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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소설들이 그린 과거의 서울은 이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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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공간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보다 많은 풍경을 가진다. 그리고 그 풍경은 다양한 삶의 배경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우리는 이런 공간을 유독 많이 바꾸고, 변형시키면서 발전해왔다. 그렇다면, 지난 시절의 공간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단절되어 버리고 만 것일까? 아니다. 어떤 공간은 기록으로 남아 기억 속에 각인되며, 또 어떤 공간은 기억 속에 남아 기록으로 전승되기도 한다. 여기 문학 속에 그려진 재개발로 변하기 전의 서울과 서울 근교 공간들에 대한 묘사들이 있다. 지금의 모습으론 상상하기 힘든 서울과 그 근교의 과거 모습들을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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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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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이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요란스러이 종을 울리며 자전거가 지나간다...그러나, 이곳, 천변 길에 노는 아이들은 그러한 것에 결코 놀라지 않는다...샘터를 둘러쌓은 거적 담 하나 격한, 이웃 모래판...그곳에는 스물 안팎으로 대여섯까지의 젊은이들이 칠팔 명이나 동저고리 바람으로 모여들 앉아, 모래판에 깔아놓은 한 장 거적 위에서 윷들을 놀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책 ‘천변풍경’, 박태원 저)

먼저 둘러볼 곳은 청계천이다. 집이 청계천변에 있었던 소설가 박태원은 자기 이웃들의 생활상을 면밀히 관찰해 '천변풍경'이란 세태소설을 썼다. 즉, 이 소설에는 발표 당시 1930년대 청계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여기 나오는 청계천은 빨래터에 모인 여인들이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고, 아이들이 뛰어 놀며, 모래밭에서 내기 윷놀이와 권투 등이 벌어지는 '일, 생활, 놀이'가 함께 뒤섞인 공간이다. 이처럼 소설은 다양한 단서들을 통해 당시와 지금 청계천의 차이를 알려준다. 청계천에 모래밭이 있었다는 대목으로 당시만 해도 바로 옆에 보도가 깔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빨래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을축년 대홍수(1925년)로 인해 물이 범람한 피해를 톡톡히 본 일제가 청계천 준설 작업을 열심히 해 물이 매우 깨끗했음을 알 수 있다. (책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5’, 손정목 저). 또 여기엔 언급되지 않았지만, 청계천변 광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이발소, 약국, 한약방 등의 가게들은 청계천이 당시 중요 상권이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비록 돌로 깔려 옛 정취는 느낄 수 없어도 청계천변을 걸으면서 예전 활력 넘치던 '일, 생활, 놀이 공간'으로서의 청계천을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2. 강남 압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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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학생 주임과의 충돌을 피하며 펜트하우스를 팔고 다니던,/양아치란 별명을 가진 놈이 있었다 빨간 책과 등록금 영수증을/교환하던 녀석, 배나무 숲 너머 산등성이 그 애의 집을 바라볼 때마다/.../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가/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담았다/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새벽, 녀석과 난 텅 빈 신사동 사거리에서/유령처럼 축구를……해골바가지……난 자식아, 여기 최후의 원주민이야/.../펜트하우스, 바람부는 날이면 녀석 생각이 배 맛처럼 떠올라 압구정동/그 넓은 배나무 숲에 가야 했다.../" (책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 유하)

유하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 ‘강남 1970’ 등을 감독한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상당한 양의 시집을 발표한 시인이었다. 시를 통해서도 1974년에 이사를 와 큰 충격을 받았던 개발 시대의 강남 모습을 그리는데, 무척이나 신기하다. 압구정동은 원래 배나무 밭이 있던 곳이었다. 유하 감독의 시에는 압구정 배나무 밭(농촌) 주민과 아파트 주민들이 같은 학교에 다녔음을 추억하기도 한다. 원래 강남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없는 말이었다. 예전에는 ‘영동’이라고 불렸는데, 한강 남쪽에 위치한 영등포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였으니 당시 강남의 위상을 알 만하다. 영동은 사실 강북에 채소와 과일을 공급해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던 땅이었다. 잠원동은 뽕나무와 무, 서초동은 꽃, 압구정은 배나무, 도곡동은 도라지를 키웠다고 한다. 그랬던 강남은 1967년 경부고속도로 시공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영등포역, 노량진역 철도만이 유일하게 깔린 전국 교통망이었던 서울에 자동차로 이동 가능한 새로운 교통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국가적 단위의 개발이 벌어진 것이다. 그 개발바람에 뛰어든 현대건설은 한강을 매립해 저자도란 섬을 압구정동에 편입시키고, 그 유명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만든다. 유하 감독이 전학 왔을 1974년, 압구정동은 막 매립공사를 마치고(72년 완공) 현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일 때였다. (책 ‘강남의 탄생’, 한종수·강희용 저). 아파트와 밭이 어우러진 풍경, 이제는 강남에서 다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유하 감독은 그래서 지금도 바람 부는 날이면 시의 마지막처럼 '싸늘한 배앓이'를 하게 되어버린 걸까?

