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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걷기왕' 촬영 현장에는 성희롱 예방 교육이 있었다(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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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도 좋다’고 말하는 영화가 있다. 배우 심은경이 고등학교 경보 선수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된 저예산 독립영화 〈걷기왕〉이다. ‘선천성 멀미 증후군’으로 세상의 모든 교통수단을 탈 수 없는 ‘만복’은 공부하긴 싫고, 운동은 쉬울 것 같아 경보를 시작한다. 이 영화에는 스포츠 영화가 답습하는 ‘승리의 카타르시스’가 없다. 청춘 성장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성적 서사’도 없다.

이 영화가 남다른 점은 또 있다. 최근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사례를 증언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3월 촬영 전 스태프들을 상대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영화판에선 드문 일이다. 촬영 전 성희롱 예방교육을 맨 처음 제안한 〈걷기왕〉 시나리오 작가이자 스크립터인 남순아 작가의 이야기를 24일 직접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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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예방교육을 제안하게 된 계기가 있나?

“보조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 〈걷기왕〉이 제작에 들어갈 때 스크립터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애정이 큰 작품인데, 예전에 영화 현장에서 여성 스태프들을 상대로 한 성희롱 등의 문제를 많이 전해 들었고, 직접 겪기도 했다. 현장에 가기 전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 하면 덜 상처받고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홈페이지에서 ‘모든 촬영장은 크랭크인 전에 성희롱 예방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보게 됐다.”

-처음 제안했을 때 반응은 어땠나? 제작사 입장에서는 시간과 비용의 문제도 있었을 텐데.

“백승화 감독님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하니 흔쾌히 받아주셨다. 감독님은 이정환 피디님에게 다시 상의했고 피디님도 ‘원래 실시해야 된다’ ‘당연히 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감독님은 처음에 ‘안 되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할까’ 이런 이야기도 했다.”

-다른 촬영 현장에서 촬영 전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진 못했다.

“피디님이 알아본 바로는 대부분 영상이나 팸플릿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여성민우회 강사를 초청해 2시간 가량 진행했다고 들었다.

“영화노조에 적당한 강사를 문의해 봤는데, 일반 회사와는 다른 영화 촬영 현장의 특성에 맞춘 강사를 초빙하기 어려웠다. 예전에 민우회에서 ‘평등한 조직문화 만들기’라는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났고, 이왕이면 정확한 곳에 맡기고 싶어 민우회 강사를 모시게 됐다.”

-교육을 진행하며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

“프리 프로덕션 단계였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가 많지 않았다. 촬영 전까지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고, 의무사항이나 강제성은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나 참여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스태프가 참여해주셨다.”

-강의를 들은 뒤 동료들의 소감은 들어봤나?

“딱히 어떤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교육 이전에 민우회 쪽에 자료를 정리해 보내려고, 이전에 일했던 현장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꽤 많은 사람이 성폭력 또는 성차별적 환경에 놓였던 경험들을 털어 놨다.”

-교육 이후 스태프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달라진 점이 있는지?

“두 시간의 교육으로,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부당한 평가를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여배우’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지 않느냐는 이야기 등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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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현장에서 작업 중인 남순아 작가.

지난 3월9일 열린 성희롱 예방교육에는 '걷기왕' 스태프 3분의 2 정도가 참여했다. '걷기왕' 연출부는 교육 뒤 전 스태프들에게 배포되는 영화 콘티 북에 성희롱 예방 지침을 싣기도 했다. 영화 제작사 인디스토리 관계자는 “직접 해보니 큰 비용이 들지도 않았고, 다음 영화 촬영 때도 이 교육을 시행할 생각이 있다. 성희롱 예방교육은 다른 프로덕션에서도 모두 염두에 두는 부분으로, 다른 곳에서도 좀 더 퍼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관계자는 영화 촬영 현장 성희롱 예방교육에 대해 “4대 보험 등 기본 근로계약에 포함된 법적 의무사항을 고지할 때 포함시킨 내용이다. 최근 영화 촬영현장에서 영상이나 자료가 아닌 직접 강의 교육을 실시한 것은 오랜 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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