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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특수통'은 '의뢰인 박근혜'를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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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경 대검찰청 중수부장이 2011년 11월2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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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28일 불타는 금요일. 청와대는 그야말로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비선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이 확인된 뒤 국민들이 하야를 외치기 시작했으니까요. 어찌할 바를 모르던 박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진의 일괄 사표를 받은 뒤 맨 처음으로 임명한 자리가 민정수석, 주인공은 ‘검사’ 최재경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택한 최고의 ‘전관 변호사’ 최재경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장님은 구름 위에 계십쇼. 비는 저희가 맞겠습니다.”

이명박 정권 말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회식 자리에서 한 검사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장님’은 최재경 중수부장이다. 이게 웬 볼썽사나운 아부냐고? 하나 이 검사의 발언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검사 최재경을 향한 검찰 내부의 신망은 일반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비선 참모에 의지한 통치 사실이 드러나 대통령이 하야 위기에 몰리며 쑥대밭이 된 청와대로 들어갔다.

경남 산청 출신이지만 대구고를 나온 최재경은 검찰의 대표적인 티케이(TK) 인맥이다. 1981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87년에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지검 특수부, 대검 중수부 등을 거치며 한진그룹 탈세, 언론사 사주 탈세,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맡아 특별수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별수사란 정치인·고위공직자·기업인 등 권력을 가진 자들을 타깃으로 한다. 권력형 비리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기 때문에 강직한 성품과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단은 기본이다. ‘검사 최재경’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으로 “첫째는 조직, 둘째는 상관”을 꼽을 정도로 검찰 조직과 상관에 대한 충성심도 투철하다. 수사 과정에서 함께 고생한 후배들의 인사를 살뜰하게 챙기는 것도 특징이다. 검찰 내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미래의 검찰총장감”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검사 생활을 이어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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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경 민정수석이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이던 2008년 12월1일, 세종증권 매각 로비에 연루된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를 소환한 뒤 기자들을 상대로 설명하고 있다.

‘우병우+인격=최재경’

박근혜 정권에서 민정수석 자리를 주고받은 ‘검사 우병우와 최재경’은 탁월한 수사검사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곧잘 다음과 같이 비교됐다.

“우병우가 어떤 사람인가. 당대 칼잡이다. 거기서 인격을 조금 더하면 최재경이 된다.”(한 부장검사)

“우병우는 일 잘하고 머리가 너무 좋다. 독종인 거야 말할 것도 없고. 우병우가 인간성만 갖추면 최재경보다 더 나을 것도 같다.”(검찰 출신 변호사)

‘우병우+인격=최재경’이라는 얘기다. 피의자를 불러다가 백지 한 장을 주면서 잘못한 일을 적으라는 우병우식 수사와, 인간적인 면모로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최재경의 수사 스타일은 천양지차다. 최재경 자신도 평소에 인간미 넘치는 수사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중수부장 시절에 한 말이다. “인간 냄새 나는, 인간미 나는 수사를 위한 매뉴얼을 내고 싶다. 예를 들면 피의자에게 구속 집행 전에 빗을 줘서 머리를 빗게 하고 양복에 넥타이를 매게 하고 집행할 때는 옆에서 붙들지 않고 자유롭게 가게 한다든지. 압수수색은 새벽이나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에 집행한다든지. 그렇게 하면 수사 100계명, 1000계명도 가능하다.”

그는 사석에서 집안 내력을 소개하며 ‘선비 정신’을 강조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된 최영경이 옥사한 뒤 후손들은 노론에 빌붙지 않고 끝까지 초야에 묻혀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너희 할아버지는 감옥에서 바를 정(正)자를 쓰면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서 자랐다”며 “어린 마음에 ‘그런 할아버지 욕되게 살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만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아저씨뻘이며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최구식 전 의원과는 사촌지간이다. 언론과도 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기자들의 평도 좋았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강효상 새누리당 의원 등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서울대 81학번 동기인 <조선일보> 기자들과는 막역한 사이다.

