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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이완용은 어떻게 매국노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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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나라 팔아 먹은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이완용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가(可)’에 서명한 다섯 대신(일명 을사오적: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중 하나이며, 그 이후 총리대신이 되어 고종 퇴위와 일본의 점령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일파가 아니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한 엘리트였으며,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매국노가 되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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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친미파였고 우리 민족을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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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미국에서 1888년 말부터 1890년 10월까지 주미대리공사로 활동하였다. 이때 주미공사관 서기관으로 일했던 알렌과 친해진다. 이후 알렌은 이완용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19세기 말 조선과 미국을 둘 다 본 이완용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미국을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조선 상태는 후진적이라는 것이 그의 머리 속에 있었을 것이다.

“차관 도입의 실패와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확산으로 주미공사관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낭인 단체인 흑룡회 간사를 지냈던 쿠즈 요시히사는 이완용의 주미대리공사 시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느 미국인이 이완용에게 한국인은 돼지만도 못한 열등 민족이라는 말을 했을 때 이완용은 이 말에 몹시 자극받아 세계 일등 민족이라는 미국을 연구, 시찰하였다.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의 특수 부락도 가보았고, 인도, 멕시코, 폴란드 심지어 유대인까지 두루 연구해보았다. 그 결과 과연 한국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록은 한국 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던 일본 낭인이 한국의 대표적인 양반 관료였던 이완용의 말을 빌려 마치 한국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하다는 것을 한국인 스스로 인정했고, 그래서 ‘문명국’ 일본에게 나라를 넘길 결심을 했다는 식으로 적어놓은 글이다. 따라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 우리는 이완용이 받았을 문화적 충격과 자신에 대한 회의를 짐작할 수 있다.” (책 ‘이완용 평전’, 김윤희 저)

2. 개혁파 쪽에 줄을 서서 독립협회 위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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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조선 말기 보수 세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혁 세력이었다. 여러 힘들을 모아 만든 결사체가 독립협회다. 우리는 ‘서재필=독립협회’라고 생각하지만, 독립협회 첫 위원장은 이완용이었다. 독립이라는 단어와 참 안 맞는 인물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의 활동은 매국보다는 개혁 쪽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완용 등은 독립문 건립을 계기로 보수 세력의 발호에 대응하여 개혁을 표방하는 세력의 결집을 시도했다. 보수 세력과 유생층의 공격을 받고 있던 서재필 역시 ‘독립신문’의 발간만으로는 자신의 목적 달성이 어렵다고 보았기에 정치적 당파를 조직하여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보수 세력을 대립 축으로 한 양자의 이해관계는 7월 2일 독립협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완용, 안경수, 김가진 등 14인의 발기인은 독립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한다는 사업 목적을 표방함과 동시게 위원장으로 이완용을 선출했다. 또한 회석회의 겸 회계장에는 안경수를, 고문에는 서재필을 선출했다. 회원들은 대부분 1880년대 이후 추진된 서양 문물의 도입 과정에서 외국을 방문하거나 그곳에서 유학한 이들로 외국 상황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관료들이었다. 처음에 독립협회는 이들 관료의 정치적 결사체의 성격이 강했다. …. 독립문 정초식은 요즘의 기념식과 거의 흡사하게 진행되었다. 이완용은 이때 처음으로 정초식에 모인 대중 앞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 좌우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 것이니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책 ‘이완용 평전’, 김윤희 저)

3. 결국 나라를 팔아 먹는 편에 서다.

을사늑약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와 만나질 않았고, 대신들이 이토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때 이완용 등은 일본이 내세운 조건에 질질 끌려갔다. 협상은 없었고 일방적인 통보만 있었다. 그 후 일본이 고종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도 결정했을 때는 더욱 능동적이었다. 본격적인 매국노가 되어간 것이다.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은 송병준과 조중응을 제외한 내각원 구성의 전권을 이토에게 위임받았다. 이토는 일진회를 이용하기 위해 일진회 고문이었던 송병준을 내각에 등용하는 한편,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으로 인해 일본에 망명하여 이토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조중응을 발탁했다. ….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 강화 방침을 확인한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을사조약을 위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이므로 일본이 대한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협박했다. 이토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폐위하고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할 작정이었다. 이토의 강경한 입장을 확인한 이완용은 …. “일본이 요구하는 ‘합병’과 ‘이토 통감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황제가 양위를 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완용과 이토에 의해 구성된 내각원이 그의 주장에 반대할 일은 없었다.” (책 ‘이완용 평전’, 김윤희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