3. 성남시-광주 대단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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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대지는 마련되었으나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비바람을 가릴 여유는 아직 없어 땅을 묵히다가 또 간신히 낡은 텐트 하나를 구해서 버티기를 몇 달이나 했다. 선거철이었다. 지상낙원 건설의 청사진에 갖가지 공익들이 한 획 한 획 첨가되었다. 곳곳에서 기공식들이 화려하게 벌어지고 건설 붐이 일었다. 당장 막벌이 날품팔이들의 천국이 눈앞의 현실로 바싹 당겨졌다. 갈수록 선거 열풍이 거세짐과 더불어 지가가 열나게 뛰고 사람값이 종종걸음을 치고 하는 그 사이를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훨훨 날아다녔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움직임 모두가 자기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되었나를 그는 선거가 끝났을 때 이십 촉짜리 전등 밑에서 벼락이 머리에 닿듯이 아찔하게 확인했다." (책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윤흥길 저)

강남의 개발 과정은 정신 없이 빠르고 전격적이었다. 지금은 성남시로 바뀐 옛 경기도 광주의 개발은 그와는 달랐다. 서울 철거민들의 이주 정착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늘어나는 무허가 판자집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서울시는 1968년 판자집 거주민들에게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300만평의 땅으로 옮겨 가 살라는 '광주대단지 사업' 고시문을 발표한다. 이 당시 늘어나던 외국인 관광객으로 인해 관광객들의 시선이 닿는 철도 근처 판자촌을 정리하려는 정부의 의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애매한 정착지 정책은 결국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이 벌어지는 불씨가 된다.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에 불만과 좌절감을 품고 있던 대단지 주민들이 분양 계약을 체결해 돈을 내라는 정부의 발표에 폭발한 것이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바로 이 사건의 전말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보기 싫은 ‘것’들을 치워버리는 과정에서 벌어진 서울 근교 개발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4. 부천

"...저기 해태가 있어요. 이제 여기서부턴 서울이 아니래요...마치내 도계를 지나 트럭은 경기도 땅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서울은 끝이 났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의미 없는 인사를 던져주고 서울은 저 혼자 뚝 떨어져나간 것이다..."소사라면 소사 복숭아가 나는 곳 아녜요?"...복숭아란 말만 들어도 은혜 가졌을 때 생각이 나요. 얼마나 복숭아를 먹어댔는지. 다른 것은 다 싫고 복숭아만 먹히더라구요...그때 당신이 그랬죠. 뱃속에 든 이놈은 무릉도원에서 노닐 팔자인 모양이라고..." (책 ‘원미동 사람들’ : 멀고 아름다운 동네, 양귀자 저)

"아들 농사라고는 원. 강노인은 잘 자란 푸성귀들을 어루만지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땅 농사에 비하면 자식 농사는 너무나 허망했다...강노인은 이제 혀까지 끌끌 차고는 동네 안팎을 두루 둘러본다.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세워진 연립주책과 시세 없는 상가주택들이 옛날의 논밭 자리 위에 흩어져 있고 멀리 공단 쪽의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과 십 년 안팎의 변화였다. 시청이 옆으로 옮겨오면서부터 논밭들은 급격히 택지로 용도 변경되고 서울에서 몰려온 집장수들이 벌떼처럼 왕왕거리며 몇 달 만에 집 한 채씩을 뚝딱 지어내고 또 뚝딱 지어내더니 삽시간에 동네가 꽉차버린 것이다." (책 ‘원미동 사람들’ : 마지막 땅, 양귀자 저)

1980년대가 되면서 서울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에서 개발이 진행된다. 부천도 그런 지역 중 하나다.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딱 그 무렵 1986,7년의 부천을 그리고 있다. '불과 십 년 안팎'으로 논밭에 '연립주택이 난립하고 상가주택들이 흩어져 있는' 제법 도시 티를 내는 곳이다. 아직 이맘때의 부천은 이사하는 자가 서울을 떠나며 경계 표지판의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문구에 급작스런 추위를 느껴야만 하는 곳(책 ‘원미동 사람들’ : 멀고 아름다운 동네, 양귀자 저)이면서, 그럼에도 소사라는 말에서 무릉도원을 떠올리게 하는 희망이 함께 있는 곳이다.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고, 설익어서 고단하지만 더욱 설레는 곳이었다. 그 당시 부천과 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