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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에 버금가는 역사 속 기차의 비극 4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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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0일에 개봉한 영화 ‘부산행’이 전국 관객 870만명을 돌파했다. 영화의 내용은 좀비들에 의해 점령된 지역을 지나쳐 안전한 부산으로 가는 것이다. 연상호 감독의 중앙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좀비보다는 KTX 같은 폐쇄된 공간에 더 주목했다고 한다. “각각 비행기와 화물선을 배경으로 한 ‘플라이트 93’이나 ‘캡틴 필립스’처럼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참고했다." 영화 속에 KTX는 양면적인 공간이다. 좀비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대피 공간이면서, 한번 좀비들이 들어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밀폐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철도는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적도 있었고, 큰 재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철도 자체의 양면성은 영화 ‘부산행’에서 창작된 것이 아닌 과거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기차'의 비극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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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철도와 '어린이 운송'

"1939년...9월 3일, 250명의 아이들이 프라하 역에서 영국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이 아이들은 런던의 증권 중개인 니콜라스 윈턴의 주관으로 영국으로 보내졌는데, 그는 전쟁이 발발하기 하루 전, 프라하에 갔다가 이 아이들을 돕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 호텔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가 6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피난시킨 후, 그들의 유대인 부모들은 전부 살해당했다."(책 ‘철도, 역사를 바꾸다’, 빌 로스 저)

철도는 재난을 겪은 아이들을 탈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1939년, 런던 증권 중개인 니콜라스 윈턴은 잠시 체코에 머무는 사이 나치의 유태인 탄압 정책에 의해 부모와 떨어져 난민 생활을 하던 유태인 아이들을 목격한다. 충격을 받은 그는 그 아이들을 영국으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다. 체코 프라하 역에서 출발해 네덜란드 후크반홀란드에서 내려 배를 타고 영국 하리치 항구에서 내린 후, 다시 기차를 타고 리버풀 스트리트 역까지 가는 코스다. 무려 1296km에 이르는 대여정에 승객은 모두 아이들이다. 다행히 윈턴은 3월부터 8월까지 669명의 유태인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9월 3일 출발한 마지막 250명의 아이들은 이틀 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배를 타지 못하고 모두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나치 치하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는 살았고, 누구는 죽었다.

"살아남은 우리는 유럽 대륙에 살던 10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그곳을 빠져 나오지 못해 살해당한 사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이 분명 유명한 음악가가 되거나 치명적인 병의 치료제를 개발했을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책 ‘국적 없는 사람’, 루스첸 미카엘리스 저, 책 ‘철도, 역사를 바꾸다’에서 재인용)

2. 만주 철도와 조선 이민자

"1930년대 중일전쟁 이후 대륙침략을 본격화해가면서 일제는 지원병, 징용, 근로동원, 정신대 등을 명분으로 조선 인력의 강제수탈에 나섰다. 암울한 조국의 상황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농어민들은 궁핍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꾼'의 신세로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비극을 실어 나른 것이 기차였다. 김기림의 시 <심장 없는 기차>(1933)는 국경을 넘어가는 간도 이민들의 처참한 상황을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책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저)
 

책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박흥수 저)에 의하면, 일본은 1901년 경부선을 만들 때부터 대륙 진출을 염두에 두었다. 따라서 일본은 선로의 간격인 궤간을 일본 표준인 1,067밀리미터가 아닌 중국, 유럽의 선로와 바로 호환 가능한 1,435밀리미터로 맞추었다. 그리고 1906년부터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만주에 철도를 깔기 시작한다. 조선은 일본에 의해 처음으로 세계와 한 번에 이어지는 교통망을 갖추게 된다. 이를 통해 강제적 혹은 자발적으로 만주지역으로의 조선인 대 이주가 일어나게 된다. 독립운동을 꿈꾸며 떠난 이도 있었고, 가난과 착취를 피해 도망간 이도 있었다. 어떤 뜻을 품었든 일제라는 ‘재난’을 피하기 위한 탈출에 일제가 만든 철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고단함은 똑같았을 것이다. '부산행'만큼 긴박하진 않지만, 어찌 보면 '부산행'보다 처절했을 그들의 모습을 이태준의 단편소설 ‘농군’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봉천행 보통특급 3등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다. 세면소에는 물도 떨어졌거니와 거기도 기대고, 쭈그리고, 모두 자기 체중에 피로한 사람들로 빼곡하다. 쳐다보면 시렁도 그뜩, 가죽 가방, 헝겊 보따리, 신문지에 꾸린 것, 새끼에 얽힌 소반, 바가지쪽, 어떤 것은 중심이 시렁 끝에 겨우 걸치어 급한 커브나 돌아간다면 밑엣 사람 정수리를 내려치기 알맞다."
 
