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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길라임을 좋아한 게 조롱받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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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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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4%. 한국갤럽이 2016년 11월22~24일 전국 성인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5일 발표한 ‘11월 넷째 주’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잘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의 비율이다.(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휴대전화 RDD 표본 프레임 무작위 추출, 전화조사원 인터뷰, 총 통화 4004명 중 1004명 응답으로 응답률 25%) 같은 회사의 여론조사 결과가 5%를 유지할 때에도 ‘샤이 박근혜’(부끄러워서 대놓고 지지한다고 말은 못 하지만 내심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들)가 결집하면 곧 지지율이 반등할 것이라 믿으며 버티던 청와대와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다. 5%로 이미 한 차례 제6공화국의 대통령 지지율 최저치 기록을 경신한 박근혜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한 차례 또 최저치를 경신해버렸으니 말이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티케이(TK·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지지율이 3%라니,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은 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리라.

잘못을 저지른 분야가 광범위하며 잘못의 크기도 천문학적인데다가, 그 잘못을 비판하는 이들이 열에 아홉을 상회하는 상황. 이럴 때면 종종 비판의 정교함이 쉽게 자취를 감춘다. 아무 곳을 향해 비판의 총구를 겨눠도 그럭저럭 명중하는 마당에 굳이 정조준을 해야 할 필요성이 희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엉뚱하게 오발로 다치는 이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당장 대통령의 권력 사유화 및 남용, 국정농단, 외압과 이권개입, 기밀누설 등의 죄를 물어야 하는 자리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운운하는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난 4주간 여야를 막론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여성 혐오를 드러낸 정치인들의 발언을 접했다. 오랜 시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있었기에 자신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서 반성과 사과를 하는 대신 최순실을 ‘강남에 사는 웬 아주머니’라고 지칭하는 여당 정치인, ‘100년 내로는 여성 대통령 꿈도 꾸지 마라’, ‘저잣거리 아녀자’ 운운하며 박근혜-최순실의 범죄자성을 여성성으로 치환하는 야당 정치인들…. 덕분에 매주 토요일 광장으로 나와 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는 수많은 여성들이 덩달아 기분이 더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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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아줌마’가 문제?

매주 토요일 광화문 개근을 찍고 있는 나도 유탄을 맞았다. 박근혜의 드라마 사랑이 원인이었다.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사실상 영리병원 영업을 하고 있던 차움병원에서 브이아이피(VIP) 서비스를 받을 때, 박근혜가 사용한 가명이 ‘길라임’이었다는 보도가 신호탄이었다. 길라임이라는 이름이 흔한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드라마 <시크릿 가든>(2010~2011)의 주인공(하지원)에게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이름 아닌가. 처음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길라임만큼 열심히 자기 힘으로 세상을 헤쳐온 등장인물도 드문데, 우산 하나도 제 손으로 안 드는 사람이 어디서 감히 길라임을 참칭하는가 싶었으니까. 그렇게 며칠 헛헛한 마음에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모두 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웃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박근혜가 드라마를 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깐, 지금 나 유탄 맞은 거야? 그랬다. 드라마 애호에 대한 은근하고 오래된 무시는, 박근혜의 ‘길라임’ 참칭과 만나며 그야말로 대폭발했다.

인터넷에선 ‘드라마충’(멸칭에 두루 쓰이는 벌레 충과 드라마의 합성어)이란 단어가 넘실거리고, 박근혜가 같은 작가가 집필한 다른 드라마도 즐겨 봤을 것이라는 정황들이 재구성됐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드라마의 방영 6주년을 기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지에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상황을 맞이해야 했던 <시크릿 가든>의 팬들은 격분했지만 이미 시작된 조롱은 쉬 끝나지 않았다. 집회 현장에선 ‘드라마나 보는 아줌마’라는 발언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고, ‘길라임ㅋㅋㅋㅋㅋ××년ㅋㅋㅋㅋㅋ’라고 적힌 플래카드는 ‘촌철살인’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돌아다녔다. 박근혜가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것과 그가 국정을 소홀히 하고 각종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사이의 인과관계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국정에는 관심이 없고 드라마나 봤으니 그렇게 됐지”라는 서사는 이미 완성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생명을 얻었다. 사람들의 ‘풍자’와 ‘해학’ 속에서,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들은 졸지에 덩달아 죄인이 된 기분을 감내해야 했다.

언론은 어땠나? 11월21일 <한겨레> 그림판은 박근혜가 드라마를 보다가 말고 검찰에 오더를 내리기 위해 전화를 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쭈… 이제 전화도 안 받아?!” 그런데 박근혜의 손에 들린 건 전화기가 아니라 티브이 리모컨이다. ‘드라마 보느라 정신이 나가서 전화기와 리모컨도 헷갈리는’ 사람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음날 만평은 한발 더 나간다. 관저 집무실 침대에 누워 있는 박근혜, 손에는 펜과 종이가 쥐여 있다. 종이에는 ‘현빈’과 ‘근혜’로 이름점 궁합을 본 결과가 적혀 있다. 결과는 ‘92%’. 흐뭇하게 웃고 있는 박근혜 얼굴 옆에 ‘발그레…’라 적힌 말풍선이 떠 있다. 옆엔 ‘검찰’과 ‘근혜’로 이름점 궁합을 본 종이도 굴러다닌다. ‘06%, 만남 거부!’ 만평의 제목은 ‘여성의 사생활’이다. 박근혜의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가 “대통령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말로 면피를 시도하며 여성 혐오에 불을 붙인 판에, 드라마를 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점이 결합한 것이다. ‘아줌마’들에 대한 폄하로 대표되는 중년 여성에 대한 혐오와 드라마 애호에 대한 무시가 결합하자, ‘드라마나 보느라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아줌마’라는 그림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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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당대의 욕망과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귀중한 창구이며, 국가 최고 권력자가 당대 대중이 즐기는 문화 콘텐츠를 함께 즐기는 것은 흉이 아니다. 일찍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에 대해 단순한 립서비스 수준에 그치지 않는 깊이 있는 식견과 성실한 감상평을 남기며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고,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에런 소킨 작가의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1999~2006)의 열성 팬이어서 청와대 안에서 참모들과 시사회를 연 적도 있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왕좌의 게임>(2011~)을 향한 팬심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올해 초에는 남들보다 먼저 6시즌을 감상하기에 이르렀다.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는 등장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도 주저없이 극중 가장 현명하고 인기있는 인물인 티리온 라니스터를 꼽는 그의 지극한 팬심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나.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정치적 적대자들이 “애들 음악이나 듣고 드라마나 보느라 국정이 이 모양”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드라마를 열심히 보는 것과 국정을 잘 이끄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가지만…

물론 이해는 간다. 가명 ‘길라임’은 충격적이고, 최소한 제6공화국 들어와서 이만큼 심각하게 많은 잘못을 저지른 대통령은 다시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런 대통령을 무차별적으로 조롱해 권위를 깨부수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하지만 왜 드라마를 즐겨 보는 것 자체까지도 무시와 폄하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 난 어쩌면 이게 정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간 재벌들이 정경유착으로 대한민국을 쥐고 흔든 게 더 클 것이지만, 당신은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여자들, 점 보는 거 좋아하고 드라마 보는 거 좋아하는 여자 몇 명이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시민 김나연씨의 페이스북 담벼락 글 중에서 발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조금은 더 정조준을 해주시라. 박근혜를 향해 던진 당신의 조롱이 빗나가는 순간, 졸지에 하루치의 고단함을 잠시라도 잊어보고자 드라마를 보는 동료 시민이 그 조롱을 견뎌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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