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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최순실 일가의 40년 관계를 총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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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월21일 배재고등학교에서 열린 한국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박근혜 당시 퍼스트레이디 대행과 최태민(왼쪽)씨가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토요판] 박 대통령과 최태민·최순실 부녀, 1970년대부터 2016년까지
최순실 조카 장승호씨 최초 언론인터뷰

#1. 최태민과 41년-최순실과 37년

박 대통령이 만든 새마음 운동에
고문·대학생 회장으로 관계 맺어
최순실은 “1986년 첫 개인적 만남”

최순실(60)의 2살 터울 언니 최순득은 남편 장석칠(63)과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다. 그 아들, 다시 말해 최순실의 조카인 장승호씨는 현재 베트남 호찌민에서 유치원을 운영한다. 지난해 7월 호찌민에서 그를 만났다.

“저한테 누가 접촉해온 것은 처음이다. 왜 저한테 오셨나?”

-이모(최순실)나 이모부(정윤회)와는 연락하는가?

“이모는 가족인데 당연한 것 아닌가. 이모부와는 연락 안 한 지 오래됐다. 보통 이모부와 연락을 잘 하진 않잖아요?”

-이모가 박근혜 대통령과 연락하나?

“연락을 전혀 안 한다면 거짓말이고, 직접은 안 하신다. 중간중간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청와대도 들락거리시나?

“사람들 눈이 있지, 거길 어떻게 들락거리나. 말도 안 된다.”

-그래도 연락은 주고받는다?

“중간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같이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수십년인데.”

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는 분명 ‘수십년’의 관계다. 어머니 육영수씨 피살 사건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게 되면서,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새마을운동’에서 받침 하나만 바꾼 ‘새마음운동’을 자신의 브랜드로 삼았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이 함께 진행했던 관변 사회운동이었다. 1979년 6월 한양대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서 최순실은 전국새마음대학생 총연합회장 자격으로 당시 새마음봉사단 총재였던 박근혜를 수행했다. 최소한 이때를 기점으로 삼아도 둘의 관계는 37년을 헤아리고, 1975년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진 아버지 최태민과의 인연까지 합치면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최순실은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 어린이회관에서 처음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86년 유치원을 열어 원생을 모집했는데 운동장을 구하지 못해 어린이회관을 쓰기로 했고, 그렇게 ‘자매결연’을 맺은 뒤 원생들을 데리고 갔다가 우연히 박근혜를 만났다는 것이다. “아버지 이름을 말씀드리고, 편의를 봐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열심히 해보라며 아버지 안부를 물어 잘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두 사람의 1979년 만남은 버젓이 자료화면까지 남아 있다. 그런데도 1986년에 이전에 만났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한 것이다. 처음 만난 시점을 숨겨야 할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2. 숨겨진 가족들, 지워진 자식들

최씨 생전 “혈혈단신 월남, 딸만 넷”
사실 확인하니 혼외 아들 셋 더 있고
친동생 함께 월남, 부산서 공직생활

-외할아버지(최태민·1912~1994)는 어떻게 기억하나?

“저희한테 굉장히 잘 해주셨던 할아버지. 정말 사랑이 많은 할아버지. 매주 주말마다 가족들 다 같이 밥 먹고. 외할아버지하고 외가 친척 다 모여서 항상 다 같이 놀러다녔다.”

-외증조할아버지(최태민의 아버지)는 독립유공자셨다.

“그래요? 아, 얼핏 들은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조사하러 왔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혜택이 안 된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최태민의 아버지, 곧 최순실의 할아버지 최윤성(1892~1945)은 1919년 3·1 운동 당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장을 인쇄해 배부한 뒤 피신했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1년여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90년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생전에 최태민은 <가정조선> 1990년 9월호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어릴 적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의 재산이 탕진됐으며, 논밭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가족에 대해선, “형제가 3~4명 있었는데 다 죽었다. 이제 나 혼자고 게다가 월남한 신세여서 친척도 없다. 지금은 딸만 넷이 있다”고 말했다.

