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ffpost Korea kr

'에티켓'을 지키지 않았다고 남에게 수치를 주는 사람들은 왜 늘어나고 있을까

게시됨: 업데이트됨:
인쇄

etiquette

지난 주에 젊은 여성이 동네 식품점에서 나가며 ‘에티켓 수치(Etiquette Shamed)’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화창한 목요일 오전에 식품점에서 나가고 있었고, 나는 그 바로 뒤에 있었다. 키가 크고 옷을 잘 입은 젊은 남성이 가게에 들어오다 멈춰 서서 그녀를 위해 문을 잡아주었다. 그리곤 쏘아붙였다. “누가 날 위해 문을 잡아주면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젊은 여성은 안으로 들어가는 남성에게 “아직 고맙다고 말할 기회도 없었네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움찔했다.

내게도 같은 일이 정말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움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위해 문을 잡아준 다음 빈정거리며 “천만에요.”, “고마워요.” 같은 말을 하곤 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혹은 이미 고맙다고 말을 했지만 내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었을 때였다. 나는 그런 행동을 ‘에티켓 수치’라고 부르는데, 그들이 남을 비난하는 것이 그들이 지적하는 에티켓 상의 실수보다 훨씬 더 무례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는 게 놀랍다. 이번 경우 수치를 당한 여성은 너무나 작았고 굉장히 예의 바르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입장에서 화가 났다. 그러나 궁금하기도 했다.

작은 실수나 특징 때문에 남에게 ‘수치’를 주거나 꾸짖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진 것 같다. 소셜 미디어가 현상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해도 그렇다. 최근 12개월 안에 나는 참전했다가 장애를 입고 퇴역한 전직 군인이 텍사스에서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댔다가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 차에 심술궂은 편지를 남겨 놓고 갔다는 이야기를 바이럴 뉴스로 보았다. (그는 대답으로 앞 유리창에 이런 편지를 남겼다. “내가 당신이 ‘보기에는’ 장애인이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내가 느끼는 하체의 고통은 당신이 평생 겪어본 그 어떤 고통보다 심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최근 웹에서 바이럴 된 이야기들 중에는 운동을 한 다음 커피를 사러 줄을 섰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땀 수치’를 당한 여성, 결혼식에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고 갔다가 수치를 당한 여성의 이야기도 있었다. 이러한 ‘수치’ 이야기들은 당연히 수치에 응답하는 통쾌한 이야기들을 낳았는데, 제목에 ‘완벽한 응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최근 두 달 동안 이런 기사들이 있었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여성이 길거리의 괴롭힘에 완벽하게 응답했다’, ‘아들 엘사의 드레스를 조롱하는 낯선 사람에게 엄마가 완벽하게 응답하다’. 사실 ‘완벽한 응답 had the perfect response’으로 검색하면 196,000건 이상의 결과가 나온다.

왜 사람들은 별 것 아닌 일, 혹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낯선 사람을 나무라거나 수치를 주려는 충동을 느낄까? 나무라거나 수치를 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상정한다.

a) 우리가 나무라는 사람은 (가끔이 아니라) 자주 사회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b) 그들이 그러지 않도록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건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인간을 선의로 해석할 큰 기회를 놓친다.

가게를 나서던 젊은 여성은 머릿속이 복잡했을 수도 있고,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고, 그녀의 말대로 “고마워요.”라고 말할 기회조차 없었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남들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데 내 선행에 대한 언급을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문을 잡아줄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는 게 행운으로 느껴진다. 친절한 순간일 수 있었을 화창한 오전에 세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들었다는 게 참 안타깝다.

어린 아이들의 부모가 수치의 가장 큰 표적이 되는 것 같다. 특히 아이가 잘못 행동하거나 오냐오냐 하며 키운 아이인 것 같을 때 그렇다. 몇 년 전에는 심지어 ‘유모차에 타긴 너무 크다 Too Big for Stroller’라는 사이트도 있었다. 유모차에 타기엔 너무 커보이는 아이들이 유모차에 탄 사진들을 올린 곳이었다. 아이 머리에 ‘걸어’라는 단어를 포토샵으로 합성해 두었다. (사이트를 만든 사람은 웃기려고 만든 곳이라 했지만, 그런 광경을 보았을 때 거슬린다고 인정했다.)

이러한 수치의 사례들은 왜곡된 우선 순위 감각을 드러낸다. 어린이에 대한 학대나 위험이 의심될 경우 신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육아에 있어 사소한 차이를 비난하는 것은 이러한 더 큰 책임에서 주의를 돌린다.

작년 9월 11일 무렵, 2001년 테러로 남편을 잃은 뒤 뉴욕에서 뉴저지로 이사한 여성이 인터넷에 올렸던 오래된 글을 발견했다. 그 글에 따르면 그녀의 집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갓난 아이가 젖니가 나서 울 때마다 바닥을 쾅쾅 굴렀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윗집 사람들과 건물주에게 자신이 변호사이며 9/11로 남편을 잃었고, 다시 한 번 괴롭히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글의 결론에서 그녀는 ‘나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다른 여성들도 이런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라고 썼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남을 비판하는 곳이 되어, 각자 이 정도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낯선 사람들이 멋대로 넘겨짚지 않는 것일까.

‘수치’와 ‘수치 역전’ 이야기들이 흔해진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는 사람들이 과민해지고, 늘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안다. 지난 주에 여성을 비난했던 젊은 남성은 자신이 지각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거나, 머릿속이 복잡했던 걸 수도 있다.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게 좋겠다.

안타깝게도 지난 주에 ‘에티켓 수치’ 사건을 목격했을 때, 나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나는 그 남성에게 소리질렀다. “우리 모두 당신처럼 완벽해지려고 노력할게요.” 나 역시 그에게 교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한 세대 전, 우리 부모는 다른 에티켓 규칙을 가르쳤다. 할 수 있는 좋은 말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 이러한 예의바름이 다시 필요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낯선 사람을 야단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미소를 지으려 해보거나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 그 덕에 누군가의 하루가 훨씬 밝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허핑턴포스트US의 What Happened After I Watched A Young Woman Get ‘Etiquette Shamed’ At The Grocery Stor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