인품 있는 특수통으로 이름을 날리던 최재경은 대선이 있던 해인 2007년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해 그는 서울중앙지검의 핵심 수사 부서인 특수1부장에 기용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와 본선 티켓을 놓고 피 터지게 경합하던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 땅 차명 보유 의혹을 수사하게 된다. 이 후보의 큰형 이상은씨 명의로 돼 있는 서울 도곡동 땅의 실제 주인이 이 후보라는 게 의혹의 주된 내용이었다. 최재경 특수1부장은 2007년 8월13일 “이상은씨 명의로 돼 있는 도곡동 땅의 지분은 제3자의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일주일 전이었다. 경선을 코앞에 두고 이명박 후보의 재산은닉 행태를 검찰이 확인해줬다. 도덕성에 흠결이 많은 이명박 후보가 아닌 박근혜 후보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러나 경선 결과는 이명박 후보의 1.5%포인트 차 신승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비비케이(BBK) 주가조작 사건,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의 실소유 의혹도 수사하게 됐다. 수사 대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피의자의 신분은 그해 12월 당선이 확실시되는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바뀌어 있었다. 최재경 특수1부장이 팀장을 맡은 특별수사팀을 꾸린 검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벌여 대선을 2주일 앞둔 2007년 12월5일 비비케이 주가조작 사건과 이명박 후보의 다스 실소유 의혹을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4개월 전 “제3자의 차명재산으로 보인다”는, 즉 이명박 재산으로 추정되는 도곡동 땅의 매각대금이 다스로 흘러들어갔는데도, 검찰은 이명박과는 관련이 없다며 면죄부를 줬다. 4개월 전 수사 결과까지 뒤집어가며 유력 대선후보의 모든 의혹을 통크게 털어준 것이었다. 이때부터 최재경 검사에게는 ‘비비케이 검사, 정치 검사’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수사결과 발표 시기를 두고도 말이 많았는데 최재경 부장 등 수사팀은 “대선 이후에 수사 발표를 하는 게 더 정치적으로 보인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건 그들만의 생각이었다. 한 부장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수사 결과는 대선 이후에 발표해도 된다.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고 대선 전에 발표한 거다.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대선 앞두고 국정원 댓글 사건 발표한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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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1일 사퇴를 발표한 뒤 떠나는 한상대 검찰총장을 배웅하러 나온 최재경 중수부장. 가운데 안경 쓴 이는채동욱 대검 차장.

“최재경은 정권을 위해 피벗 플레이”

그렇게 엠비 정부가 탄생했다. 이명박 정권에서 검찰은 공권력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정치적 반대파를 억누르려는 정권의 뜻을 충실하게 따랐다. 대검 중수부는 비열한 창피주기 수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았다. 서울중앙지검은 국세청과 세금 소송 조정에 합의했다는 이유로 정연주 한국방송(KBS) 사장을 배임 혐의로 기소하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의 위험성을 지적한 <피디수첩> 피디들을 법정에 세웠으며, 경제위기를 경고한 ‘미네르바’를 구속했다. 양심을 저버리고 권력의 ‘충견’ 노릇을 하며 무고한 사람을 물어뜯은 검사들에게는 좋은 보직과 승진이라는 선물이 돌아갔다. 나중에는 검찰총장이 나서서 재벌 회장에 대한 봐주기 구형을 하더니, 중수부 폐지를 놓고 저희끼리 싸움을 벌이다 결국 사실상 ‘붕괴’됐다.

엠비 검찰 막장 드라마의 주연은 단연 대구·경북, 그리고 고려대 출신의 이른바 티케이케이(TKK) 검사들이었다. 청와대 민정수석부터 시작해 이명박 대통령의 법률 참모 노릇을 충실히 했던 권재진 법무장관과 고려대 출신 한상대 검찰총장이 두 축이었다. 최재경 중수부장은 법무부와 검찰 사이에서 이명박 정권의 역린을 효과적으로 보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엠비 정권 말 검찰의 붕괴를 지켜본 한 검찰 고위 간부는 “최재경 중수부장이 정권을 위해 피벗 플레이(한 발을 축으로 회전하는 일)를 했다. 검찰 수사의 세세한 것을 조정했다. 그렇게까지 총대를 멜 줄 몰랐다”고 말했다.