부인 임선이(1920~2003)와의 사이에 딸 넷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과 다르다. 1994년 최태민이 세상을 떠난 직후 임선이가 배다른 자식 3명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낸 적이 있다. 판결문을 보면, 최태민은 임선이와의 혼인신고 전에 두 여인에게서 이들을 낳았다. 결혼과 동시에 “편의상” 이 3명을 모두 임선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듯 출생신고를 했지만, 최태민 사망 뒤 임선이가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유산 배분 문제를 염두에 둔 조처였을 거란 관측이 제기되지만, 최태민 본인도 생전에 이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혈혈단신 월남’ 역시 의아스럽다. ‘독립유공자’ 최윤성의 유족 가운데 연금 등 혜택을 받는 ‘수권자’로는 최형석이란 인물이 등록돼 있다. 국가보훈처는 “대개 수권자는 직계자손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최형석은 최태민 동생의 맏아들이다. 최형석의 동생인 최용석(58)은 2012년 이후 여러 차례 <한겨레>와의 접촉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월남해서 부산 세관에서 일하다가 밀수꾼들의 총격에 숨졌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전해들었다고 했다. 그는 “백부(최태민) 쪽 사람들은 가족을 포함해서 친인척들을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백부한테 아들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만 셋이나 있다”며 ‘사촌형’들의 이름이 광언, 광현, 재석이라고 했다. 이 중 2명은 최태민 사망 뒤 소송을 당한 ‘혼외자’ 광숙(68), 광현(67), 재석(62) 가운데 2명과 이름이 일치한다.

2013년 2월 조웅(80·본명 조병규)은 박근혜가 최태민 및 그의 사위 정윤회와 불륜관계라고 주장하며 최재석의 이야기라고 근거를 제시했다. 1심 판결문은 최재석이 조웅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2014년 5월 대법원은 조웅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당시 최재석을 만났던 한 인사는 “선이 굵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그가 ‘주먹 세계’에 몸담았던 인물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는 최태민 사망 뒤 임선이가 호적을 정리하려고 나선 데 상당한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 게시판에 올라온 2003년 2월9일치 ‘교우 소식’에는 “2월6일 최순실 성도 모친 임선이 성도 소천”이라는 부음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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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부 문서 속 최태민

5공 때 “부인 6명, 승려이자 목사”
김재규 “10·26 최태민 전횡 때문”
박 대통령 “항간의 루머 믿지 말길”

최태민의 막내딸 최순천은 지난해 1월 <한겨레> 기자를 만나, “제가 좀 아쉬운 건 아버지가 참 복이 없다. 부모 잘 만나서 정규교육도 잘 받고 했으면 (세상이) 이렇게까지…(했겠나). 거의 난도질이잖아요”라고 말했다. 최윤성의 독립운동을 언급하자, “그런 건 하나도 안 나오죠”라고 했다. 최순천은 최순실과는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막내이모(최순실의 동생 순천씨)는 “아무도 몰라준다”며 억울해했다.

“억울한 거야 워낙 많으니까. 저는 안 태어나서 모르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도 (외할아버지가) 많이 끌려가서 고문당한 것으로 안다. 혜택은 무슨 쥐뿔을 봤다고.”

최태민에게 흔히 따라붙는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이자 목사’라는 수식어는 ‘최태민 관련 자료’라는 이름으로 된 문서에 기반한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면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다. 최태민은 <가정조선> 인터뷰에서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그 세대는 본명 외에 아명, 자, 호가 따로 있고, 전쟁 뒤 월남한 이들의 호적이 정리되면서 자신의 호인 ‘퇴운’이 이름으로 등록됐고, 1975년 이를 바로잡았을 뿐이라고 했다. 수사 자료에도 그가 쓴 이름 7개 가운데 호적 이름은 최퇴운과 최태민 2개였다고 돼 있다.

‘6명의 부인’에 대해 이 ‘수사 자료’는 “5번째”, “6번째”라며 2명의 이름을 제시할 뿐, 1~4번째 부인은 나오지 않는다. 자료에 나오는 최태민의 ‘여자관계’ 항목은 성행위의 시간, 장소, 과정, 횟수 등까지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최태민 쪽은 병실 입원 도중 강압적으로 이뤄진 수사와 기록이었다고 주장했다. 박근혜도 1990년 <가정조선> 인터뷰에서 그를 옹호했다. “저와 새마음운동을 하던 최(태민) 고문은 시기를 받았다. 투서가 들어오니까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조사를 시켰다. 아버지(박정희)는 내사 기록을 읽어보고 저를 배석시킨 가운데 친국(직접조사)을 한 뒤 없었던 일로 돌린 적이 있다. 최 고문에 대해 떠도는 항간의 루머를 믿지 않아주시기 바란다.”

하지만 김재규는 10·26 뒤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 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월간중앙> 1993년 11월호는 당시 분위기와 관련해, 박근혜가 지역에서 열리는 구국봉사단이나 새마음봉사단 행사에 참석하면 관내 각급기관장과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중앙부처 고위공무원, 국회의원들이 총출동했다고 전했다. “측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태민 총재의 위상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나중에 최태민씨는 도지사와 경찰국장을 전화로 호출해 호통을 칠 정도까지 되었다.”

