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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에는 나오지 않은 맥아더 장군에 대한 4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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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천상륙작전’이 8월 5일 전국 관객 400만 명을 넘겼다. 다만 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네이버 영화 평점을 보면, 관람객은 8.57점을 주었고 영화평론가는 3.41점을 주었다. 이례적으로 5점 이상 벌어졌다. MBN은, ‘애국심과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수작’이라는 호평가와 ‘시대착오적인 반공영화’라는 악평이 맞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화만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아니다. ‘인천상륙작전’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또한 사실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오죽하면 호주 토머스 블레이미 장군은 '그에 대해 당신이 들은 최악의 말과 최고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라고 말했을까? (책 ‘맥아더’, 리처드 B.프랭크 저) 맥아더에 대한 극과 극의 평가, 시선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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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맥아더에게 가져온 판단착오

"...제프리 페렛은 이렇게 썼다. "맥아더의 인생에서 군인으로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날은 1950년 9월 15일 하루였다. 위대한 사령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큰 업적을 이루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그 때 총지휘관으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당대 다른 지휘관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오른다. 맥아더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이 바로 그런 기회였다." (책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저)

"인천 상륙작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손쉬운 승리였다. 인천항을 지키는 수비병력은 많지 않았고 상륙과정에서 큰 저항도 거의 없었다. 조선인민군의 외견상의 붕괴(실제로는 고위장교는 전혀 잡히지 않았고, 많은 병력이 탈출했으며, 많은 예비병력이 북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맥아더의 의지만으로도 적의 군대와 관료사회의 비판자들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듯 보였다...인천에서 거둔 성공이 너무나도 크고...그로 인한 맥아더 장군의 명성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합동참모본부는 그 뒤부터는 마땅히 문제를 제기했어야 하는데도 장군이 세운 계획과 결정에 의문을 표하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책 ‘더글러스 맥아더’, 마이클 샬러 저)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가 한국전쟁에서 이룬 최고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작전의 성공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 작전을 통해 비로소 유엔군이 낙동강의 북한군 전선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병참시설을 확보해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이상호 저)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의 눈부신 승리가 맥아더에게 결과적으로 판단착오를 불러왔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 대다수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했고 북한군 완전 격파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맥아더와 한국전쟁’, 이상호 저) 이 과정에서 “중국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는 공군 장교 제임스 M. 개빈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맥아더와 그 참모들은 "중국이 개입할 것이었다면, 우리가 인천에 상륙할 때 했을 것"이라고 자신했고(책 ‘아메리칸 시저 : 맥아더 평전2’, 윌리엄 맨체스터 저), 인천에서의 성과가 너무 컸기에 그 누구도 그들의 자신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맥아더는 중국군의 대거 잠입을 알아채지 못한 채 1950년 11월 24일 전면적인 북진 공세인 '크리스마스 총공세'를 단행했다. 그리고 중국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는 말과 함께 본인의 실패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책 ‘6.25 전쟁과 미국’, 남시욱 저).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뼈아픈 실패를 불러온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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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맥아더는 확전론자였다?

"...미군과 한국군이 38선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자...맥아더는...'원대한 석권'을 향한 꿈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맥아더는 중국 본토의 봉쇄와 폭격을 포함한 급격한 전쟁 확대를 허락해 주도록 합동참모본부에 요청했다. 그는 북한과 만주 사이의 구경 지대인 압록강 기슭을 따라 '일련의 방사능 찌꺼기'를 퍼붓고 싶어했다. 사적인 자리에서이기는 하지만 맥아더는 한층 더 저돌적인 견해, 즉 중국에 대한 핵공격까지 고려했다. 설혹 이러한 공격이 소련과의 전쟁을 촉발시킨다 해도 불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책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 박세길 저)

"...맥아더의 확전론은 중국 본토를 봉쇄하고 만주의 중요 시설을 공군기로 폭격하자는 것이지 만주를 비롯한 중국 대륙에 미 지상군 병력을 투입해 지상전을 벌이자는 것은 아니었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에서 "중국 본토에서 미군이 전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머리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따라서 맥아더의 주장대로 미군 병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고 만주 폭격과 중국 본토 해안 봉쇄를 단행했더라면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고 한국이 통일되었을지 아니면 트루먼과 애치슨의 주장대로 6.25전쟁이 중국과의 전면전으로 확전되고 결국 소련도 참전해 3차 대전으로 발전했을지 여부는 오로지 역사의 가정에 속할 뿐이다." (책 ‘6.25 전쟁과 미국’, 남시욱 저)

“트루먼과 애치슨은 기본적인 세계전략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처하는 방법에서도 맥아더와 큰 차이를 보였다. 양측은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지만 냉전에서 승리하는 방법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맥아더는 전쟁에는 승리 외에는 대안이 없다라고 믿고 최후의 승전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대해 트루먼과 애치슨은 이를 맥아더의 호전성이라고 비난하면서 외교적 해결방식을 추구했다. … 트루먼 행정부의 수뇌들은 맥아더의 공격적인 성격이 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책 ‘6.25전쟁과 미국’, 남시욱 저)

