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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W'보다 몇 발 앞섰던 '만찢남녀들'의 이야기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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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4일, 최고 시청률 13.8%를 기록했던 MBC 수목드라마 'W'가 16회를 끝으로 종영했다. 송재정 작가는 전작 '인현왕후의 남자'(2012)와 '나인'(2013)에서 선보인 시간여행이란 소재에 이어 '웹툰' 속에서 현실로 튀어나온 캐릭터라는 컨셉으로 다시 한 번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린 그림이 현실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은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주제였다. 'W'가 나오기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소설 속 '만찢남녀'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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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우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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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가 족자를 걸어놓고 가만히 부르기를,

"주(酒) 선랑(仙娘:선녀 같은 처녀)은 어디 있느냐?"
하니 갑자기 그 미인이 대답하며 동자를 데리고 나왔다.

"모든 공자에게 술을 부어드려라."
운치가 말하니, 선랑이 대답하고 잔에 술을 따라드렸다."
(책 '홍길동전•전우치전', 작자미상)

(* 전우치는 다양하게 불린다. 인용책의 표현에 따라 여기서는 운치라고 적었다.)

전우치는 말하자면 'W'의 오성무와 같은 인물이지만, 그보다 훨씬 단수가 높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족자 속 미녀를 몸소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 '주 선랑'이라 부르며 마음대로 부리는데다, 본인이 위기에 처하면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 그 안에 들어가 숨어버리기도 한다. 임금이 전우치를 역모죄로 몰아 처형하려 하자, 산수화 밑에 나귀를 그려 그 나귀를 타고 그림 속에 숨어버리는 식. 'W'의 강철이 창조자 오상무의 말을 거역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면, 전우치전에선 그림을 마음대로 부리는 강력한 창조자를 보는 재미가 있다. 만찢남 강철이 만찢녀 주(酒) 선랑(仙娘)을 만나면 무슨 말을 건넸을까?

2. 일본 기담

"또다시 삐걱거리는 소리가 돌아왔다. 유리문에서 나는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벽에 걸려 있는 족자 쪽에서 들려왔다...물가의 갈대 풍경 속에서 백로가 물 속에 있는 물고기를 노리고 있는 그림이다. 이불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벽 쪽을 보니, 족자 속의 백로가 허둥지둥 옆으로 달아나는 모습이 보이더니 어느새 족자 속에는 비가 내리고 그 너머에서 보트가 한 척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노를 젓는 사람은 아직 젊은…….고도였다. 고도가 가까이 다가왔다." (책 '집지기가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 나시키 가호 저)

일본 아동문학가 나시키 가호는 이야기 속에서 족자를 저승과 이승이 만나는 통로로 활용한다. 멀쩡한 족자에 갑자기 멋대로 비가 내리고 배가 다가오더니 죽은 친구가 젊을 적 모습으로 말을 거는 장면은 살짝 으스스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훈훈하다. 이 이야기에서 그림 속 인물은 현실 속 인물의 영향 따위 받지 않는 별개의 자율적인 존재로 그려지는데, 만약 이런 식으로 먼저 간 누군가가 '만찢'을 행해줄 수 있다면 우리도 족자를 하나쯤 걸어보게 되지 않을까?

3. 광화사

"...그 그림의 얼굴에는 어느덧 동자가 찍혔다. 자빠졌던 화공이 좀 정신을 가다듬어가지고 몸을 겨우 일으켜서 다시 그림을 보매 두 눈에는 완연히 동자가 그려진 것이었다.
그 동자의 모양이 또한 화공으로 하여금 다시 덜썩 엉덩이를 붙이게 하였다. 아까 소경 처녀가 화공에게 멱을 잡혔을 때에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원망의 눈! 그림의 동자는 완연히 그것이었다."
(책 '감자:김동인 단편선', 김동인 저)

'만찢'은 김동인의 단편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만찢'은 우리가 아는 '만찢'과는 사뭇 다른데, 그림 속 인물이 현실로 튀어나오는 게 아닌, 현실 속 인물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갇혀버리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10년째 여인의 초상화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는 화공은 마침내 적절한 처녀 모델을 찾아 초상화를 완성하지만, 마지막 그릴 눈동자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처녀를 죽이자 그림 속 눈동자가 저절로 그려지게 된다. 화공을 쳐다보며 원망하는 눈빛 그대로 말이다. 현실과 그림이 어느 한 쪽을 지배하지 않고 상호작용하지만 과히 행복하진 않은 결말이란 점에 있어서 'W'의 다크한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4. 그리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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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그말리온은 집으로 돌아오자 자기가 만든 처녀상 앞으로 다각, 긴 의자 위로 몸을 구부리고 처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입술에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퓌그말리온은 다시 한 번 처녀상의 입술을 자기 입술로 누르고 처녀의 몸을 쓰다듬어 보았다. 상아가 더없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손가락 끝으로 눌러 보았다. 휘메토스 산에서 나는 밀랍처럼 말랑말랑했다. 퓌그말리온은 놀랍고도 기뻤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혹 무얼 착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해서 사랑으로 뜨거워진 손길로 몇 번이고 이 그리워하던 처녀를 쓰다듬어 보았다. 처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혈관은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는 쑥 들어갔다가 손가락을 떼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책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토머스 불핀치 저)

그림이 아닌 조각으로 눈을 넓혀보면 'W'와 가장 비슷한 결말을 맺은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그렇다. 본인이 만들어낸 조각 갈라테이아를 사랑해 신의 힘을 빌려 생명을 불어넣어 자신의 여인으로 삼은 이 이야기는 현실과 가상이 만나 '사랑'이란 행복한 결실을 맺는다는 점에 있어선 'W'와 같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이 직접 사랑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W'에 그대로 대입하면 오성무와 강철이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식이 될 게다. 어쨌든 'W'의 오성무도 마지막에 강철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니, 그리스 신화를 장치를 빌려 브로맨스를 상상해보는 것도 과히 나쁘진 않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