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학자들은 딴짓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업적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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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과학자의 삶은 경로가 분명하다. 목표가 확실했으며, 그것을 향해 열심히 연구했다. 그 결과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과학자도 수두룩하다. 우연과 실수로 업적을 이룬 사람들도 있고, 정말 과학적이지 않은 태도로 과학에 매진했던 사람들도 있다. 목표가 확실하지 않은 채 하는 행동을 ‘딴짓’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딴짓의 대가들이다. 과학자들의 딴짓 이야기를 만나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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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행을 사랑한 마법의 대가: 외젠 가스파르 로베르송

hot air balloon

“과학을 공연이나 선전에 이용한 과학자들은 과학사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문학사에서 너무 대중적인 작가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항공 물리학자 외젠 가스파르 로베르송(1763~1837)이 그랬다. 도서관 학술 분야에서는 그의 저서를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작품이나 전기는 공연 분야로 분류되어 있다. …. 아카데미 회원인 장 바티스트 비오와 부르주아 학자인 게이뤼삭(1778~1850)에게는 나침반과 기압계를 가지고 4천 미터 고도까지 비행한 공로로 공식적인 명계가 주어졌다. 마술사 로베르송도 한 해 앞서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칭찬 몇 마디가 주어졌을 뿐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당연한 결과로 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물리학자이자 비행사이며 뛰어난 실험가였던 로베르송은 몇 년 동안 파리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으며 환상적인 ‘마술 공연’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책 ‘딴짓의 재발견’, 니콜라 비트코프스키 저)

로베르송은 마법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시도와 성과도 만만치 않았다. 과학계에서만 인정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풍선기구를 이용해 유럽 각지에서 50여 번의 비행을 했다. 또한 기구를 타고 올라가 온갖 화학, 생물학 실험도 했다. 대기의 고도에 따라 여러 샘플을 채취해 오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성취하지 못한 대기 정복을 해냈지만, 과학계는 여전히 로베르송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2. 분명히 바늘은 움직였다: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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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역사에서 이성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실험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자연철학의 영광을 구현한 덴마크의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1777~1851)는 혼자만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실험을 진행했다. 직접 실험한 자신조차도 단순하지만 알쏭달쏭한 그 경험을 명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전선에 전류를 흘려보내자 옆에 있던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였다. 전선과 자기의 만남이 바늘을 움직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발견은 새로운 과학인 전자기학의 태동을 야기했고, 현재 여러 기술의 원천이 되었다. 1820년 11월 그날에 깜짝 놀란 젊은 덴마크 과학자 앞에 나타난 것은 그저 전동력일 뿐이었다. …. 하지만 과학이 거의 발달하지 못한 덴마크 출신인 과학자의 주장을 당시 학계에선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파리를 방문한 외르스테드는 아내에게 “프랑스와 덴마크는 과학을 대하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며 실망 섞인 편지를 썼다. 뉴턴의 힘과 외르스테드가 발견한 전자기의 힘은 성질의 차이가 매우 컸지만, 그는 전선 주위에 중심적인 힘의 존재를 제안했다. 그리고 전도체에 의한 자기의 개념을 모델화하려고 했다. 그 주장의 증거는 그로부터 10년 후에 마이클 패러데이가 밝혀내는데, 외르스테드가 제시한 중심적인 힘의 개념 대신에 자기장의 전파라는 개념을 이용함으로써 가능했다.” (책 ‘딴짓의 재발견’, 니콜라 비트코프스키 저)

1820년 4월 21일에 외르스테드가 저녁 실험 강의 도중 발견한 현상이다. 전류가 흐르면 전선 주변 나침반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철사에 강한 전류를 흘려 보내며 그 방향을 바꾸면 또 다시 나침반 바늘이 회전하는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이 현상을 몇 달 후에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전선을 통해 흐르는 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이론을 정리하였다. 후에 전자기학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했다.

3. 기계의 영혼을 지닌 최초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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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바이런(1788~1824)의 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매우 정확하게 미래의 컴퓨터를 예측했다. 또 그녀는 ‘신경계의 수학적 연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직접 ‘분자 실험실’로 이용하는 등 신경 과학의 선구자로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도만 좋았을 뿐 이후로는 아무 진전도 보이지 못했다. …. “나는 천재였지만 허약 체질 때문에 그 천재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를 위해 마지막까지 기도해 주세요.”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컴퓨터의 발명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국 성립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19세기 초의 노동자들은 기계를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다. 결국 기술 혁신에 반대하며 러다이트운동 참가자들이 섬유 공장의 기계를 부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바이런은 상원에서 그들을 변호하는 발언을 했었다. 그런데 30년 후, 그가 애지중지하던 딸은 공장 안에서 기름칠을 한 기계들이 연기를 내뿜으며 가동되는 모습을 보고 황홀해했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변호한 사람들이 비난했던 베 짜는 기계의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노동자들이나 기계나 베를 짜는 일에 대한 열정을 똑같았지만 노동자와 기계는 앙숙 관계였었다.” (책 ‘딴짓의 재발견’, 니콜라 비트코프스키 저)

시인 바이런은 죽기 전 자신의 9살 난 딸 에이다(1815~1852)를 보며 “신께서 시인의 재능만 빼고 모든 능력을 저 아이에게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가족들조차 인정해 주지 않는 시인으로 자신의 딸이 살아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바이런 부인 역시 딸이 남편을 닮지 않기를 원해서 의도적으로 수학 공부를 시켰다. 그 때문에 에이다는 과학자가 되었다. 지금의 컴퓨터라 할 수 있는 기억 장치와 연산 장치를 갖춘 해석 엔진까지 고안해냈다. 하지만 낮은 기술 수준과 높은 비용으로 당시 실용화되진 못했다. 결국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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