검사 최재경의 대표적인 피벗 플레이로 꼽히는 건 민간인 사찰 재수사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의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이 공무원 감찰 조직인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비선으로 움직였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방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은밀하게 이뤄지던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은 2008년 6월 꼬리가 밟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의료 민영화 등을 비판하는 ‘쥐코’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 케이비(KB) 자회사 대표 김종익씨를 찾아가 사무실을 수색하고 일자리를 잃게 한 일이 계기다. 국회에서의 폭로와 언론 보도로 어렵사리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으나 민간인 사찰의 실행 부서인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은 검찰이 압수수색에 뜸을 들이는 동안 사무실 하드디스크를 영구 삭제해 버렸다. 검찰은 “불법 사찰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며 하드디스크를 삭제한 장진수 주무관 등을 기소하고 사건을 덮었다.

그러나 사건은 이명박 정부 말에 다시 불거졌다.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에서도 공무원 복직이 불가능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 장진수 주무관이 2012년 3월 “하드디스크 삭제를 지시한 건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최종석 행정관”이라고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총리실 직원들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에서 지휘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주장이었다. 장 주무관은 또 “항소심 직후인 2011년 4월 류충렬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장석명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마련한 돈’이라며 5000만원을 건넸다”고 추가 폭로했다.

장 주무관의 입을 막기 위해 청와대가 ‘돈질’을 했다는 충격적인 폭로가 이어지자, 검찰은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재수사에 착수했다. 재수사팀은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통해 공직윤리지원관실에 파견나온 공무원의 유에스비(USB)에서 ‘일심 충성 문건’을 발견했다. “통상적인 공직기강 업무는 총리가 지휘하되, 특명사항은 브이아이피(VIP)께 절대 충성하는 친위조직이 비선에서 총괄지휘”하고 “브이아이피 보고는 ‘공직윤리지원관실→비에이치(BH·청와대) 비선→브이아이피(또는 대통령실장)’로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민간인 사찰의 최고 윗선이 이명박 대통령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전모를 밝혀줄 핵심 물증인 유에스비가 서울중앙지검 수사팀 바깥으로 반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핵심 증거물은 훼손 우려가 있어서 담당검사실에서 잘 보관해야 하는데 대검 수사관이 유에스비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복수의 검사들은 이를 지시한 사람으로 최재경 중수부장을 지목했다.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책임자인 박윤해 팀장이 대검에 보내라고 했고, 유에스비를 가져오라고 한 사람은 최재경 중수부장이라고 들었다”, “‘일심 충성’ 문건이 유에스비에서 나온 사실을 알고 최 중수부장이 유에스비를 들고 오라고 했고 검찰 수사관이 직접 가서 증거물을 담당하는 서울중앙지검 검사한테 받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검사들은 증언했다.

핵심 피의자의 소환 일정을 늦추는 등 검찰 수뇌부의 수사 방해를 절감하고 있었던 수사팀은 유에스비 반출에 격분했다. 결국 수사팀의 한 검사가 2012년 4월7일 토요일 새벽, 검찰 내부게시판에 ‘사직의 변’을 올리고 사표를 제출했다. 대검과 서울중앙지검이 발칵 뒤집혔다. 검찰의 부실수사로 착수하게 된 재수사를 검찰 수뇌부가 방해해 수사팀 검사가 사표를 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정권 말 검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이 쏟아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서울중앙지검 지휘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한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이 자리에서 수사팀장은 “최재경 중수부장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고 보고했다. 물이 엎질러지긴 했지만 검찰 수뇌부로서는 해당 검사의 사의를 철회시켜야 했다. 친분 있는 대학 선배 검사들이 그를 찾았지만 그는 사의를 꺾지 않았다.