10·26 뒤 박근혜는 청와대를 떠났다. 최태민이 ‘육영수의 목소리를 꿈에서 들었다’는 편지로 박근혜를 처음 만났고, 박근혜를 자신이 만든 대한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로 추대한 뒤 이 단체가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변신했던 석연찮은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한 권력 남용으로 최태민 주변엔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가 들끓었다는 의혹은 실체가 덮였다. 전두환의 합수부도 그를 수사했지만 밝혀진 건 없었다.

이후 최태민은 1980년대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는 육영재단에서도 권력 남용으로 안팎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결국 1990년 박근혜의 퇴진과 함께 전면에서 물러났다. <중앙일보>는 1994년 최태민의 부음을 전하며, “최씨는 최근까지 근혜씨의 생활비를 대주며 재산관리인 행세를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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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에서 새마음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제1회 새마음 제전’ 행사에 당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를 최순실씨(왼쪽)가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다. ⓒ뉴스타파


#4. 최순실 전횡의 시작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인사 개입
직원 140명·기자 16명 사직시켜
박 대통령 “내 인격에 대한 모독”

장승호는 가족을 데리고 베트남에 와서 2009년부터 유치원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모(최순실)가 유치원 운영 경험이 있으셔서, 조언을 주셨다고 들었다.

“저도 그 유치원에 잠깐 다녔다. 제가 유치원 때 생겨서. 조언도 주셨죠. 가족 사이에 못할 건 아니잖아요.”

-어떤 도움을 주셨나?

“이모님이 교재 고르는 건 도와주셨다. 하지만 디자인이나 선생님 선발 등은 다 제가 했다. 어릴 때부터 ‘이모가 유치원 했으니까, 너도 유치원 해. 물려줄게’라는 농담으로 권하는 말씀은 계속 있었다. 그러다 제가 진지하게 다시 얘기를 꺼내게 됐다.”

-이모가 많이 예뻐하신 게 사실인 모양이다.

“조카들은 다 친했다. 이모가 결혼을 늦게 해서 자주 뵙기도 했고. 지금은 제가 제일 친한 것도 있고.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연락은 꾸준히 하고.”

최순실의 과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1979년 전국새마음대학생 총연합회장이었던 최순실은 단국대 대학원 1학년으로 소개된다. 그는 <여성중앙> 인터뷰에서 ‘유아교육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였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고교 때부터였으나, 막상 대학에서는 유아교육과 상관없는 과를 다녔다. 뒤늦게 독일에서 3년 동안 유아교육에 관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지난해 학원(유치원)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유학 장소가 정녕 독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28일 <엠비엔>(MBN)은 최순실이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1981년, 1985년, 1987년 각각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8년 대구의 한 전문대 조교수 겸 부설유치원 부원장이 됐다고 보도했다. 1990년대 최순실과 교제하던 정윤회가 주변에 그를 ‘최 교수’라고 소개했다는 증언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미국일까, 독일일까?

최순실이 1985년 1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문을 열었던 초이종합학원(나중에 초이유치원으로 병합)은 주산, 미술, 음악,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당시엔 ‘초현대판 어린이 사설학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과 자매결연도 맺었다. 어린이회관 이사장은 박근혜였지만, 최순실은 1987년 인터뷰에서 “박근혜씨가 어린이회관의 육영재단 이사장이라는 걸 (자매결연 뒤) 처음 알았다”고 했다. 자매결연도,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300원씩 하는 입장료 디스카운트(할인)하고 유치원생들 타고 가는 버스가 회관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편의 정도를 제공받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이회관 직원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고 <여성중앙>은 전한다. 1986년 5월 어린이회관은 그림 그리기 대회를 개최했고, 각급 유치원생과 미술학원 어린이 몇천명이 참여한 뒤 입상자들이 결정되어 정문 게시, 보도자료 발송, 개별 통보가 뒤따랐다. 그런데 초이종합학원에서 전화가 와서는 “왜 (우리 학원) 성적이 좋지 않느냐. 초이종합학원을 모르느냐. 이사장(박근혜)도 잘 아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어린이회관의 미술담당 직원(교사)과 담당과장, 부장이 모두 권고사직을 당했다.

흉흉한 일은 그치지 않았다. 당시 박근혜는 1주일에 두 차례 결재를 하러 왔지만, 이에 앞서 제대로 된 직함도 없이 ‘최 회장’으로 불리던 최태민이 먼저 본 뒤 ‘오케이’를 해야 결재가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딸인 최순실은 자신이 주도하는 연구소를 통해 육영재단이 간행하는 잡지들의 편집에 간여한다는 비판을 샀고, 잡지 <어깨동무>와 <꿈나라>는 끝내 휴간 처분됐다. 어린이회관 직원 140명과 기자들 16명이 권고사직을 당한 반면, 초이종합학원 교사들은 어린이회관에 되레 입사했다. 1987년 9월 보다 못한 직원들이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개입을 규탄하며 7일간 농성시위를 하기도 했다.