확전론자로서 맥아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다. 실제 중국군의 개입 이후 맥아더는 병력을 증원하고 만주를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트루먼과 끊임없이 갈등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가급적 외교적 해결 방식을 사용하려고 했다. 결국 둘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서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하기에 이른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박세길 저)에 의하면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는 인물이다. 소련의 개입도 개의치 않고 본인의 정복욕을 채우려는 전쟁광인 셈이다. '대한민국史:1'(한홍구 저)에는 "맥아더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한 것은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자신의 판단 착오를 감추기 위해서다."라고 평가한다. 반면 '6.25 전쟁과 미국'(남시욱 저)에는 “맥아더의 폭격 요구는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을 위한 것이었지, 중국 본토에 지상군을 파견하는 본격적인 의미의 확전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맥아더 회고록에는 "중국 본토에서 미군이 전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머리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쓰여있다는 것도 그 증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맥아더의 확전에 대한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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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맥아더는 원자폭탄 투하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폭격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원자폭탄의 사용을 전제로 한 맥아더의 만주폭격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라 즉각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두 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여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도 1차로! 이런 위험한 발상을 한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한반도를 위해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나 천만다행인 조치였다." (책 ‘대한민국史:1’, 한홍구 저)

"...한국 전쟁기 맥아더사령부에서의 핵무기 투하 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맥아더...는 핵무기를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사용을 거부했다. 즉 미국정부와의 관계에서 맥아더는 원폭 투하의 주창자였지만, 그것은 현지부대의 강한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중국과의 전면전 내지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의 선회를 요구한 것이지 핵무기 사용 그 자체를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결국 한국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은 최악의 경우 군부와 맥아더사령부 내 강경파의 최후 수단이었던 것이다." (책 ‘맥아더와 한국전쟁’, 이상호 저)

맥아더의 확전론과 함께 거론되는 쟁점은 바로 원자탄 투하 논의이다. 맥아더는 실제 수 차례에 걸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건에 대해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얻고자 했다. 마이클 샬러가 쓴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하면, “맥아더는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0년 7월부터 중국을 대상으로 원자폭탄을 활용하는 방법을 이미 언급했고, 1951년 3월 초를 기점으로 합동참모본부에 본격적인 건의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맥아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맥아더가 한반도에 세계대전을 불러올 뻔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맥아더와 한국전쟁'(이상호 저)에는 “맥아더의 원자폭탄 사용 건의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따내기 위한 정치적 수사였을 뿐, 시급하고 진지하게 논의되던 수단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원자폭탄 사용은 맥아더만이 아닌 트루먼, 아이젠하워, 리지웨이 등이 모두 한 번씩 고려해본 사안이라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책 ‘6.25 전쟁과 미국’, 남시욱 저). 진실이 어느 쪽이든 간에, 원자탄 투하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옵션 중 하나로 꾸준히 논의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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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만함으로 볼 것인가, 자신감으로 볼 것인가

“웨스트포인트 최우수 졸업생이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이미 전쟁 영웅이 된 맥아더는 변변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트루먼이 군사 문제 특히 극동의 군사 정세에 어둡다고 판단했다. 그는 트루먼이 한 번도 아시아를 방문한 적이 없는 점을 들면서 그의 아시아 정책을 마음속으로 결명했다.” (책 ‘6.25전쟁과 미국’, 남시욱 저)

"...그처럼 자기 중심적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을 못 보았다"...맥아더는 그의 자기중심벽과 이상할 정도의 고립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아첨꾼 부하들에 둘러싸여 정보판단에 어두웠다는 것이 제임스의 분석이다." (책 ‘6.25 전쟁과 미국’, 남시욱 저)

"인천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마지막 성공작이었다...기지가 돋보이는 전략인 동시에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다행히 성공을 거둬 수천 명이 넘는 미군의 목숨을 구했다. 해군 작전참모들과 합동참모들의 반대가 심했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대범하고 독창적인 데다 예상 밖의 행동을 서슴지 않고 일반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거부하는 맥아더의 장점에 행운이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사실 맥아더의 이런 장점 때문에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루스벨트와 트루먼마저 그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책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저)

맥아더의 인간 됨됨이에 대한 평가 중 공통적인 것이 ‘오만함’이다. 맥아더는 명문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역사상 세 번째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친구가 거의 없었다. 첫 번째 결혼식에 온 맥아더의 하객은 단 한 명이었고, 군 생활 중에도 같은 장교 동료는 거의 없이 자신을 떠받드는 부관들하고만 어울렸다. (책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저) 이 같은 그의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은 전쟁에 있어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는데, '허를 찌르는 대범한 작전' 아니면 '게으른 정보수집과 안이한 상황인식'이었다. 한국전쟁 중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인천상륙작전'이며,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크리스마스 총공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초반 북한군을 과소평가했고, 중국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 보았던 것도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리고 성공확률 5천분의 1이라는 주위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단행하여 대성공을 거둔 인천상륙작전도 그의 성격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