결국 최재경 중수부장이 나섰다. 일요일인 2012년 4월8일 오전, 그 검사의 집을 직접 찾아 업무 복귀를 강하게 설득한 것이다. 결국 그 검사는 사의를 접었다. 동반 사표를 준비했던 다른 검사 2명도 “수사팀의 의견대로 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최교일 서울중앙지검장과 한상대 검찰총장이 받아들이자 사표를 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사건은 조용히 덮였다. 그러나 이 희대의 ‘유에스비 실종 사건’은 <한겨레>의 취재를 거쳐 2013년 1월, ‘최재경 중수부장, 사찰 핵심물증 틀어쥐고 시간끌었다’는 제목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워낙 은밀하게 은폐된 사건으로 취재가 쉽지 않았던 터라 당시 보도엔 약간의 오류가 있었다. 유에스비가 수사팀 바깥으로 유출됐다고 쓰지 않고, 유에스비 분석 자료를 중수부장실에서 가로채 수사팀에 전달하지 않았다고 기술한 것이다. 최재경 중수부장과 대검, 서울중앙지검은 이 부분을 문제삼아 해당 기사 전체를 허위보도로 몰았다. 일부 부정확한 부분이 있었지만 최재경 중수부장이 이명박 정권에 치명상을 안길 중요 물증에 손을 댔다는 의혹을 제기하기에는 충분한 사안이었지만, 검찰은 그 부분에는 입을 닫았다. 최 중수부장은 “기억이 안 나고 내가 유에스비를 갖고 있을 이유도 없다”고 주장했다. 일요일 아침에 검사 집까지 찾아가 사표 철회를 설득한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법무부에서 데리고 있어서 아끼는, 특수검사로 잘 컸으면 하는 후배여서”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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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비리 사건을 맡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2014년 7월24일 퇴임하면서 인사하는 최재경 인천지검장.

특수통-정치검사 교묘한 줄타기

첫 보도가 나간 뒤 검찰 내부의 반응은 엇갈렸다. 이른바 ‘최재경 사단’에 속하는 검사는 “최재경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최재경이 윗사람을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본인이 다 뒤집어쓴 거 아니냐”고 했다. 심지어 “‘정수장학회-문화방송 비밀 회동’을 보도한 최성진 기자를 검찰이 통신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해 <한겨레>가 검찰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며 무리한 기사를 썼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는 검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유에스비 실종 사건’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검사들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한 검사는 “이거 알고 있던 검사들끼리도 ‘기사 나오면 안 되겠다. 큰일 난다’ 했고 당시에 검찰 수뇌부가 꽁꽁 틀어막아서 기사가 안 나올 줄 알았다. 접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정도 나온 것도 대단하다”고 했다. 또 다른 검사는 “중수부, 서울중앙지검 등 3곳에서 보도 해명자료를 냈는데 유에스비를 실제 어떻게 했다는 해명이 한 줄도 없었다”며 혀를 찼다.

<한겨레> 보도는 최재경 중수부장이 정권에 치명상을 안길 수 있는 핵심물증을 수사팀에서 빼냈다는 의혹을 검사들의 증언을 통해 제기한 것이었고 최재경 중수부장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한겨레>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대검 중수부장이 수사를 방해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에스비는 대체 왜 수사팀 외부로 반출됐는지, 최재경 중수부장과는 정말 무관한 사건이었는지 검찰은 자체 감찰을 통해 경위를 밝혀야 했다. 그러나 검란을 자초한 한상대 검찰총장이 2012년 11월 쫓겨나고 검찰 조직이 총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며 새 총장 지명을 기다리고 있는 어수선한 터라 감찰은 이뤄지지 않았다.

엠비 검찰의 최후의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내곡동 사저 사건에서도 최재경 중수부장의 역할은 적극적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뒤 살게 될 집터를 내곡동에 마련하면서 자신이 부담해야 할 땅값 가운데 10억원 정도를 경호처에 떠넘긴 파렴치 범죄였다. 국가예산에 손실을 끼친 행위가 명백했지만 ‘대통령한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게 한상대 검찰총장의 뜻이었고 최재경 중수부장도 그 뜻을 충실히 받들었다.

