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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독서 말고 할 수 있는 일들 4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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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스타일링이 요즘 인기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매력적인 서재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기도 한다. 서재가 단순히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공간이 아니라 보다 세련된 문화적 취향을 즐기고 공유하는 복합적인 공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서재가 복합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건,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독서뿐만 아니라 보다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재에서 독서 말고 할 수 있는 일들 중엔 무엇이 있을까? 옛 조상들의 사례와 문학의 에피소드에서 몇 가지 방법들을 찾아봤다. 잘 보고 즐길만한 게 있을지 참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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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숙(아닌 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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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추운 어느 해 겨울이었다. 습기가 밖으로 배어 나온 벽엔 얼음이 얼었고, 그 얼음벽은 그대로 거울이 되었다...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차가운 이불 아래에서 시를 몇 편이나 외우고 또 외웠는지 모른다...그러나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한서(漢書)> 한 질...을 펼쳐 이불 위에 죽 늘어놓았다...그러고는...<논어(論語)>...을 펼쳐 등촉 뒤에 세웠다. 과연 바람의 기세는 곧 수그러들고, 불빛도 흔들리기를 그쳤다."(책 '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안소영 저)

이덕무는 정조 시대의 유생으로 서얼이었다. 서얼은 공부를 해도 높은 관직에 올라갈 수 없었고, 따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덕무는 서재에서 책 읽기를 놓지 않았다. 그런 그가 책을 사랑하는 방법은 읽고 보고 쓰는 것만이 아니었다. 책을 읽다 잠들었는데 너무 추워 채 잠을 이루지 못하자 평소 읽던 한서(漢書)를 이불 위에 둘러 체온을 유지하고, 논어(論語)를 벽처럼 쌓아 바람을 막았다고 하니 말이다. 자기 집 서재에서 공부를 하다 잠이 들었는데 하는 행동은 가히 지하철 역 근처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을 자는 노숙인과 비슷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서재에 가득한 종이는 당신의 훌륭한 노숙 동무가 될 수 있다. 서재는 책을 읽을 뿐 아니라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란 사실을 우리의 지혜로운 조상님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2. 셀프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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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들어서도 예언 놀이가 성행하여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이 파뉘르주에게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충고하는 대목에서 이 관습을 차용한다. 팡타그뤼엘은 파뉘르주에게 베르길리우스 예언점에 의존해야 한다고 추천한다. 그에 따르면 올바른 방법은 이렇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치면 페이지가 나온다. 이어서 주사위 3개를 던지는데 3개를 합한 숫자는 그 페이지의 행을 가리킨다. 그런 방식으로 예언을 할 때도 팡타그뤼엘과 파뉘르주는 같은 구절을 놓고 서로 상반되는 해석을 내리게 된다."(책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저)

서양에서 책을 통한 점의 기원은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제로서의 권위를 세울 필요성과 수많은 이민족들을 통합해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아닌 종교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분을 덜 상하게 하면서도 기독교의 권위를 믿게 하려면 사실 그들이 믿는 종교의 성인들은 예수 도래를 '예언'한 사람들이라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의 시들은 예수의 도래를 예언한 예언서로 둔갑했고, 사람들은 점점 베르길리우스의 책들을 시집이 아닌 영험한 기운이 깃든 '점 치는 책' 정도로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서재에서 (하라는 독서는 안 하고)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나온 문구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암시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서양식 셀프 점의 전통이 탄생한 것이다. 서재에서 독서 말고 다른 걸 하고 싶다면, 돗자리를 깔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3.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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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남편과 나는 드디어 책을 한데 섞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안 지 10년, 함께 산 지 6년, 결혼한 지 5년 된 사이였다...그러나 우리의 책들은 계속 별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내 책은 주로 우리 아파트 북쪽 끝에, 그의 책은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었다...이렇게 나의 책과 그의 책은 우리 책이 되었다. 우리는 진정으로 결혼을 한 것이다."(책 '서재 결혼시키기', 앤 패디먼 저)

드레스와 양복을 차려 입고 주례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결혼행진곡을 들으면서 퇴장하는 것만이 결혼식의 완성이 아니다.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가 둘 다 자기만의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면, 진정한 결혼은 서재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권의 책을 시대별로 꽂을 것인가? 주제별로 꽂을 것인가? 키워드별로 꽂을 것인가?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마구 섞을 것인가? 이 모든 걸 합의하는 과정과 서로의 책에 얽힌 사정과 맥락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재가 독서만을 위한 장소가 아닌 진정한 결혼식의 장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4.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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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학문을 좋아했던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한 열네 살 이후 황제가 독서하는 곳인 남서방(南書房)을 만들어 독서를 하고 학자들을 불러 학문을 논하였다...이곳에 근무하는 관리들은 '남서방 한림' 혹은 '남서방행주'로 칭해졌고, 제왕의 스승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이들은 사실상 황제의 특급 비밀비서로서 지방 순시를 할 때도 항상 수행하였다. 황제의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항상 정책 자문을 수행한 이들의 권력 역시 필연적으로 막강해졌다."(책 '왕의 서재', 소준섭 저)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학문에 힘쓰며 정사 또한 사소한 것까지 직접 다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서재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공부하기 좋아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두며 이들을 통해 나라를 다스렸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스터디'를 같이 하는 '참모진'들이 있었던 셈이니까. 그런데 강희제의 서재 정치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만주족 왕족으로 구성된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를 무력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같은 왕족이라 견제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일일이 의결에 부쳐야 해 황제의 뜻조차 관철되기 어려웠던 이 까다로운 기구 대신에 강희제는 자신의 뜻이라면 충성을 바쳐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최측근들을 만들기 원했고, 그 매개체가 바로 서재였다. 한 공간에서 책을 같이 읽는다는 건 이처럼 인맥의 시작일 수 있다. 우리도 인맥 만든다고 주구장창 폭탄주만 마실 게 아니라, 서재에 초대해 책맥이라도 같이 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