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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4개의 올림픽은 열리지 못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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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개막한 리우 올림픽이 22일 폐막을 향해 가고 있다. 2009년 10월 올림픽 개최국 선정 당시만 해도 브라질의 국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올림픽 개최 전 성화 봉송 때 반정부 시위대가 방해를 하였고, 개막 당일에는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급기야 브라질 법원은 경기장 내 평화시위는 허용한다는 판결을 내렸다는 뉴시스 보도도 있었다. 브라질 국민들은 쓸데 없이 올림픽을 열지 말고 그 돈으로 학교나 병원 건설에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빈민촌인 파벨라의 열악한 실상은 계속되고 있다는 한겨레 신문의 보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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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문제는 딱히 리우 올림픽만의 것은 아니다.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이지만, 전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 경제적 논란의 중심에 서 왔다. 그로 인해 때로는 진행이 어려웠고, 위기도 맞이했다. 정치적 논란으로 폐지 문제까지 거론되었던 역대 올림픽들을 살펴보았다.

1. 1936년 베를린 올림픽

adolf hitler

“...유대인의 차별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곳은 미국이었다. 특히 200만 이상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뉴욕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나치스의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대회 참가 반대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고, 체육, 교육, 노동계 등 특히 종교계의 반대가 심해지면서 끝내는 미국 국회 하원에서 대회 보이콧 결의안이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미국의 베를린 올림픽 대회 참가 저지를 위해 1935년 7월에 구성된 스포츠 페어플레이 위원회 위원장이며 미국체육협회 회장인 마호니는 참가 반대의 선봉에 섰다.” (책 ‘아테네에서 아테네까지’, 방광일 저)

베를린이 1936년 제11회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던 건 1931년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었다. 아마 그 누구도 불과 2년 만에 비정상적인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준비 과정의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선전장처럼 변질되어갔다. 이 때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히틀러의 유대인 차별 정책이었다. 1935년에 공포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민족의 순혈성’을 지키기 위해 독일인과 유대인의 성관계를 금지하며, 유대인의 참정권과 시민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을 중심으로 올림픽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고, 실제 미국 하원에서 대회 보이콧 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지만, “유대인의 출전을 배척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히틀러의 여론전에 밀려 결국 베를린 올림픽은 예정대로 개최된다. 물론 이 약속은 거짓이었다. 독일 내 유대인들은 훈련장도 쓰지 못하는 조직적 방해 때문에 출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베를린 올림픽이 히틀러의 호전성과 차별주의를 가려주는 불명예스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스포츠 행사가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도 올림픽이 말이다.

2.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mexico city olympic tlatelolco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올림픽 대회 현장에서의 정치적 항의를 제한하는 당국의 조치에 따른 물리적 공권력 집행이 비극적 유혈사태로 귀결된 대표적인 사례이다...올림픽 개막이 임박한 10월 초 트라텔롤코 광장에서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멕시코 정부는 이러한 시위사태가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는 것을 우려하여 강제 해산조치를 단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공권력의 발포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사건 후에도 정부는 언론 통제를 통해 사건의 심각성을 덮으려 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 속의 멕시코의 정치 현실에도 불구하고 IOC는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결정하였다.” (책 ‘현대스포츠 외교사’, 유호근 저)

1969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리우 올림픽에서 불거진 갈등이 올림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고질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당시 집권당이던 제도혁명당은 “개도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최하는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고속 성장을 통한 ‘멕시코 경제의 기적’을 대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내부 통합을 통한 국면 전환을 꾀하고 자국의 위상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여 대회 준비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하는 등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책 ‘현대스포츠 외교사’, 유호근 저)

