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원의 외증조부를 '친일'로 단정하기 어려운 행적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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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이후 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인 이종만의 친일행적 논란이 불거졌다. 영화전문지 ‘맥스무비’가 먼저 사이트를 통해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급 친일파로 위안부 창설과 유지를 위한 자금 지원 대가로 채굴권을 얻어 부를 쌓았다”고 보도했다. (현재 이 글은 삭제된 상태다.) 이후 ‘디스패치’가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찬 편찬실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위안부 지원이 아닌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에 전쟁 위문품 등을 보냈다”며 “유명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고 전쟁 독려 글도 기고했으며 일본군에 전쟁 헌금을 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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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일자, 강동원 측은 3월 5일, 보도자료를 통해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과문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외증조부의 미담을 들으며 자라왔다. 외할머니가 독립유공자의 자손이셨기 때문에 외증조부에 대한 미담을 자연스레 받아들여 왔고, 2007년 인터뷰를 한 시점에는 그 분의 잘못된 행동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이종만의 행적을 서술한 과거의 기사들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기사는 지난 2012년 '한겨레 신문'의 칼럼 '[곽병찬의 향원익청] ‘대동’ 향한 금광왕 이종만의 무한도전'이다. 또한 지난 2006년 9월, '신동아'를 통해 게재된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라는 글도 있었다. 이를 통해 이종만을 ‘친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또 다른 행적에 관해 살펴보았다.


1. 금강을 매각해 자작농 육성과 이상적 농촌 건설 자금에 쾌척했다.

북지위문금(1000원)을 내기 두 달 전 이종만은 영평금광 매각 대금 155만원 중 50만원(지금 화폐가치로는 500억원)을 자작농 육성과 이상적 농촌 건설을 위한 대동농촌사 설립에 쾌척했다. ...중략.... 고향인 울산에도, 대현면 교육사업비로 10만원, 빈민구제금으로 1만원 등을 희사했으니 그가 노동자 농민 교육사업으로 환원한 금액은 80여만원에 이르렀다. 9월엔 자신의 땅 157만평도 내놓았다. - [곽병찬의 향원익청] ‘대동’ 향한 금광왕 이종만의 무한도전(한겨레)

2. “일하는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이 그의 이상이었다.

(영평금광 매각 대금 중) 10여만원은 영평금광 광부와 직원 1000여명에게 나눠주고, 인근 마을 빈민구제금으로 1만원을 희사했으며, 광부의 아이들이 다니는 영평학원에 2000원, 왕장공립보통학교에 1000원을 각각 전했다. 그가 인수인계식을 끝내고 떠날 때 왕장역에는 “1천여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 인근 주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의 덕행을 찬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 [곽병찬의 향원익청] ‘대동’ 향한 금광왕 이종만의 무한도전(한겨레)

3. 조선의 전문 기능인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1000원의 황금위문금을 낸 1938년, 그는 조선의 전문 기능인을 양성하기 위한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고(6월),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출판사 등을 세웠다. 노동자-자본가, 지주-경작자의 협력에 의한 집단경영, 균등분배의 정신을 구현할 대동사업체의 뼈대였다. 그의 소유인 장진광산 280구, 초산 140구, 자성 300구 등 1천구가 넘는 광구를 기반으로 설립한 대동광업주식회사가 돈줄이었다. ... 중략.... 설립자금만 120만원이 들었고, 사재 30만원까지 털어 넣은 이 학교는 지금 북한 김책공업대학교의 전신이다. 그가 당시 설립하거나 지원한 민족학교는 울산의 농업학교 등 11곳에 이르렀다. 그가 일제에 낸 돈은 일종의 보험금이었고, 조선 노동자 농민 민족교육에 헌납한 금액에 비하면 ‘팥고물’이었다.- [곽병찬의 향원익청] ‘대동’ 향한 금광왕 이종만의 무한도전(한겨레)


이종만에 대해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지난 2006년 9월 ‘신동아’를 통해
“그는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고 평가했다. “돈은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종만은 자본가 신분에도 ‘노동자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을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이종만은 서른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아도 됐을는지 모른다.” 이 글에 따르면 이종만은 월북 후, 북한 광업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아흔셋을 일기로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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