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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의 옛 애인이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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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BAEZ AND BOB DYLAN
Facebook/Joan Ba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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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연인이기도 했던 가수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바에즈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밥 딜런의 불멸을 알려주는 또 한 걸음”이라며 “저항적이고, 세상을 등진 듯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 예술가/작곡가는 노벨문학상에 딱 맞다”고 말했다. 바에즈는 “밥의 노래는 깊이, 어두움, 분노, 미스테리, 아름다움, 유머로 가득찼다. 지난 60년간 내가 그의 노래를 부를 때보다 기뻤던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노래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면서 젊은 시절 딜런과 함께 있던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1941년생 동갑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60년대의 아이콘’으로, ‘광장의 노래’로 함께 했고,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1961년 4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하던 무렵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금새 연인이 되어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함께 지냈다. 딜런이 무명작곡가에 불과했던 시절, 이미 신비한 미성으로 포크음악의 신예로 떠올랐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내세웠고,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 등 자신의 여러 곡을 바에즈가 부르게 했고, 둘은 어느새 민권·반전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 이후, 이어진 워싱턴 대행진 뒤 20대 초반이었던 둘은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며 공연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시작된 직후 열린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도 딜런과 바에즈는 선배 피트 시거와 함께 반전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1965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헤어진다. 딜런은 그해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나타나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나간다. 그러나 당시 관객들은 그를 향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소리치며 항의했다. 그리고 그의 노랫말에는 점점 ‘우리’보다 ‘나’가 많아졌다. 이후 발표한 ‘미스터 탬버린맨’ 등 그의 걸작들도 대부분 개인의 고독을 노래한 곡들이 많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사람들은 내게 이 시대의 양심으로서 의무를 회피하지 말고,밖으로 나와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내가 대변하고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뒤에도 민권·반전 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 지평을 국제적으로 더 넓혀나갔다. 1971년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그리스에서 연 것을 비롯해 프랑크 독재 치하의 스페인, 베트남, 북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레바논 등 전쟁과 독재에 시름하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이처럼 존 바에즈가 전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민중과 민권을 벗어나지 않은데 반해, 밥 딜런은 늘 움직였다. 포크록으로 넘어갔던 그는 이후 내슈빌 컨트리록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1980년대에는 기독교에 귀의해 가스펠록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에서도 또 벗어났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와 헤어진 직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하는 등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동시에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 늘 불화로 끝맺었다. 존 바에즈는 운동권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해리스와 1968년 결혼했으나, 그도 이혼했다. 존 바에즈가 무료공연과 공연기금 전액기부 등을 할 때, 밥 딜런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또 순회공연에 나서 이를 메우기를 반복했다.

존 바에즈는 1993년 사라예보 내전 당시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는 관객들을 위해 방탄조끼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고, 2011년 11월 뉴욕 리버티 파크에 통기타를 들고 나타나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존 바에즈는 그가 부른 노래 ‘흔들리지 않게’(노 노스 모베란·No Nos Moveran)처럼 (물가 심어진 나무처럼) 늘 그 자리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밥 딜런은 자신이 작곡한 노래이자, 종종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 ‘아임 낫 데어’(I am not there)처럼 늘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존 바에즈는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밥 딜런은 “나는 집단적 인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밥 딜런은 ‘광장’을 떠났지만, 밥 딜런의 노래는 지금도 존 바에즈가 ‘광장’에서 부르고 있다.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1975년 본인이 작사·작곡한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Diamonds and rust)에서 딜런과의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노랫말을 쓰기도 했다.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는 ‘숯은 다이어먼드가 되고, 철은 녹이 된다’는 뜻으로 지난 일을 회상하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그 가사 내용 중 일부다.

“10년 전/난 당신에게 커프스 단추를 사줬어요/당신도 내게 뭔가 선물했죠/우리 둘다 추억이 뭘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어요/다이아몬드와 녹(행복과 상처)이죠/

이미 흘러간 사람인데/잊히지 않는 사람/타고난 방랑자/당신이 내 품에 들어왔죠.

(…)

갈색 낙엽 흩날리는 가운데/당신 서 있는 걸 보네요/당신 머리칼도 희끗희끗하네요/이제 워싱턴 광장 너머/초라한 그 호텔 창가에/당신의 미소

(…)

당신이 내게 말하네요/이젠 지난날 그리워 않는다고/다른 말로 해봐요/언제나 모호하게 말하는 당신/당신의 모호함이 내겐 너무 분명하네요/

그래요 난 당신을 너무 사랑했어요/이미 지나간 행복과 상처가 내게 다시 온다 하더라도”

1975~76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전미투어 공연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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