최순실은 인터뷰에서 “좋은 뜻에서 건의해 시작한 일이 결과를 못 본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1990년 이사장직을 내놓으면서도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최순실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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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 대통령과 정윤회

정, 2005년까지 ‘비서실장’ 직함
박 대통령 정치 입문 때부터 호위
‘문건’ 나올때까지 행적 오리무중

최순실의 조카 장승호와 관련해,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이 확산하던 2014년 말 재미동포 매체 <선데이저널 유에스에이>는 그가 베트남의 한인 유력인사들에게 “은근히 자신의 배경을 과시하고 있”으며 “이 같은 배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가 무슨 정치인이나 건설사도 아니고…, 원생이 60명도 안 되고 연 매출이 5억도 안 되는 유치원 하고 있는데, 이런 것 하면서 제가 무슨 실세인가.”

-누군지 알려지면서 실세로 보고 접근해온 사람은 없었나?

“저는 있을 줄 알았는데 없더라.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얘는 피 터지게 일만 했는데 무슨 소리냐’ 하고 넘어가주시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대통령 박근혜’ 이름으로 된 민주평통 자문위원 임명장이 있었다. ‘대통령 박근혜’가 보낸 연하장 2장도 벽에 붙어 있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때 호찌민에서 열린 환영행사에도 그는 “끄트머리에” 참석했다고 했다.

최근까지 정윤회는 강원도 둔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최순실 관련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처를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도 둔내에 살면서부터는 새로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그의 지인은 “소박하게 살고 싶어하는 마음인 것 같다. 본인이 얼마나 그걸 소망할까 싶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그가 2014년 최순실과 갈라선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윤회의 아버지 정근모(81)는 최근 <주간경향>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갈라서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정윤회가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혼은 갑작스럽지 않았을 수 있다. 장승호는 “(두 분이) 싸우신 지 하도 오래돼서…, 하루아침에 이혼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승마계 인사도 개성이 강한 편인 최순실이 정윤회와 싸우는 모습을 종종 봤다는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이혼 뒤 두 사람은 별다른 왕래가 없다고 한다. 정윤회는 주위에 “내가 연락할 일은 없고, 연락이 올 때는 변호사가 왔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는 자기 앞으로 돼 있던 땅과 관련해, 최순실이 연락 한 번 없이 변호사만 보내서 명의 이전 서명을 하라고 한 적이 있다고 최근에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 일이 2011년 정윤회가 강원도 평창 땅 지분을 딸 유라(예전 이름 유연)에게 증여한 것을 의미한다면, 두 사람은 꽤 오랜 기간 사실상 이혼 상태를 유지해왔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1995년으로 알려진 정윤회와 최순실의 결혼은 40살·39살의 만혼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다. 또한 각자가 앞서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도 있었다. 정윤회의 아버지는 두 사람이 “고등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비행기 타다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정윤회는 친구들에게 “언젠가부터 최 교수가 내가 타는 비행기에 타더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최순실을 만난 뒤 1981년부터 보안승무원으로 일해온 대한항공을 관두고 일식집, 제과점, 수입상 등의 ‘사장님'이 됐다.

이 무렵 정윤회는 ‘육영재단 이사장 박근혜 비서실장'이란 명함을 갖고 다녔는데, 1997년 12월 이회창 대선 캠프의 부름에 응해 정치권에 입문한 박근혜가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정식으로 국회의원이 되자 명함을 ‘국회의원 박근혜 비서실장'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는 적어도 2005년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될 때까지는 ‘비서실장'이란 직함으로 일했다.

본인은 이후 박근혜의 곁을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행적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2014년 말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으로 정윤회는 다시금 떠들썩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검찰은 문서 유출만을 문제 삼아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관천 전 경정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지난 4월 항소심에서 조 전 비서관은 무죄, 박 경정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장승호는 청와대에서 받은 것이 있는지 거듭 물어보자, “제가 그나마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청와대 수첩 정도?”라고 말했다.

-이모 통해서 받았나?

“아니다. 다른 사람 통해서 받았다. 보통 수첩 쓰는 사람들은 큰 업무일지 쓰지 않나. 그래서 작은 수첩이 필요 없다면서 아는 분이 주셨다.”

27일 오후 장승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최순실씨와의 연락 여부를 물었으나, 그는 정중하게 인터뷰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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