3.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러시아 병사

"...러일전쟁으로 철도의 역할이 절박해지자 바이칼 호의 얼음 위에 직접 선로를 깔았다. 얼음이 녹기 전까지 임시로 운용된 바이칼 호수 횡단 철도는 썰매보다는 효율적이었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얼음이 깨질까 봐 속도를 내기도 힘들었고 짐을 많이 실을 수도 없었다. 아예 동력을 제거한 채 말로 견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두꺼운 얼음일지라도 자연의 섭리에 의해 해동의 기운이 전달되면 가차 없이 열차를 삼킬 수 있었다. 봄이 시작되자 호수를 건너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책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박흥수 저

러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긴(7,446km)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만들겠다고 결정한 것은 1891년이다. 애초 1년 6개월만에 완공한다는 계획이었지만, 26년 걸려 1916년에 완공되었다.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이칼 호수였다. 둘레만 2100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호수다. 이 호수를 둘러싼 절벽에 우회 선로를 만드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바이칼호 우회선 철도' 마무리 공사가 이루어지기까지 기차를 배로 실어 나르거나 썰매를 이용해야 했다. 철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책 ‘동아시아 철도네트워크의 역사와 정치경제학I’, 조진구 저). 문제는 바로 이 시기에 러일전쟁이 터졌다는 데 있다. 군수물자와 병력을 한시바삐 동쪽 끝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배에 기차를 실어 나르거나 짐을 썰매에 옮겨 담는 방식으로는 결코 신속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러시아군이 생각해낸 방법은 바이칼 호 수면이 얼었을 때 그 위에 임시 선로를 깔고 기차를 운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상당한 공포에 떨었다. 바이칼 호 수심은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깊다. 기차가 얼음이 깨지면서 바이칼 호로 곤두박질 치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에 탄 채 얼음 위를 가로질러가야 했던 러시아 병사들의 공포는 좀비에게 언제 물릴지 모른 채 달려야 했던 부산행 승객들의 공포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4. 파리행 군용 열차와 크리스마스 휴가의 비극
 
"1917년 12월 12일 밤 11시 15분, 1천 명이 넘는 병사들을 태우고 파리 행 크리스마스 휴가 열차가 모단 역을 출발해 곧바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열차는...시간이 조금 지나자마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통제 불능에 빠졌다...기관사는 최선을 다해 제동 핸들을 당겼다...열차의 쇠바퀴는 브레이크 슈우와 밀착되어 벌겋게 달아올랐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 불똥들이 목재로 만들어진 객차 밑바닥에 꽃을 피었다. 불이 붙은 객차 안은 젊은 병사들의 비명으로 가득 찬 생지옥이 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불길을 피해 열차 밖으로 뛰어내렸지만 생존 가능성은 없었다...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지난 곡선 지점에서 기관차에 연결된 첫 번째 차량이 탈선했다...7명의 제동수 중 2명은 이 과정에서 열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책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박흥수 저)
 
1917년 12월, 프랑스 군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전선에 있던 병사들 중 약 1천여 명에게 15일의 특별 휴가를 준다. 이들은 전선에서 빠져 나와 파리로 가는 군용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런데 군이 운송의 효율성을 위해 안전을 포기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두 대의 기관차로 나누어서 따로 가야 했던 객차(승객 칸)와 화차(화물 칸)를 하나의 기관차에 붙인 것이다. 결국 국경지대 모단 역 근처에 있는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가속이 붙게 된다. 엄청난 무게를 하나의 기관차가 감당을 못했다. 결국 곡선 부근에서 탈선해 산길에 처박혀 산산 조각이 난다. 1차 세계대전 중 세계 최악의 열차 사고였다. 타고 있던 1천명의 병사 중 약 8백여 명이 죽었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기관사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사고 자체도 언론 통제를 받아 단신 처리 되었다. 장교들은 다른 특급열차에 탔기 때문에 모두 무사했다. 결국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영화 ‘부산행’에선 국가적 재난 사태를 곧 진압될 사소한 폭동이라며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정부의 발표가 나온다. 국민들이 수많은 피해를 입고 난 후 누가 책임을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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