중수부장 주재로 서울중앙지검 수뇌부와 토론을 벌인 자리에서 최 중수부장은 “사저가 들어서면 경호동 부지의 시세가 올라가서 개발이익이 생길 텐데, 이 이익을 국가가 독점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무혐의 주장을 했다. 그는 “옛날 같으면 그냥 넘어갈 법한 일이 문제가 생겼다”는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논리대로 엉성한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지만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자 특검이 재수사에 착수했고, 국가에 손실을 끼친 배임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엠비 정권 말기 검찰의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사건이었고 최재경 중수부장에게도 그랬다.

그렇다면 ‘당대 최고의 특수검사’는 왜 이런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일까. 많은 검사들은 최재경 검사의 ‘비비케이 수사’를 꼽았다. 검찰의 한 간부는 “비비케이 사건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자기는 죽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부장검사는 “비비케이 사건은 무혐의 처분이 맞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감정적으로 공격받고 그걸 방어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당 쪽으로 가버린 것 같다”고 분석했다. 중수부 폐지 등 일찌감치 검찰개혁을 공언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면 검사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껴 이명박 정권 보호에 나섰다는 얘기다. 물론 반론도 있었다.

이상득 전 의원,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 대통령 주변의 권력서열 1~3위를 구속한 사람이 최재경 중수부장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재경이니까 그 정도의 실세들을 구속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 간부 출신의 변호사는 “봐줄 거는 확실하게 덮고 빛나는 사건은 확실하게 하고, 최재경은 그런 걸 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명망 있는 특수검사와 세속적인 정치검사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했다는 얘기다.

이명박 정권 말, 박근혜 정권 초, 최재경 검사는 운이 별로 좋지 않았다. 2012년 11월 한상대 검찰총장과 중수부 폐지 문제를 놓고 격하게 부딪쳐 결국 한 총장을 몰아내는 ‘검란’의 주인공이 됐다. 애초 한 총장과 동반 사퇴가 점쳐졌으나 그를 따르는 후배들과 티케이 선배들의 만류로 잔류를 택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넘치는 자신감, 어쭙잖은 의리로 인한 자승자박”(한 부장검사), “총장을 날렸으면 같이 책임을 지고 옷을 벗어야 명예를 지키는 거지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남아 있냐”(특수통 평검사)는 등의 날선 비판도 많았다. 박근혜 정권 들어 고검장 승진에서 누락됐지만 인천지검장에 부임한 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비리 사건을 맡아 재기의 기회를 잡는 듯싶었다. 대대적인 수사 상황 공개로 여론몰이를 통해 유 전 회장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유 전 회장 검거에도 실패해 변사체를 40여일이나 방치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명예롭지 못하게 검찰을 떠나야 했다.

이명재 청와대 민정특보가 천거

검찰을 떠난 그는 한동안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았다. 대형로펌의 영입 대상 1호였지만 퇴직 10개월 만에야 서울 삼성동에 작은 개인 사무실을 열었다. 퇴직 직후부터 ‘전관’ 약발을 활용해 거액을 챙기는 보통의 판검사 출신 변호사와 확연히 다른 행보였다. 그가 공직에 돌아갈 뜻을 품고 ‘자기 관리’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법조계에서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김진태 검찰총장 후임 인선 작업이 시작된 2015년 8월엔 ‘최재경 검찰총장 설’이 유력하게 돌았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법조인은 “김수남 대검 차장이 0순위였는데 우병우 민정수석이 박근혜 대통령을 설득해 최재경 변호사도 후보로 올라갔다”고 전했다. 그러나 최 변호사는 검찰총장 후보 추천위원회의 검증 과정에서 탈락했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최재경 검찰총장 지명을 막아서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최재경 변호사를 민정수석으로 천거한 사람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최재경 민정수석’ 카드를 오래전부터 구상한 사람은 이명재 청와대 민정특보다. 경북 영주 출신인 이 특보는 검찰의 대표적인 티케이 원로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민정수석 자리에 오른 우병우 수석의 바람막이, 후원자 역할을 담당했다.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는 “우병우 수석이 <조선일보>와 갈등하던 3개월 전부터 이명재 특보가 몇몇 검찰 출신 변호사들을 상대로 민정수석에 뜻이 있는지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정기관을 완전히 장악해 박근혜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우병우 수석이 교체될 것을 대비해 ‘포스트 우병우’를 꽤 오래전부터 물색하고 있었던 셈이다. 최재경 변호사도 여러번 고사하다가 민정수석 자리를 수락했다고 한다.

