너리 상태의 여성성을 보고 그것을 옹호해야 한다. 우리 시스 여성들이 이 내러티브에서 트랜스 여성들을 배제한다면, 여성들을 시스 남성이 정의한 여성성에 가둬두는 남성들에 비해 우리가 나을 게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딸들(태어날 때 육체적 성이 남성이었든 여성이었든 간에)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젠더는 명백하게 두 가지이며 성기의 모양에 따라 절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거짓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는 트랜스젠더들은 불안, 우울증,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자기 파괴, 자살 시도를 경험할 확률이 훨씬 높다. 두 가지 젠더라는 낡은 생각에 순응하거나 떠날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가정에서는 쫓겨날 수도 있다. 유해하거나 학대하는 관계에 있느니 가출해서 노숙자가 되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어린 나이에 전환한 트랜스 어린이들(특히 소녀들)은 시스젠더 또래들 만큼 잘 적응한다고 한다. 이런 것이 알려져 있으니, 아디치에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트랜스 여성을 시스 여성과 다르게 만드는 경험을 강조할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 운동에 트랜스 여성들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연설하거나 글을 쓸 수 있다. 우리는 트랜스 여성에 대한 토론은 그만두고, 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끌어올려주어야 한다. 트랜스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허핑턴포스트US의 Are Trans Women Really Women? Why Chimamanda Ngozi Adichie’s Answer Matter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