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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지진 때 국립박물관 유물들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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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감수했습니다.”

지난 9월12일 경주를 뒤흔든 지진을 떠올리면서 국립경주박물관 직원들이 한결같이 털어놓는 말이다. 두 차례의 강진이 일어났을 때 불국사 다보탑과 첨성대 등의 경주 문화유산들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박물관의 국보·보물을 비롯한 명품 유물들은 기적적이라고 할 만큼 별 이상이 없었다. 당시 박물관에는 신라금관과 기마인물상, 불상, 석조물 등 외부 충격에 취약한 조형품이 상당수 전시되어 있었고, 경주 순회전을 위해 서울에서 온 아프가니스탄 고대 황금유물까지 들어온 상황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큰 피해가 우려될 만한 국면이었는데 어떻게 박물관 유물들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다. 경주 지진 두달여 전인 7월5일 울산 앞바다에서 규모 5.0의 지진이 일어난 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불길한 감을 느낀 유병하 관장과 김유식 연구실장이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려 7월11일부터 8월22일까지 유물 500여점에 대한 고정 작업을 미리 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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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직원들이 지진 뒤 전시관 진열장에 있는 유물들을 줄로 고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경주 지진 때 박물관은 중요 유물들을 줄로 고정시키는 작업을 미리 마친 덕분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박물관에 따르면, 각 전시실에서 구조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금관과 석검, 금동불상 등의 전시품들을 낚싯줄로 꽁꽁 묶어 고정했다고 한다. 금령총 기마인물상과 토우항아리 같은 신라 명품 토기 안에는 비중이 무거운 금강사 모래를 담은 비닐용기를 넣고 실리콘으로 토기 하부를 바닥에 붙였다. 덩치가 큰 삼화령 아기삼존불과 남산 신성비 등의 석조물은 목재로 받치는 작업을 벌였다.

덕분에 두 차례의 강진이 경주를 할퀸 와중에도 박물관 유물들은 일부 위치를 조금 벗어난 것 외에는 무사했다. 천마총 출토 금관의 경우 높은 받침대 위에 놓여 사전에 낚싯줄로 고정하지 않았다면 밑으로 떨어져서 크게 부서졌을 것이라는 게 직원들의 전언이다. 유병하 관장은 “사전에 대비한 직원들의 노력과 천운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지진 때 전시실이 심하게 흔들리는 폐회로 영상을 보면서 모골이 송연했다”고 했다.

직원들은 1차 지진이 발생한 직후 20분 안에 대부분 박물관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박물관 안팎에서 피해를 점검하다 2차 지진을 맞았지만, 한동안 바깥으로 피했다가 돌아와 철야 점검을 벌이며 내부의 상황을 수습했다. 유 관장과 직원들은 계속되는 여진에 대비해 지진 다음날부터 나머지 유물의 고정 작업에 주력했다. 철야 근무까지 하며 지난달 17일까지 소장유물 7000여점의 내진 보강을 마친 상태다. 2011년 내진 성능 평가에서 박물관 본관이 최하등급을 받자 당시 이영훈 관장이 전시장을 장기휴관하고 예산 수십억원을 들여 2년여간 국내 최대 규모의 내진 보강공사를 벌인 것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배경이 됐다.

국내 박물관 사상 초유의 지진을 겪은 만큼 이후 지진에 대비한 매뉴얼 작성과 다른 박물관과의 공유 작업도 진행중이다. 경주박물관 쪽은 지난주 열린 박물관 자체 학술행사인 동원학술대회에서 사상 초유의 지진 경험과 대응방안에 대한 보고문을 발표했다. 논고를 낸 이재열 연구사는 “순식간에 닥쳐오는 지진 피해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면진대 설비와 유물 고정방식 개발 등 충실하고 완벽한 사전 대비라는 것을 실감했다”며 “각종 시설물, 진열장, 전시품, 받침대, 대응 매뉴얼 등 영역별로 면밀한 대응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문화재 선진국인 일본의 지진 대비 대책을 널리 참고해 국내 사정에 맞는 방재설비와 적용 매뉴얼을 갖춰야 하며 이를 위한 국가예산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일본의 주요 국공립박물관은 진도 7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와 주요 전시품 진열장의 면진대 설치를 의무화했고, 지진 발생 때 문화재기관의 단계별 대처 매뉴얼도 지역별 특색에 맞게 제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각 지역 박물관들은 경주의 대처 사례를 검토해 자체 매뉴얼을 준비하면서 주요 유물들의 고정 작업을 시작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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