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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한국어 회화사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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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처참히 짓밟힌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조선 정부는 무기력했다. 부산에서 한양까지, 그리고 다시 평양까지 숨돌릴 틈 없이 일본은 치고 올라온다. 그리고 전쟁은 중간에 휴전 회담 과정 등을 포함해 7년에 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들은 상당한 불편함을 느낀다. 언어적 문제가 가장 컸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자, 아예 한국어 회화집을 만들었다. ‘음덕기’ 권76에 실려 있는 ‘고려말에 대하여’다. 이 회화집은 어떤 목적을 지닌 문장과 단어들이 실려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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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백성들을 겁을 주었다.

가슴 아프게도 조선의 임금 선조는 백성을 지켜줄 능력이 없었다. 전쟁 발발 초기에는 특히 조선의 군사를 만나는 일보다 일본 군사를 만나는 일이 잦았다. 조선 사람들을 만난 일본군들이 했을 법한 이야기는 뻔하다. 회화집에 나와있는 문장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일본군은 조선 땅 곳곳에서 조선인 안내자에게 ‘이 길인가’라고 물으며 파죽지세로 북상했을 것이다. 소문을 듣고 일본군을 피해 달아난 조선인에게 ‘산에 숨어 있는 사람 내려오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포로로 잡힌 조선인 백성에게 심문을 하며 ‘곧이 이르라’고 다그쳤으리라. 겁에 길린 조선인들의 모습이 ‘무서운가’라고 묻는 일본군의 모습에 겹쳐진다. ‘나이 몇이고’ ‘자식 있는가’ ‘동생 있는가’ ‘아비 있는가’ ‘어미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 심문에 쓰였으리라. …. 이 모든 상황에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조선인들에게는 ‘사람 많이 죽었다’ ‘네 목 벨 것이야’와 같은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책 ‘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저)

2. 조선인 중 재주 있는 사람을 골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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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열광했던 중국 자기는 수시로 실시하는 ‘해금정책’(바다로의 교류를 막는 정책)으로 인해 수출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 빈틈을 일본이 파고든다. 꽤 많은 양의 일본 자기들이 유럽에 수출된다. 그런데 일본 자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조선인 혹은 그의 후예였다. 일본인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춘 조선인들을 잡아가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심문을 통해 특별한 재능을 지닌 조선인을 골라내고자 했으리라. ‘피리 부는가’ ‘장인(匠人)인가’ ‘글 하는가’ ‘노래 불러라’ ‘춤 춰라’라는 식의 질문이 그러한 예다. 일본에 끌려가 서예가로서 족적을 남긴 홍호연과 같은 소년 포로는 붓을 들고 한시를 읊었기 때문에 살해당하지 않고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에 생포되었을 것이다.”(책 ‘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저)

3. 약자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전쟁이 나면 항상 그 사회의 약자들이 가장 고생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같다. 임진왜란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군에게 잡힌 포로, 그리고 여성들의 고생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에게 한국어 회화사전을 보며 우리 말을 지껄였을 일본군을 생각하면 분할 따름이다. 어떤 말들을 포로와 여성들에게 건넸을까?

“포로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고 짐을 나르게 하는 장면도 유추할 수 있다. ‘잘 씻으라’ ‘술 덥혀라’ ‘이거 가지고 있어라’ ‘가지고 가라’ ‘이리로 가져 오라’ 같은 말도 실려 있는 것이다. 조선 여성은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약자였다. 일본 병사들은 조선인 여성을 찾아 ‘고운 각시 더불어(데리고) 오라’ ‘옷을 벗으라’ ‘입어라’라고 말했을 것이다.”(책 ‘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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