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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벗삼아'는 박근혜 대통령의 18년 단골 레파토리였다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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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GEUN HYE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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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신 여러분도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어제(21일) 박근혜 대통령의 이 발언은 단연 화제였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각종 의혹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감싸는 발언'이라는 해석도 나왔고(청와대는 부인하고 있다), 임기 막판을 맞이하는 박 대통령 자신의 다짐을 표현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 발언이 18년 전 박 대통령이 쓴 책 제목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park geun hye

문화일보가 22일 보도한 것처럼, 박 대통령은 1998년에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 책에는 1979년부터 1998년까지의 일기가 담겨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옛날 같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고통일 텐데 지금은 눈물 한 방울 없이 담담히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한다.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떤 어려움도 마다치 않고 극복하게 하는 것"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목적을 향해 끝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이 지워준 책임과 사명을 다하지 않고 외면할 땐 더 고통스럽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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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지난해 소개한 바에 따르면, 이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진실한 사람'에 대한 생각은 1989년 11월 6일 일기에 나온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이라며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소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친근감을 갖고 대하게 된다"고 적었다. '배신'에 대해선 이보다 8년 앞선 1981년 9월 30일 일기에서 "배신하는 사람의 벌(罰)은 다른 것보다 자기 마음 안의 무너뜨려선 안 되는 성(城)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거다. 그래서 두 번째, 세 번째 배신이 수월해진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5년 11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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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과거에도 책 제목인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라는 표현을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다. 이 표현이 사용된 맥락을 잘 살펴보면, 그 뜻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2006년 1월15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는 15일 사학법 투쟁과 관련,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 살아온 내 인생 같이 나는 나의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박 대표는 "비록 지금 나의 길이 어렵고 힘들어도 누군가는 꼭 해야 될 일이기에,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끝까지 견디어 나갈 것"이라며 "소신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욕을 안 먹을 수 없으니, 그 비난은 가슴에 다는 훈장 이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6년 1월15일)

2007년 5월 (수필문예지 '월간에세이' 기고에서)

그는 “포기하기보다 ‘운명이 나에게 준 사명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 작든 크든, 무겁든 가볍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 고난을 벗 삼고 진실을 등대 삼는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도 썼다. (경향신문 2012년 12월11일)

2013년 6월29일 (중국 칭화대 연설)

박 대통령은 ”인생이란 살고 가면 결국 한 줌의 흙이 되고 100년을 살다가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결국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며 “그러므로 바르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시련을 겪더라도 고난을 벗 삼고 진실을 등대 삼아 나아간다면 결국 절망도 나를 단련시킨다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국민일보 2013년 6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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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박 대통령은 '고난을 벗삼고 진실을 등대삼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소신대로 행동하겠다는 의지를 꽤 오랫동안 일관되게 밝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고난'은 자신에 의견에 반대되는 무엇, '진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무엇이다.

물론 정치인에게 '소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운명'이나 '사명감', 그리고 '시련' 같은 단어들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눈 여겨 볼 만하다.

박 대통령에게 '소신'이란 치열하게 학습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세워지는 무엇이 아니라, 그저 '운명이 지워준 책임'이자 '나에게 부여된 사명', 즉 '나에 대한 믿음'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소신'에 반대되는 것들은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 아닌) '시련과 절망'으로 인식되며, '욕을 먹더라도' 그것을 견뎌내야 한다는 믿음으로 연결된다.

냉정히 따지자면, 이건 민주주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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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인터넷 매체 '데일리안'은 당시 '박근혜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던 이 책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구절들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991년 2월 21일

“오늘 <열국지>를 다 읽었다. 그 전체 소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열국지>는 어느 의미에서 ‘지도자론’이다. 그 수많은 나라의 갖가지 인간상을 보여 주는데, 그것이 임금 중심의 이야기가 되다 보니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나라를 지키고 국민이 평안하게 살도록 다스릴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정치의 요체란 무엇인가? 강태공은 ‘그것은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고 또 어느 사람은 ‘그것은 임금이 먼저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라 했다.”

1991년 4월 20일

“그러나 사회의 모습이 이렇게 옳지 못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내 마음 속에 강하게 용솟음치는 욕망이 있다. 꿈이 있다. 나에게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처럼 뚜렷하게 나타나는 생의 목표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사가 허무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가치의 빛을 발하며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1991년 4월 28일

“무능하고 무기력한 하늘, 이렇게 모든 악행을 방치하면서 왜 성경, 불경 등은 인간에게 선하게 살라고 가르치는가. 그러나 나는 헛됨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생의 등대로서 한 가지 목표를 정하였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죽는 날까지 바른 마음을 지니고 바른 언행을 익히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1991년 5월 9일

“진시황이 그 혹독한 정치로 진나라는 15년 만에 망했는데 그 멸망의 원인이 된 농민의 봉기는 작은 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대 폭발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그 15년의 세월 동안 쌓인 백성의 원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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