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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역사상 가장 왕답지 않고 기이했던 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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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 한 기업을 경영하는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일을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경영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여야 하며, 자기와 이해관계가 다른 각종 집단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역사적으로 왕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소 무능한 왕일지라도 왕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노력은 기울였다. 그 노력이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할지라도, 그 진정성을 의심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아예 왕이기를 포기한 왕도 있었다. 고려 충혜왕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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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정상적으로 성에 집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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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은 대부분 후궁을 둔다. 그렇다고 성에 집착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관행이었고,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의 왕들 중에도 정상 범주를 벗어나 ‘막 나간’ 왕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 충혜왕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충혜왕은 난잡한 성욕을 드러내면서 일종의 정력제인 열약을 복용하곤 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상대 여성들이 충혜왕의 강한 성욕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기옹주만은 충혜왕을 잘 감당하면서 왕과의 사이에 석기라는 아들까지 두었다. ….성욕을 푸는 대상에서 공신들의 부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 충혜왕은 왕성한 성욕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살인과 폭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 동석한 최원이라는 자가 충혜왕에게 솔깃한 얘기를 했다. 어디에 가면 정말 미색이 뛰어난 처녀가 산다고 귀띔한 것이다. 얼굴 예쁘다는 말만 들어도 성욕을 발동시키는 충혜왕이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당장 그날 밤 술자리를 뒤로 하고 무리들을 거느리고 처녀가 산다는 곳으로 쫓아갔다. 그런데 그 집에 웬 노파가 혼자 살면서, 자기 집에는 그런 여자가 없다고 한 것이다. …. 처녀를 아무리 찾아도 없자, 충혜왕은 성욕만 돋아놓고 자신을 흥분시킨 최원이 얼마나 미웠던지 그 노파와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말았다.” (책 ‘고려 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 이승한 저)

2. 왕답지 않게 축재에 집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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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재상이 축재에 몰두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왕이 재산을 모으는데 주력을 했던 경우는 드물다. 취미 때문에 희귀한 돌을 닥치는 대로 모았던 송나라 휘종이 특이한 경우였다. 이런 돌 뿐만 아니라 서화나 진귀한 보물도 모았다. 이런 황제를 둔 송나라는 결국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남쪽으로 쫓겨나게 된다. 충혜왕도 왕답지 않게 재산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재산 증식을 위해 마련한 것이 직세였다. 직세는 관직에 있다가 낙향한 관리들에게 징수하는 세금이었는데, 이런 징세에 대한 발상은 충혜왕의 측근에 있는 자들이 주장한 것이었다. 과세 기준은 6품 이상 관리는 포 150필, 7품 이하는 100필, 산직은 15필로 정해졌다. 듣도 보도 못한 정말 희한한 세금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낙향한 관리들은 가족을 데리고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배를 타고 섬으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충혜왕은 그 측근들을 각도에 파견하여 산택에 불을 질러 수색하고 도주한 자들의 친족에까지 손을 뻗쳐 닦달하였다. 이에 온 나라가 소란하였고 백성들의 원망이 가득했다고 한다. …. 충분한 증거가 없어 조심스럽지만, 당시 왕실의 재정은 원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게다가 원의 황실에서나 조정의 권력자들은 고려의 토지나 군현 단위의 지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조세로 거두어들이는 수입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런 사정이 겹쳐 왕실 재정을 어렵게 만들고, 이에 따라 축재에 발 벗고 나서는 일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책 ‘고려 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 이승한 저)

3. 미치광이 같은 놀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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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연산군이 있었다면, 고려에는 충혜왕이 있었다. 연산군은 온갖 유흥에 빠져 올바른 정치를 멀리했고 두 차례 사화를 일으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을 대거 제거했다. 충혜왕에게 정치적 행위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시정잡배와 같은 삶 그 자체였다. 궁궐 속에서만 있었다면 피해가 덜했을 텐데, 백성들 속으로 뛰어들어 온갖 못된 짓을 하였다.

“1343년 3월, 충혜왕은 대궐 밖으로 나가 장난으로 탄환을 쏘면서 길가는 사람을 맞히는 놀이를 하였다. 여기 탄환이라는 것이 화약을 장전해서 쏘는 총인지 아니면 고무줄로 쏘는 것인지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사람들을 겨냥하여 탄환을 쏘니 백성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개념 없는 미치광이 같은 짓으로 위험천만한 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밤에 충혜왕이 무뢰배들을 거느리고 민천사에 갔는데 비둘기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둘기를 잡으려다 누각을 통째로 붕태우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 철부지 소년도 아니고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민천사는 조부 충선왕이 모후였던 제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했던 사찰이었는데 충혜왕한테는 이런 사실도 별 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책 ‘고려 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 이승한 저)

결국 기황후의 결정으로 충혜왕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 압송된다. 충혜왕이 원으로 압송된 후 고려 관리들 사이에 충혜왕을 구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벌어진다. 탄원서 서명도 지지부진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워낙 엉터리 왕이었기에 관리들도 그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안 들었을 것이다. 결국 충혜왕은 게양현으로 가던 중 악양현에서 죽고 만다. 우리 역사에 최악의 왕으로 기록이 남은 30년의 인생이 이렇게 끝이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