두 기수 후배가 맡던 민정수석 자리를 이어받은 모양새이지만, 그의 청와대 입성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도가 연일 최저치를 경신하고 야당이 대통령의 모든 정치적 권한을 박탈하려는 논의가 진행되던 때 그는 전격적으로 발탁됐다. 비선 실세에 의존한 국정수행과 재단을 통한 ‘대기업 삥뜯기’로 검찰의 칼끝이 자신의 턱밑을 겨냥하던 시기에 박근혜 대통령은 ‘당대 최고의 특수통 검사’를 법률참모로 들인 것이다. 이건 단순히 박 대통령이 최고의 ‘전관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최재경 사단’이라고 불릴 정도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그가 검찰 특수라인에 드리운 그림자는 넓고 짙다. 검찰의 특수통 검사들이 파견 형태로 이번 사건의 주요 수사를 맡게 될 특검으로 넘어가도 마찬가지다. “(최재경 수석이) 혈연, 학연, 또 검찰에서 맺어왔던 인간관계, 그런 인연들에서 과연 자유롭게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최재경 수석 아래서의 검찰 수사가)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주변의 여러 가지 인연들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말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박 대통령의 임기도 아직 1년 이상 남았다. 박 대통령이 하야 위기를 넘기고 임기를 채운다면 최재경 민정수석의 인사권 행사를 검찰은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여러모로 검찰로서는 최재경 민정수석의 등장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외통수로 보였던 검찰 수사도 전세가 조금씩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는 모양새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이 선임한 홍기채 변호사는 2012년 대검 중수부 연구관으로 최재경 중수부장을 모셨던 ‘최재경 사단’의 일원이다. 애초 안 전 수석이 모든 책임을 박 대통령에게 미루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지만 안 전 수석이 실제 검찰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은 결이 달랐다. “(누군가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 정책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지시를 받아 수행한 것이다. 대통령께서 대선 때부터 공약으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강조하셨던 문화·체육 분야 사업, 한류 확산에 관한 구상을 실현한 것이다. 그러한 구상을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계속 기업들과 공유하셨고, 그 공유가 결실을 맺은 것이 두 재단의 설립”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에 둥지 튼 ‘법무법인 중수’

이렇게 되면 재단 설립을 챙기라고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박 대통령의 행위는 ‘공약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국정수행이 된다. 재벌의 발목을 비튼 모금 과정의 책임은 안 전 수석 몫이다. 이런 그림이 그려진 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도 안 된다는 게 다수설”이라고 줄곧 주장하던 김현웅 법무장관은 “수사 필요성을 감안해 (대통령이 수사를 자청하라고) 건의드릴 것”이라며 태도를 슬그머니 바꿨다. 급기야 10월25일 ‘2분짜리 사과’로 전국민적 분노를 자아낸 뒤 함구하고 있던 박 대통령이 4일 대국민 담화를 자청해 “필요하다면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고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불법행위와는 선을 그어 최소한의 도덕적 명분을 구축한 뒤 임기를 채우겠다는 속셈이다. 일방적으로 불리하기만 했던 수사판에서 박 대통령에게 유리한 그림을 만들고 일사불란하게 정면돌파하는 모양새에서 프로의 기운이 느껴진다. 최재경 민정수석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판세 변화다.

“나중에 개업하면 법무법인 이름을 ‘중수’로 할까.”

2011년 중수부 회식 자리에서 최재경 중수부장이 건넨 농담이다. 법무법인 중수를 만들진 못했지만, 그는 지금 중수부 규모의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에 맞서고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둥지를 튼 ‘법무법인 중수’는 마수걸이에 성공할 것인가. 그 성공은 박근혜 대통령을 위한 것인가, 국민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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