그러나 집권당의 이런 의도는 국민들의 바람과 엇나갔다. 멕시코 국민들은 빈민을 위한 사회, 경제적 개혁과 노조, 언론 등을 탄압하던 권위주의 정치의 종식을 원했다. 이 때문에 학생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올림픽 개최 반대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사태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1만여 명이 운집한 대규모 시위에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해 실탄을 발사하여 수십 명이 사망한다.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언론 통제로 인해 실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IOC의 묵인 아래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결국 개최되게 된다. 다만 그 후유증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당시 대한민국이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1980년대 초반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우려했던 IOC에선 한국에서 멕시코시티 올림픽의 악몽이 재현될까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

3. 1972년 뮌헨 올림픽

munich olympic terror

9월 5일 새벽 4시, 운동복을 입은 8명의 사나이가 올림픽선수촌의 남자 숙소에 침입했다. 그들은 코놀리가로 향했는데, 그 곳엔 이스라엘 선수 28명이 머물고 있었다. 4시 25분경 7명의 선수가 잠들고 있는 아파트의 문이 열렸고, 이어 레슬링 심판 고트프로인트(Yosef Gottfreund)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위험해! 테러다!” 총소리와 둔탁한 절규가 아침의 정적을 깨트렸다. 몇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창문으로 도망쳤다. 2명은 이미 사망했고, 9명이 스스로 검은 9월단이라고 자칭한 무장 아랍인들의 인질로 잡혔다. 이들은 이스라엘 형무소에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 256명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대회는 이 날까지 6일을 남겨놓고 있었지만, 경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졌고, 충격적인 뉴스는 곧바로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책 ‘아테네에서 아테네까지’, 방광일 저)

뮌헨 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사상 최악의 테러를 겪은 대회로 기록된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한 분파였던 ‘검은 9월단’ 단원 9명은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 잠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들 중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들의 요구 조건은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있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256명을 즉각 석방하라는 것이다. 올림픽 전체 일정이 약 6일 정도 남아있던 중에 일어난 이 사건 때문에 올림픽 일정을 끝까지 소화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당시 서독 정부의 ‘인질 전원 구출’ TV 발표를 듣고 IOC 위원들은 올림픽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해 나머지 일정을 마저 소화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서독 정부의 발표는 성급했고, 결국 인질 협상이 실패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져 인질 전부가 사살 당하게 된다. “올림픽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중지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당시 IOC 위원장 브런디지의 의지에 의해 올림픽은 추도식 후 34시간 만에 속행되었다. 뮌헨 올림픽은 지금까지도 전세계인들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4.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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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으며, 당초의 예상했던 예산으론 대회 개최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면서 경비는 15억 달러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몬트리올 시민은 물론 캐나다 국민 사이에 “무리를 하면서까지 올림픽을 개최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소리가 높아져 갔고, 설상가상으로 노동자의 파업까지 빈발, 경기장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책 ‘아테네에서 아테네까지’, 방광일 저)

뮌헨 올림픽 다음 대회였던 몬트리올 올림픽은 경제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970년 IOC 총회 당시 개최지로 선정된 몬트리올 시는 당초 3억 2000만 달러만으로 올림픽을 치를 수 있다고 계산했으나, 계획이 완전히 뒤틀어지게 된다. OPEC의 석유 감산 조치로 인한 1차 오일쇼크가 1973년 일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예산은 계획에 비해 5배나 상승한 약 15억 달러가 되었다. 예산을 줄이기도 어려웠다. 뮌헨 올림픽 참사 후에 치러지는 대회란 부담 때문에 안전 경비의 비중이 1/3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리우처럼 개막 직전까지 몬트리올에는 시위와 파업이 이어진다. 이 외에도 국제 정치적 이슈도 크게 부각되었다. 인종차별정책을 취하고 있는 뉴질랜드를 참가시켰단 이유로 아프리카 32개국이 보이콧을 하고, 중국의 압력에 의해 IOC가 대만에 ‘중화민국’이란 정식 국가 명칭을 쓰지 못하게 했단 이유로 대만이 보이콧을 하였다. 결국 92개국만이 참가하는 작은 규모의 올림픽이 되고 말았다. 경제와 정치 이슈가 한꺼번에 불거진 대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