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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은 약 300년 전, 이미 '부자증세'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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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왕 중 하나다. 작년에는 영화 ‘사도’에서 배우 송강호가 영조역을 맡아 열연을 하였고 624만 명의 관객이 관람을 하였다. 우리에게는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 노론에게 휘둘린 왕, 탕평책을 통해 당파를 없애려고 노력한 정치인 등으로 소비된다. 그런데 거의 망해가던 조선의 ‘반짝’ 중흥기가 영, 정조대라면 영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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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개혁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노력을 쉴 새 없이 했다. 당시 백성들이 가장 고통 받던 것은 ‘양역’이었다. 군역을 담당하는 양인들이 임진왜란 이후 모병제가 실시되면서 그 대신 군포 2필을 바치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힘 있고 ‘빽’ 있는 양인들은 모두 군역을 면제 받는다. 오히려 가난하고 ‘빽’ 없는 양인들이 꼬박꼬박 군역을 바치는 신세가 된다. 이들의 괴로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조는 이 참에 양역을 통째로 뜯어고치려고 한다. 신분에 관계 없이 집집마다 세금을 걷으려는 시도도 한다. 이전에는 양역이 양인들의 몫이었다면, 이제는 양반에게도 그 부담을 지우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의 저항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친 영조는 ‘순문’을 실시한다. 순문은 직접 왕이 백성(신하)에게 의견을 구하는 제도였다. 소통을 하는 왕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영조의 애민 정신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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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문은 본래 국왕이 대신에게 구하는 자문 행위를 의미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하급 관료는 물론이거니와 농민들을 대상으로도 순문을 시행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200번이 넘는 순문이 열렸다. 영조 전반기에는 대부분의 주제가 농정과 각종 폐단에 대한 것이었다. 초기 순문은 대체로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는 시혜적 조치에 그쳤다. 그런데 영조는 재위 중반 세 차례나 ‘균역 순문’을 열어 국가의 개혁 방안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여기에는 양인과 양반이 각기 절반씩 포함되었다.” (책 ‘18세기 왕의 귀환’, 김백철, 노대환, 염정섭, 오상학, 이욱, 정재훈, 최성환, 허용호 저, 강응천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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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반에게까지 양역의 부담을 지우려는 시도는 실패에 그친다. 이때 영조는 양역의 대가로 내던 면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정책을 발표한다. 어떻게 해서든 백성 삶을 부담을 덜어주려고 끝까지 노력을 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간단히 1줄로 배우는 ‘영조: 균역법 실시’는 이렇게 나온 것이다. 비록 훗날 균역법 역시 폐단은 여전했고 백성의 삶을 어려웠으나, 백성 이야기를 하나씩 들었던 소통의 왕 영조의 애민정신은 제대로 평가 받을 필요가 있다. 정치 지도자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중요하다. 그것 자체로도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