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있었던 흥미로운 해프닝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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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라고 하면 멋지고 세련된 사람들이 커다란 홀에서 와인을 즐기며 우아하게 교섭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모든 일정이 끝나면 외교관들은 찬란한 빛으로 수놓아진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며 협상의 타결을 축하한다. 아마 과거 유럽의 외교관까지는 이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외교는 다르다.

미국 인기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본 독자들은 잘 알 것이다. 드라마 속 외교는 냉혹한 정치의 연장이다. 드라마 속 묘사가 실제와 가깝다는 느낌이다.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 이래 20년 이야기를 담은 책 ‘속 깊은 마트료슈카’를 봐도 그러한 사실이 이해가 간다.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오랜 기간 국교 수립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한국과 러시아(당시 소련)가 1990년 수교를 맺은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다. 그 이면에는 온갖 우스꽝스럽고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과정도 있었다. 외교관들도 결국 인간이라는 뜻이다. 한러 관계를 전문으로 다뤄온 우리나라 기자가 지은 책 ‘속 깊은 마트료슈카’를 통해,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있었던 흥미로운 해프닝들을 몇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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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태우 대통령의 첫 소련 방문 당시 그의 통역사가 만찬장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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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의 명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만찬사를 제쳐두고 장기인 즉흥연설을 하며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이에 질세라 우리 대통령도 즉흥연설로 나설 차비를 하고, 옆에 대기중인 신 박사 대신 소련측 통역원에게 통역을 요청했다. 자존심이 상한 신 박사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장해버리는 무모성을 과시했다.” (책 ‘속 깊은 마트료슈카’, 김병호 저)

1990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은지 3개월만에 소련을 방문했다. 대한민국 정상으로서는 첫 소련 방문인만큼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대한민국의 첫 인상을 심어주는 자리인만큼 중요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에는 러시아어 통역사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결국 국내에서 적합한 자원을 찾지 못하자, 우리나라 정부는 해외에서 겨우 겨우 러시아어 통역사를 모셔오게 된다.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재가 턱없이 부족했던만큼, 정부는 이 통역사에게 2급 국가공무원 특채, 주소련대사관 근무 등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통역사의 통역 능력에 대한 정밀한 평가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을 방문하여, 그만큼 노태우 대통령도 이 통역사에 대한 통역능력을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 방문 일정 중 만찬장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예정에 없던 즉흥 연설을 시작하자, 노 대통령도 자신의 즉흥연설을 시작하면서 통역을 소련 측 통역사에게 부탁했다. 예일대 박사학위까지 받은 우리의 통역사는 이로 인해 크게 자존심이 상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양국 정상이 보고 있는 가운데 만찬장을 나갔다. 이에 격노한 노태우 대통령은 만찬이 끝난 후 의전관을 불러 그 통역사를 즉각 귀국시킬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2. 옐친 대통령이 친선의 표시로 전해준 KAL기 블랙박스 안은 텅 비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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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잠깐이었다…옐친이 전달한 블랙박스는 당시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알맹이가 없는 빈 껍데기’였다.” (책 ‘속 깊은 마트료슈카’, 김병호 저)

소련 붕괴 이후 민주정권이 들어선 러시아의 1990년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러시아는 핵무기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을 들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파탄 직전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 유럽 등 경제강국의 원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들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치게 된다. 우리나라에게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보이게 된다. 당시 러시아 옐친 대통령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1992년 11월 옐친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항공(KAL) 007 점보여객기의 블랙박스를 전달했다. 여기서의 007 점보여객기는 1983년 8월 31일 뉴욕을 출발한 후 다음날 새벽 사할린 해역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추락한 여객기를 말한다. KAL기 피격사건은 당시 우리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소련에 대한 뼛속 깊은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옐친 대통령이 해당 KAL기의 블랙박스를 직접 전달함으로써 우리나라 국민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새로운 민주 러시아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전달 받은 블랙박스를 개봉해보니 그 안에는 테이프도 없이 빈 휠만 들어있었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 해명도 궁색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러시아의 의도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3. 러시아의 물밑 외교는 한국으로 송환하기로 약속한 탈북자 7명을 중국으로 넘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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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옐친의 방중 와중에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탈북자 신병을 넘겨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탈북자 7인을 중국에 넘겼고, 중국 정부는 이듬해인 2000년 1월12일, 이들을 북한으로 송환했다.” (책 ‘속 깊은 마트료슈카’, 김병호 저)

아무리 국제적인 입지가 좁아진 러시아라고 해도 소련의 완고함이 남아있었다. 우리가 2000년대 그것을 깨닫는다. 2000년도에 있었던 탈북자 7인 송환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1999년도에 북한인 7명이 북한 신의주를 탈출하여 러시아 밀입국을 시도하다 러시아 국경 수비대에 검거되었다. 이들이 매스컴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인도적 송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외교부는 러시아 정부와 송환협상에 돌입하였다. 우리는 러시아가 탈북자들을 우리나라로 송환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부의 판단은 매우 안일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물밑에서 중국, 북한과 모종의 비밀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탈북자 7인에 대한 난민 지위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1999년 12월 10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탈북자들을 한국에 넘겨주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러시아는 탈북자 7인을 중국 정부에 넘겼고, 중국 정부는 2000년 1월12일 이들을 북한으로 송환했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정으로 이어지게 된 배후에는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 이후 10년간 서로에게 느낀 실망감과 배신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러시아의 지지부진한 개혁속도에 실망했고 러시아도 북한, 중국과 오랫동안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굳이 한국에게 우호적일 필요는 없었다. 이러한 기조는 남북한에 대한 균형외교를 강조하며, 강력한 러시아를 꿈꾸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0년 1월 1일 부로 새로운 대통령이 되며 굳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